세상의 끝으로, 산티아고 순례길
세상의 끝으로, 산티아고 순례길
  • 글 사진 우근철 기자
  • 승인 2017.06.29 0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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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에겐 ‘카미노 길’로 더 유명한 순례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야곱이 복음을 전하며 걸었던 길로,

그 후 1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은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있다.

하지만 이 길에 선 사람들이 모두
성직자나 수도사, 종교인인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5년의 교제 끝에 결국 헤어진 연인과 마지막 통화를 하고 떠나온 사람도,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워 덜컥 배낭을 들춰 멘 사람도,
또 어느 날 문득 핸드폰 속 수많은 전화번호 가운데
정작 연락할 곳은 아무데도 없음에 쓸쓸해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광고 문구 하나에 이끌려 갑자기 떠나온 사람도 분명 있겠지.
모두들 저마다 가진 사연과 목적은 달라도
마음속에 무언가 한 가닥의 바람을 품고 이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걷는 거야
게으름도 피우면서 천천히 느리게

#2

누가 “How are you?”라고 물을 때
머리를 뱅뱅 굴리다가
‘How = 어떻게’
그래서 ‘어떻게 왔니?’로 해석하고는
당당히 말했다.

“I'm walking.”
안부를 묻는 질문에
‘나는 걷고 있어’라고 대답했단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맞는 말 같기도 해.
굉장히 진취적이잖아?

How are you?
I'm walking.

#3

모두 각자의 쓰레기 정도는 챙기려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발견되는 빈 캔이나 잡다한 오물들을
중간 중간 허리를 굽혀 봉지에 담는 한 아저씨.

정직한 눈매와 정직한 수염,
그리고 정직하게 기른 머리.

복장도 옛날 순례자 복장을 그대로 재연한 로버트 아저씨는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순례자들 사이에서
홀로 멈춰서 허리 굽히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로버트, 지금 쓰레기 줍고 있을 때가 아니야.
숙소에 도착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물론 도착하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만 어떻게 도착하는가도 중요하지 않을까?

#4

어림짐작으로 70세 정도로 보이시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자신의 키만 한 배낭을 메고 버겁게 걸음을 옮기는 프랑스 할머니셨죠.

힘겨운 이 길을 걷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질문을 던졌어요.
할머니는 왜 힘든 이 길을 걷고 있어요?

머뭇거리시다 눈을 반짝이며 서툰 영어로 말해주시더군요.

“70평생을 살며 나를 돌보지 않은 것에 반성하며
이제라도 나와 마주하기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다우.“

- 어느 알베르게 방명록에서 발췌

#5

길을 걷다 우연히 한 소녀를 만났다.
사람들이 하나둘 돌을 올려놓으면서 작은 탑이 만들어진 곳에
소녀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정성스레 돌멩이를 올린 뒤
기도하는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뭐라고 말은 걸어 보고 싶은데 영어가 안 되니
불쑥 “You are so beautiful.”이라고 말했고
소녀는 “Thank you.”라고 하더니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녀는 어떤 바람을 품고 기도를 했을까.
생각해 보면 나도 하늘에 계신 누군가를 꽤나 찾았다.

소풍날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집에 따뜻한 화장실 하나 만들어 달라고,
로또 1등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소소한 것들부터
말로 다 할 수 없는 거창한 것들까지.

짧은 시간이나마
두 손을 모은다는 것.
그처럼 솔직한 고백도,
사랑스러운 제스처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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