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눈, 눈 세상
눈, 눈, 눈 세상
  • 글 사진·권혜경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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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일기36

이 산골에서 겨울을 지낸 지 어언 팔 년차. 산골에 들어오던 첫해 겨울에는 고립되어도 좋으니 눈이나 쏟아져 한두 달쯤 눈 구경 실컷 하며 고립되어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바람이었습니다.

도시에 살 때는 눈 내리는 게 참으로 낭만적으로 느껴져서 눈만 내리면 일부러 없던 약속도 만들고 눈 구경하러 고궁에도 가고 눈밭에 뒹굴며 놀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처음 이 산골에 내려와 한 일 년 정도 눈이 내리면 장화를 챙겨 신고 눈 구경을 나서는 서울내기가 보여주는 순진무구한 행동들을, 무릎까지 쌓이는 눈 세상을 혼자 발자국을 남기며 싸돌아다니는 정말 행복한 시간들을 보낸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리고 팔 년 후 눈이 유난히 많은 올 겨울, 눈이 내리고 또 내리고, 눈을 치우고 또 치우고. ‘눈 징그러워요, 고만 좀 내려줘요~ 제발!’ 이런 마음이 살짝 든 어제 문득 처음 이 산골에 스며든 그때처럼 눈 구경을 나서고 싶다는 생각에 뒷집 사는 총각 순원 씨와 간단한 산행 준비를 하고 가리왕산으로 눈 구경을 나섰습니다.

늘 눈이 내린 날에는 마당에 눈을 치우고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눈을 치우고는 기운이 다해서 눈 덮인 숲을 바라보는 것으로 눈에 대한 예의를 다했던 지난 시간을 보상이라도 해 주려는 듯 날씨는 맑고 청명했습니다.

눈길을 걷기 위해 가리왕산 임도를 택한 것은 너무 잘한 일이어서 소나무 숲이 우거진 가리왕산 임도에는 그동안 내린 눈들이 그대로 쌓여 있어 산행을 시작한 지 십 분쯤 지났을까요? 겨우내 운동도 안 하고 지냈던 무거워진 몸은 힘이 든다고 고통스럽다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괜히 등산로를 따라 더 올라갔다가는 힘든 시간들을 견뎌야 했을 것 같았습니다.

무릎, 혹은 발목까지 빠지는 가리왕산의 숲길은 그자체로 판타지였습니다. 힘 좋은 순원씨가 앞서서 러셀을 하고 그 뒤를 따라 한발한발 나가다 보니 가리왕산의 포근한 산세가 보이는 산 중턱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길을 함께 나선 청년 순원 씨는 임도를 따라 걷는 저와는 헤어져 숲으로 들어가고 혼자 새하얀 숲길에 발걸음 도장을 찍으며 산행을 한 지 두 시간 쯤 지나니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아, 간사한 사랑의 마음, 아니 사람의 마음. 처음 숲길에 발자국을 내며 걷기 시작할 때는 잘 왔다는 마음이 들며 마치 가리왕산 정상까지 다녀올 것처럼 소나무 숲길을 사랑하더니 그 숲길에 발자국을 낸 지 두 시간만에 지쳐서 그만 걷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변심을 가리왕산 산신령은 이해해 주실까요?

그렇게 달봉이도 저도 지쳐서 걷다보니 숲으로 들어 한참을 먼저 올라가던 순원씨가 양지 바른 곳에 눈을 치우고 자릴 잡고 라면을 끓여 먹으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니 환호성이 저절로 나옵니다.

산속에서의 라면 맛은 언제나 황홀한 법. 오늘 라면도 예외는 아니어서 라면 두 개가 순식간에 국물까지 사라집니다. 라면을 먹고 집에서부터 챙겨간 향 좋은 원두커피까지 한잔 마시니 마음은 천국. 다시 가리왕산 정상까지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만 그러나 과욕은 금물, 오늘 목표로 했던 가리왕산 하봉 근처 표지석까지만 걷기로 하고, 다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 숲길에 발자국을 찍기 시작합니다.

입춘도 지나고 벌써 우수가 오늘, 그토록 매섭게 몰아치던 동장군의 바람도 이젠 한풀 꺾이고 눈이 쌓인 숲에 들어 있어도 봄의 기운이 느껴지니 이제 겨울을 견뎌낸 나무들이 새로운 싹을 틔워 내기만을 기다리면 되겠지요?

권혜경 | 서울서 잡지사 편집디자이너로 일하다가 2004년 3월 홀연히 강원도 정선 가리왕산 기슭으로 들어가 자리 잡은 서울내기 여인. 그곳서 만난 총각과 알콩달콩 살아가는 산골 이야기가 홈페이지 수정헌(www.sujunghun.com)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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