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스팟, 중남미 문화원
산책 스팟, 중남미 문화원
  • 이지혜 기자 | 정영찬 사진기자
  • 승인 2017.05.22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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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한가운데를 걷다

50여 년을 식민지로 살았던 한국 정서의 근간은 ‘한’이다. 그렇다면 300여 년간 통치당하며 피지배국의 주체성과 지배국의 유입된 문화가 합해졌을 때, 그 민족의 정서는 어떤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한’과 비슷하지만 단지 ‘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오랜 역사와 탄압의 지역 중남미. 그곳의 문화가 좋아 무작정 한국에 중남미 문화원을 세운 노년의 부부가 있다. 봄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날, 고양시에 자리한 중남미 문화원을 찾았다.

아름다운 조각상이 펼쳐져 있는 길은 산책하기 좋다.

노후를 위해 샀던 땅
1968년 남파 공작원 김신조 사건으로 경기 북부의 땅값이 급락했던 시절, 당시 외교관 생활 중이던 중남미 문화원의 이복형 원장과 아내 홍갑표 이사장은 남편의 퇴임 후 오붓한 노후를 위해 고양시에 평당 300원의 돈을 들여 땅을 샀다. 그곳에서 부부는 목가적인 노후를 기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는 중남미로 건너갔다. 초대 코스타리카 대사, 도미니카, 아르헨티나, 멕시코 대사 등을 역임하며 30여 년을 중남미에서 보냈다. 평소 한국에서도 골동품 모집이 취미였던 홍갑표 이사장은 중남미의 잉카, 마야 문명에 매료돼 그곳에서 문화재를 수집했다.

다양한 중남미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 내부

중남미 전문 외교관으로 30여 년간 뛰어온 남편과 함께 부임지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며 유물을 수집한 홍 이사장은 남편의 퇴임 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30여 년 전 씨앗을 뿌렸던 고양시의 나무들은 그사이 짙은 녹음을 뽐내며 떠나기 전과는 다른 풍경을 만들어냈다. 부부는 본격적으로 이 터에서 덩굴이며 나무 한 그루, 돌 하나를 정성스럽게 꾸미기 시작했다.

중남미의 기록을 세우다

오랜 시간 걸쳐 완성시킨 벽화.

소소한 일상을 보내던 부부에게 주한 외교사절이나 고위직 부인들이 놀러올 때마 다 홍 이사장이 모은 컬렉션을 보여줬다. 감탄하는 그들을 보며 홍 이사장은 문득 박물관을 결심한다. 우리 아이들을 비롯한 더 많은 지역 주민에게 자신의 소장품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결국, 부부는 1994년 이곳에 박물관을 개관한다. 중남미 문화원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 1997년 미술관, 2001년 조각공원, 2011년 종교전시관과 벽화까지 세우며 4천여 평에 달하는 중남미 문화원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너른 공간 활용이 눈에 띈다.

고대 유물부터 중남미 사람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소품들이 전시된 박물관, 브라질, 칠레, 쿠바 등 중남미 지역 출신 작가들의 열정적인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 마야 상형문자와 라틴 바로크 종교미술의 정수를 볼 수 있는 종교 전시관, 중남미 12개국 대표 작가들의 조각품이 전시된 조각 공원, 2년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온 마야 상형 문자와 아스텍 달력을 테마로 한 세라믹 벽화까지. 마야, 잉카, 아스텍 문화가 태동한 라틴아메리카를 그대로 옮겨온 중남미 문화원. 바닥 재질부터 문, 벤치 하나까지 홍 이사장이 직접 공수해 온 것들이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옮겨놓기보다는 골동품 시장에서, 중남미의 거리에서, 작업실이 많이 모여있는 지역에서 직접 작품을 선택해 모은 것들이라 더 가치 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던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문화를 알리는 것은 홍 이사장이 40년간 걸어온 길이다.

중남미에서 직접 공수해온 개성 넘치는 조형물.

문화는 소유가 아닌 나눔
부부에게 문화는 ‘나눔’이다. 소유하고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다. 박물관 모두를 사회에 기증하고 자라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 문화를 나누고 싶다는 꿈은 부부가 잃지 않고 꾸는 가장 큰 꿈이다.

부부는 쉼 없이 꿈을 꿨고 꿈을 이뤘다. 지금도 꿈을 꾸는 중이다. 홍 이사장은 기자에게 “2020년에 재밌는 걸 계획 중이야. 더는 비밀이야. 꿈꾸는 데 돈 드니?”하며 소녀처럼 웃어 보인다. 고민은 짧고 행동은 서슴없는 것. 움직이다 보면 길이 있고 행동에 결과가 생기기 마련이란 것이 그녀의 원칙이다. 중남미의 열정으로 여든넷의 나이에도 여전히 꿈을 꾸는 홍 이사장. 그리고 그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여든여섯의 남편.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 하나가 고양시 모퉁이에서 한없이 커지는 중이다.

www.latina.or.kr
경기도 고양시 고양동 302-1
031-962-7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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