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흐르는 신사의 품격, 영국 런던
도시에 흐르는 신사의 품격, 영국 런던
  • 글 사진 이두용 기자
  • 승인 2017.05.03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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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벤과 버킹엄 궁전, 피카딜리를 지나 영국 박물관까지

런던. 흐리고 비가 내렸다. 머물었던 기간 내내. 처음엔 아쉬웠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괜찮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 어릴 땐 ‘영국’하면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우산을 들고 걷는 걸 상상했다. 다행히도 나의 첫 영국은 어릴 적 상상을 깨뜨리지 않았다. 다음에 올 땐 해리포터 만나는 상상을 하고 와야지.

빅벤은 명실상부한 런던의 상징이다.

런던을 물으면 빅벤으로 답하다
공항에 내렸는데 하늘이 심상치 않다. 시간은 한창 밝을 2시. 곧 맑아지겠지. 택시에 짐을 싣고 숙소로 향하는 길, 창밖 풍경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여러 나라, 많은 도시를 거닐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수많은 이가 다녀간 런던은 처음이었다.

TV와 여러 편의 영화에서 봤음직 한 영국의 풍경. 그리고 그 중심 런던의 심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설렜다. 그러고 보면 난 설렌다는 말을 자주 쓴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가보는 곳이 유독 많다. 같은 도시를 가도 매번 낯선 길을 찾아 걷는다. 매번 설렘은 기대로 바뀐다.

양복을 입고 한 손에는 서류를 들고 자전거 타는 신사.

숙소에 짐을 내려놓으니 밖에 땅거미가 내린다. 순전히 먹구름 때문이다. 곧 밤이라도 될 것 같다. 첫날은 쉬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곳에 머무는 일분일초가 귀하게 느껴졌다. 카메라를 들고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데스크에서 지도를 건네받고 보니 숙소가 런던의 중심에 있다. 발품 팔 각오만 하면 걸어서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런던의 첫 눈도장은 빅벤으로 정했다. 우리가 영국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그곳. 맞다. 거기. 뉴욕 하면 ‘자유의 여신상’, 로마 하면 ‘콜로세움’, 파리 하면 ‘에펠탑’을 바로 답하는 것처럼 영국 하면 누구라도 ‘빅벤’을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빅벤의 정식 명칭은 빅벤이 아니란다. 뭐지. 이곳은 지난 2012년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며 ‘엘리자베스타워’로 부르기로 했다고. 빅벤이란 이름은 1859년 이 종탑을 만들 당시 공사를 담당한 벤저민 홀 경(卿)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란다. 정식 명칭이야 어찌 되었든 빅벤이라는 이름이 더 자연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시계탑 4면에 자명종 시계가 달려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런던아이는 밀레니엄을 기념하며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빅벤과 함께 이곳의 명물이다.

무거워진 구름은 가끔 비를 뿌렸다. 하지만 런던 최고의 명소답게 빅벤 주변엔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날씨는 흐린데 표정들은 하나같이 밝다. 빅벤의 종탑은 생각보다 웅장했다. 하늘 향에 뻗어 오른 종탑이 영화 해리포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가까이서 보니 더 크다. 시계탑 4면에는 자명종 시계가 달려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시계 자체도 독립적으로 세워진 것 중 세계에서 3번째 높이에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월드 클래스다.

보통 런던의 일상을 떠올리면 등장할 것 같은 코트를 입은 신사의 출근길.

바로 앞으로 웨스트민스터 다리가 이어져 있고 그 아래로 템스 강이 흐른다. 마치 영국 소설의 한 대목 같다. 날이 흐려서 운치를 즐기기엔 더 적당하다. 템스 강의 폭이 더 넓은데 센 강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다리도 퐁 네프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전혀 다른데 왜 그랬을까.

다리에 오르면 대각선으로 런던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1999년 영국항공이 21세기를 맞는다는 의미로 건축한 대형 관람차인데 지금은 빅벤과 함께 이곳 최고의 명소다. 새 천 년을 여는 상징 관람차에 올라 역사적인 도시 런던을 내려다보며 하늘에서 원을 긋는다. 생각만으로도 멋진 일이다.

여왕님 나라의 화려한 피카딜리
빅벤에서의 감상은 자연스레 인근 버킹엄 궁전으로 이어졌다. 높다란 시계탑에 화려하게 새겨진 문양에서부터 도시 전체에 흐르는 근엄(?)은 왕국이어서 더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었다. 여전히 세계에는 20여 개의 왕국이 존재한다. 익히 알고 있는 중동이나 아프리카 국가가 아니어도 스웨덴이나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 국가에도 왕국은 여럿 있다. 하지만 세계의 주목을 받는 왕족과 그들의 문화 등은 영국을 따라갈 수 없다. 궁금했다. 여왕님이 살고 계시는 곳.

버킹엄 궁전 광장 분수대 중앙에 우뚝 선 황금색 천사의 탑.

왕궁에 도착. 없었다. 높은 첨탑이나 기둥 하나도. 이미 알고 왔지만 이렇게 심심하다니. 유럽의 성을 찾아가면 귀족이 살았던 곳이어도 보통은 생각보다 크고 으리으리했다. 더욱이 우리가 유럽의 성을 떠올리면 디즈니의 영화 초입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독일 퓌센의 노이슈반스타인 성이 먼저다. 그런데 지도에서 사진을 보고 왔는데도 작아 보였다.

사실 이곳은 최초 왕을 위한 곳은 아니었다고 한다. 버킹엄 공작의 집으로 지어졌는데 1762년 조지 3세가 왕비 샤를 로테를 위해 구입했다고 한다. 이후 조지 4세가 개축했다고. 새롭게 짓고 처음 거주한 사람은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이후 역대 국왕들이 머물면서 현재까지 명실상부한 영국왕실이 되었다.

높지 않아 보이는 버킹엄 궁전 내부에는 650개가 넘는 방이 있다고 한다.

이곳이 남다른 건 높이가 아니라 너비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높지 않아 보이는 버킹엄 궁전은 내부에 650개가 넘는 방이 있고 뒤편에는 4만8천평에 달하는 정원이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진짜 부자다. 넓은 땅이 있으면 높게 짓는 건 문제도 아니니까. 그리고 영국이 세계에서 집값이 가장 높은 곳이 아니던가. 영국 왕실 스케일에 자연스레 엄지가 치켜세워졌다.

사방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한밤중에도 대낮 같다는 런던의 핫 플레이스 피카딜리 서커스로 향했다. 이곳은 뉴욕으로 따지면 맨해튼에 견줄 수 있는 곳이다. 전통이 살아있는 영국에서도 오늘의 런던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명소다.

피카딜리 서커스는 뉴욕의 맨해튼에 견줄 수 있을 정도의 번화가다.
영화에 등장하는 찰나의 시간을 눈앞에서 멈춘 상태로 생생하게 재현했다.

큰 사거리를 중심으로 사람이 인산인해다. 고풍스런 건물들은 현란한 전광판을 입었다. 별세계다. 곡선으로 제작된 전광판에 국내 브랜드인 삼성과 현대, 기아 등이 반복해서 노출된다. 지금은 전 세계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일류브랜드인데 신기하게 반갑다.

사람이 모인 곳엔 다양한 퍼포먼스가 열렸다. 진짜 동상처럼 분장하고 가만히 서 있는 사람에서부터 행인을 상대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는 사람,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사람, 음악을 틀어놓고 현란하게 춤추는 사람까지. 이곳이 런던에서 가장 젊은 곳임을 한눈에 알게 하는 공연들이었다. 이중 행인을 불러서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표현하는 남자는 모두의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찰나의 시간을 눈앞에서 멈춘 상태로 생생하게 재현했다. 바쁘게 곳곳을 다니다가 이 사람 앞에서 30분은 서서 본 것 같다. 멋졌다.

런던 지하철은 폭이 좁아서 처음 탈 때 신기하기도 어색하기도 했다.

세계의 보물을 한 자리에
런던에선 자전거 탄 사람들을 자주 봤다. 런던의 명물인 검은 택시 블랙캡과 이층 버스인 더블데커가 끊임없이 눈앞을 오가는데 사람들은 자전거를 탔다. 운동을 위해서 타는 사람은 물론 신사처럼 양복을 입고 한 손에는 서류를 들고도 자전거를 탔다. 이들에게 자전거는 생활의 일부 같아 보였다. 길 곳곳에 도심형 자전거 대여소가 있었는데 대부분 타고 다니고 있는지 세워 있는 자전거가 몇 안 됐다. 지난해 2017년 서울시 가이드북 촬영을 했었다. ‘서울시 따릉이’라고 서울 도심 자전거 촬영을 했는데 가는 곳마다 대부분 자전거가 그대로 비치돼 있었다.

영국 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는데, 좁다. 읍내에 다녀오는 시골 버스에 오른 듯 앉기는커녕 서 있는 것도 불편했다. 구석에 서서 두리번두리번하는데 내가 봐도 런던 촌놈이 따로 없다. 국내 지하철이 나한테는 안성맞춤이다.

영국 박물관의 외관은 마치 이탈리아 양식으로 지은 건물 같았다.
수많은 세계의 보물이 전시돼 있는 영국 박물관 내부.

영국 박물관은 이탈리아 건물 같았다. 외관을 찍어놓으니 영국 깃발만 빼면 다른 런던의 건물들과 다르다. 세계의 보물을 한곳에 모아놓았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파리에서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을 갔을 때보다 로마에서 바티칸을 갔을 때보다 기대됐다. 심지어 이곳은 무료입장이다. 착해.

발을 디디기가 무섭게 양옆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이집트 유물이 관람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이곳은 공간과 층마다 오대양 육대주 곳곳에서 가져온 유물로 가득 차 있다. 박물관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난 참 실속 없이 본다. 가끔 길을 잃으면 똑같은 곳을 돌고 있기도 했다.

한 남녀가 고대 이집트의 유물을 가리키며 문장을 해석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최초 1753년에 한스 슬론 경이 개인 수집품을 전시하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1759년 공공에 개방되었고 수많은 사람의 수집품으로 채워지면서 지금은 1300만여 점의 전시물이 있다고 한다. 많다. 다 볼 수 없겠지.

이 전시물 중에는 과거 대영 제국주의 시대에 세계를 다니며 약탈해온 문화재도 많다. 한국에서 가져온 것도 250개에 이른다고. 별도로 마련된 아시아 공간의 한국관에 가보니 우리도 보기 어려운 청자와 백자부터 그림까지 여럿 전시돼 있었다. 한편에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릴 수 있는 옛 시절 가옥이 세트처럼 지어져 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한다는 말이 이때를 뜻하는 것 같다. 만감이 교차했다.

세계의 보물이 모인 이곳이라지만 난 1층 전시실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Living and Dying’. 말 그대로 삶과 죽음에 관한 전시다. 길게 뻗은 유리 전시관 안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깨알처럼 박혀있는 알약들. 그리고 주사, 호흡기, 링거병, 의료기기들. 한 걸음 다가가서 보니 곳곳에 사진과 편지, 일기장 등이 놓여있다.

한국관에는 청자, 백자, 그림 등 250여 개의 우리나라 유물이 전시돼 있었다.
삶과 죽음에 관한 전시로 눈길을 끌었던 ‘Living and Dying’ 전시물.

아이를 안고 있는 암에 걸린 아빠. 호흡기를 차고 있는 아기. 가슴 하나를 떼어낸 엄마, 몸이 성하지 않은 할아버지 등 애절한 사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추억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었다. 눈물로 써내려간 편지에 울컥했다.

비가 오는 밤.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은 그 시간도 아름다웠다.

그날 런던의 어떤 곳보다 이곳을 찾은 것에 대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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