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않으니 이렇게 예뻐!
기대하지 않으니 이렇게 예뻐!
  • 글 사진 이두용 기자
  • 승인 2017.06.25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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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자그레브

통과의례라고만 생각했다. 세르비아로 가는 길, 직항이 없어 오가는 길에 크로아티아에 들러야 했으니. 거기다 자그레브. 크로아티아를 떠올리면 눈부신 바다가 먼저인데 수도인 자그레브와는 정반대의 느낌이라 기대도 안 했다. 그런데 하늘이 지나치게 파랬다. 묘한 끌림에 도시에 발을 디디니 걷는 곳마다 예쁘다. 바다의 으뜸은 아니어도 버금은 간다. 여기!

화려한 문양이 눈길을 사로잡는 자그레브의 상징 성 마르크 성당.

도시탐방, 하루면 충분해
국내에서 크로아티아가 인기를 모은 건 순전히 바다 때문이다. TV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를 비롯해 여러 편의 광고에서 많은 이의 눈도장을 찍었던 크로아티아의 바다. 수도인 자그레브도 등장하긴 했지만 눈부신 아드리아 해의 아름다운 파도를 넘을 수는 없었다. 국내에선 크로아티아를 얘기하면 많은 사람이 그림 같은 풍광의 해변 마을을 먼저 떠올린다.

그래서 수도인 자그레브에 들어서면서 뭔가를 기대하는 이는 적다. 본 여정으로 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자그레브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작은 도시가 얼마나 매력 덩어리인지 알게 된다. 나처럼.

로트르슈차크 타워 입구에서 내려다 본 자그레브 시내 전경.

한국은 여름으로 향하는 계절. 이곳 역시 푹푹 찌는데 하늘은 우리네 가을을 닮았다. 정말 새파랗다. 거기에 건물 위로 올라탈 것처럼 잔잔히 깔려있는 구름은 마치 누군가가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처럼 신비로웠다.

도시 전체가 장난감 블록처럼 알록달록한 건물로 가득한 이곳인데 날씨까지 이렇게 도와주니 내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자그레브를 사진에 담은 사람들의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내가 발견한 수많은 그들의 사진엔 내가 본 것과 똑 닮은 하늘과 그 안의 환상적인 구름이 담겨있었다) 누가 언제 찾아도 하염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하는 자그레브. 이 도시가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다.

자그레브의 카페거리로 유명한 트칼치체바는 여행객에게 늘 인기다.
날씨만큼이나 거리에 앉아 커피와 낮술(?)을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도 모두 밝다.

사실 자그레브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첫인상은 평범했다. 오히려 세련미가 하나 없는 정류장은 도시의 첫인상을 많이 깎아 먹었다. 하지만 기대감이 낮아지면서 걸음마다 따라붙는 컬러풀한 거리와 건물,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씩 하나씩 매력을 느끼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그레브에 머무는 시간을 좀 더 여유 있게 잡을걸’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한국과 워낙 멀어서 자주 오기 힘든 곳이지만 아쉽기만 할 이유도 없다. 열심히 걸으면 유명한 곳은 도보로 하루면 전부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내 발걸음에도 모터를 달았다. 더운 날씨가 문제였지만 한국에 돌아가서 후회할 일을 떠올리면 이곳에서 더위를 먹는 일보다 덥다는 이유로 볼 것을 보지 않은 게 클 거라 생각했다. 시간이 촉박했으니 더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찍고 싶은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쉽게 분류됐다. “좋아 이 골목은 여기까지~ 다음 골목!”

광장을 지나 성스러운 곳으로

반 옐라치치 광장에 우뚝 서 있는 반 옐라치치 총독 동상.

아무리 하루 만에도 돌아볼 수 있는 곳이지만 중심은 엄연히 존재한다. 보통 도시의 중심은 광장. 우리는 마당이라고 불렀고 군대에선 연병장, 학교에선 운동장이라고 부르는 도시 혹은 집단의 중심을 이루는 넓은 공터다.

자그레브의 중심은 반 옐라치치 광장Ban Jelačić Square이다. 꼭 도시의 중앙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광장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들어서고 시가지가 형성됐다. 반 옐라치치 광장 역시 17세기에 만들어져 도심의 역할을 톡톡히 하며 수세기를 이어왔다.

이 광장은 과거 자그레브의 총독을 지냈던 반 옐라치치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오스트로-헝가리 스타일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광장 중앙에는 1866년 오스트리아 조각가가 제작한 반 옐라치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작품이 어찌나 정교한지 지금이라도 뽑아 든 칼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전진할 것만 같다.

광장 뒤로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그늘진 안쪽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스톤게이트다. 이곳은 크로아티아가 올드 그라데츠Gradec로 불리던 13세기에 지역을 감싸던 4개의 문 중 북쪽을 지키던 문이었다.

원래 성문에는 화려한 나무 장식이 돼 있었는데 1731년 대화재로 모든 것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안에 있던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림은 전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이런 일화 덕분에 화재 이후 이 그림은 신성한 그림으로 추앙받게 되었고 이곳 역시 성지순례지가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성모마리아 그림이 발견된 곳은 이곳 재 한가운데였으며 액자만 탔을 뿐 그림은 전혀 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스톤게이트의 깊이 들어간 부분에 바로크 양식의 제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그림을 모셔놓게 되었다. 지금도 그대로다.

스톤게이트에는 평일 낮에도 사람들이 모여 기도 드린다.
스톤게이트 안쪽엔 아직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 그림이 있다.

평일 낮인데도 여러 사람이 그림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기도하는 사람도 여럿이다. 게이트 안쪽을 들여다보니 팔을 뻗으면 닿을 법한 거리에 정말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이 놓여 있었다. 화재를 겪었다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깨끗하게 보존돼 있다.

스톤게이트는 밝은 대낮에도 그늘이 지는 문 모서리 안쪽에 위치해 있어 이곳에 들어서면 자연스레 마음이 숙연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간절함이 생기는 것 같다. 나도 마음에 담았던 바람을 기도로 내려놓고 돌아섰다.

반 옐라치치 광장을 가로지르는 자그레브의 명물 트램.

아름다움이 과한 도시풍경
이젠 다시 밝은 곳이다. 스톤게이트에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자그레브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 마르크 성당St. Mark Church이 나타난다. 이곳이 상징이 된 건 푸른 하늘과 화려한 매칭을 이루는 건물의 지붕 덕분이다.

성 마르크 성당은 도시의 어떤 풍광과도 잘 어울린다.

이 타일 모자이크는 마치 꼼꼼하기로 소문난 예술가가 십자수로 건물 지붕에 문양을 낸 것처럼 알록달록하다. 컬러도 다양한데 하얀색과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이 적절히 섞여 있어 푸른 하늘과 함께 사진에 담아내면 그 자체로 한 장의 그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화려한 패턴 중앙에는 두 개의 문양이 새겨 있는데 왼쪽은 크로아티아 최초의 통일 왕국인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슬라보니아 왕국의 문장을 표현한 것이고 오른쪽은 자그레브시를 상징하는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이다.

각각의 의미가 있는 모자이크지만 들여다볼수록 그저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컬러조합과 그림의 표현이 재미있다. 보는 이마다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예술적 가치와 지붕의 화려한 문양 덕분에 많은 이들이 성당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곳에서 하늘과 건물 지붕에 감탄했다면 다음은 로트르슈차크 타워를 찾아가는 게 좋다. 이젠 ‘하늘+건물 지붕’이 아니라 ‘하늘+도심의 건물들’을 만날 차례다. 자그레브의 건물들이 하늘과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탑 전망대에 올라가면 더욱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지만 사실 입구에서 보는 조망과 큰 차이가 없다. 입구에서 뒤를 돌아봐도 ‘우와!’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눈에 보이는 건 다소 거짓말 같은 풍광이다. 사진을 찍으면 으레 보정을 하기 마련인데 이건 원래 하던 대로만 보정해도 과하게 했다는 얘기를 듣거나, 합성했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가짜(?) 같은 풍광을 보여준다.

공기가 맑아 가시거리가 먼데다 자연광이 강해 사물이 가진 색을 강하게 반사시키기 때문이다. 암부와 명부의 차도 커서 눈으로 봐도 비현실적인 풍광 느낌이 난다. 발걸음을 돌리기 아쉬울 만큼 자꾸만 멋있다. 꼭 누군가와 다시 오고 싶을 만큼. 그래서 ‘거봐 과한 뽀샵이 아니지?’라고 증명하고 싶을 만큼.

세계에서 가장 짧은 66m 길이의 케이블카도 볼거리다.
많은 이가 찾는 자그레브 대성당. 당시 오른쪽 첨탑은 공사중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빨리 반 옐라치치 광장 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되는데, 이 녀석 또한 물건이다. 길이가 고작 66m로 세계에서 가장 짧은 케이블카다. 레일을 타고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올라가는 데도 고작 1분 정도가 걸린다.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 녀석이지만 해가 도시를 끌어안고 떨어지는 시간엔 1분 동안 가장 아름다운 골든타임을 선사할 환상의 특급열차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유 없는 이별은 없다고
자그레브는 사실 미술관과 박물관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마라 미술관, 현대미술갤러리, 메슈트로비치 아틀리에를 비롯한 다양한 미술관과 박물관이 자리한다. 음악과 연극, 무용 등의 공연도 곳곳에서 펼쳐진다. 예술 감상만을 위해 도시를 찾아도 머무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예술의 문외한이라고 자신하며 이름난 미술관·박물관을 간과한다 해도 귀에 솔깃한 곳이 있으니 바로 ‘실연박물관’이다. 세상의 모든 ‘헤어짐’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곳인데 구구절절한 편지에서부터 그들만의 깊은 사연으로 눈물 없이는 지나칠 수 없는 다양한 물건이 전시돼 있다.

구구절절한 사연과 함께 전시된 누군가의 이별 기념품.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깨끗하게 지우겠다고 구입하는 지우개.

다소 유치한 사랑에서 비롯된 미소 지어지는 가벼운 이별 선물도 여럿 있지만, 엄마가 자살하면서 자녀에게 남긴 유서나 아기가 유산되면서 이젠 쓸모없어진 유아용품 등 안타까움과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전시품들도 제법 있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어떤 사연엔 웃기도 하지만 또 다른 사연엔 울기도 한다. 그 어떤 이별이 즐겁기만 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가벼운 일이 내게는 또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느끼는 사람마다 모두 다른 것이 사랑이고 이별이 아닐까.

영국박물관 1층에 전시돼 있는 ‘삶과 죽음에 관한 전시’와 어느 정도는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곳은 모든 이별이 죽음으로 비롯된 것이라 더 슬프고 아프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살아서 이별하는 것도 때로 죽음만큼 힘든 것이다.

과거와 현재, 사람과 트램이 공존하는 거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곳의 관람이 끝날 때 즈음 기념품처럼 너도나도 하나씩 구매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나쁜 추억을 지우는 지우개bad memories eraser’다. 우리 돈으로 한 개에 5,000원쯤 하니 싼 가격은 아닌데도 살면서 만날 수 있는 세상의 많은 헤어짐을 눈앞에서 보고 난 후라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깨끗하게 지우리라는 다짐을 하고 하나씩 구입한다.

진짜 날개를 단 듯 불티나게 팔린다.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비싼(?) 지우개를 사는 사람들을 보면 누구나 ‘나는 저런 상술에 넘어가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는데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지우개를 보게 된다. 나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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