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없는 게 없어요!”
“여긴, 없는 게 없어요!”
  • 글 사진·이소원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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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푸마와 함께하는 KOREA TRAVEL 서울 강북 ③ 남대문시장 & 동대문시장

난전으로 시작한 서울 최초의 근대시장…아웃도어 마니아의 필수 답사 코스

뭐니 뭐니 해도 시장의 묘미는 바로 (이것저것) 구경하는 재미, (싸게) 사는 재미, 그리고 (골라) 먹는 재미가 아닐까.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신기루 같은 곳.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열정적인 그곳은 어쩌면 사람 냄새 흠뻑 맡을 수 있는 이 시대의 마지막 오아시스일지도 모르겠다. 서울을 여행하는 외국인들의 필수코스이자, 살아 숨 쉬는 서울의 역사와 역동성을 동시에 품은 곳. 하루 24시간 잠들지 않는 서울 대표시장,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을 소개한다.


조선시대부터 서민들의 생계를 책임져온 서울의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 지금이야 대형마트나 24시간 이용가능한 편의점까지 넘쳐나면서 재래시장의 입지가 예전만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은 여전히 온갖 물품과 사람들이 몰려드는 서울 최대 시장임에는 틀림없다.

시장의 내력을 알려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상품화폐경제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는 조선후기부터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도 함께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예나 지금이나 행정의 중심지였던 수도 한양은 궁궐, 양반 사대부가에서 필요한 사치품이나 생활용품을 판매하던 종로 일대의 시전상가를 중심으로 지금의 동대문 자리인 이현(배우개)과 남대문 밖 칠패시장, 그리고 한강나루까지 상권이 발달한다.

시대를 관통해 서민들과 동고동락해 온 시장
서울에 최초의 근대적인 도시 상설시장이 세워진 것은 1897년. 지금부터 100여 년 전이다. 당시 한성부는 종로와 남대문로에 늘어서 있던 상업용 가건물들을 철거해 도로폭을 넓히는 사업을 추진했다. 이들 가건물을 말 그대로 임시건물이라는 뜻의 ‘가가(假家)’라고 했는데 ‘가게’는 이 말이 변한 것이다. 이 사업에 따라 가가에서 장사하던 영세 상인들은 당장의 생계가 막막해졌고 정부는 이들에게 남대문 안과 선혜청 창고를 새 장사 터전으로 내어 준다. 지금의 남대문시장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지금의 충무로와 명동 일대에 몰려 살던 일본인들이 남대문시장에 눈독을 들였다. 통감부가 남대문시장을 빼앗아 일본인들에게 넘길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고심하던 한국 상인들은 개천(지금의 청계천) 광교에서 장교에 이르는 구간을 판자로 덮어 그 위에 새로운 시장을 만들자는 대안을 찾는다. 광교에서 장교까지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광장(廣長)시장이라 했고, 자금마련을 위해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조선은 초기부터 육의전과 시전상인에게 국역을 부담시키는 대신 그 보상으로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육의전과 시전상가 외의 상행위는 ‘난전’이라며 금지시켰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서울 남대문 밖의 칠패(七牌)와 동대문 근처의 이현(梨峴) 등에 새로운 시장이 형성된다. 물론 이들은 모두 난전이다.

여기에 개인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조선 후기 사상도고가 삼남·동북지방에서 올라온 상품을 매점하여 서울 성안의 난전상인들에게 제공하면서 난전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한다. 탄탄한 자본을 무기로 한 사상도고들은 대개 특권층과 결탁해 관부에 일정한 사업세를 내고 자신의 상권을 확보해 육의전과 시전상인에게 타격을 준다. 이에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은 한때 정부로부터 난전을 금지하는 ‘금난전권’을 얻어 난전에 압박을 가하지만, 18세기 후반 금난전권은 폐지된다. 상품과 화폐, 그리고 사람이 모이는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조선은 비로소 근대로의 날갯짓을 시작한다. 이처럼 난전의 성장과 확대는 조선후기 봉건적 상업구조를 허물어뜨린 견인차인 동시에 도시상업 발전의 반영이었다.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 남대문시장
조선 후기 남대문 밖 칠패시장은 흥청대던 난전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어떤 연유인지 지금의 남대문시장 위치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이 둘의 뿌리가 같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하다. 명동과도 닿아있는 남대문시장은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필수코스다. 여성복부터 아동복, 남성복, 아웃도어 용품을 비롯해 액세서리, 안경, 문구, 그리고 칼국수, 야채호떡 같은 먹을거리까지 넘쳐나니 그럴 만도 하다. 시장상인의 말로는 “상아도 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없는 것 빼고는 다 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제대로 된 지도도 없고, 거기에 사전준비도 전혀 없이 무작정 남대문을 찾는다면 같은 곳만 빙글빙글 돌다 남대문시장 여행을 마칠 수도 있다. 이곳은 서울 사대문의 하나인 남대문(숭례문) 안쪽의 단순한 대형 재래시장이 아니라, 서울의 역사가 오롯이 새겨진, 현재진행형의 서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속살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진다면 너무 아쉽지 않은가. 또 맛있는 야채호떡과 명물 손칼국수는 그 어디서 먹어도 맛있지만 이왕이면 ‘원조’인 곳에서 맛보고 싶지 않겠는가. 한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지도를 들고 숨어있는 맛집을 찾아내는 기쁨이 얼마나 짜릿한 지.

본지의 특성상 아웃도어 매장 거리를 빼놓을 수는 없으니 잠깐 확인하고 가자. 지하철 4호선 회현역 5번 출구와 6번 출구 사이와 소공동 한국은행과 신한은행 사이에 단독 브랜드 매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남대문시장에는 각종 의류를 비롯해 섬유제품, 주방용품, 가전제품, 민예품, 토산품, 농수산물, 식품, 일용잡화 및 수입상품 등을 만날 수 있는데, 메인은 단연 상권이 전국에 퍼져 있는 의류다.

“아무래도 여성복이 가장 많죠. 그거 아세요? 국내 소매상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유럽에서까지 남대문시장을 찾아와요.”

시장상인은 “아동복은 전국 아동복 시장의 90%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라며 “각 매장에서 각각 상품을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하고, 도매와 소매를 겸하고 있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며 말을 잇는다.

조선시대 난전으로 시작해 6?25 서울 수복 이후에는 이북피란민들이 삶의 터전이었던 곳. 미군 군용 원조물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장. 우리 한국의 서민들의 생계와 꿈을 품은 노점들이 동고동락해온 곳. 이 모든 것이 오랜 기간 이어져 온 남대문시장의 저력은 아닐까.

재래시장+멀티매장=동대문시장
‘동대문시장’하면 떠오르는 것은, 대형 재래시장과 더불어 두타, 밀리오레 같은 동대문역 주변의 대형 쇼핑타운이다. ‘동대문시장’은 과연 어디를 뜻하는 걸까.

통상 동대문시장하면 광장시장과 동격으로 많이들 쓰는데, 이번 본지에서는 동대문시장 여행 범위를 광장시장을 비롯해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에서 1,4호선 동대문역 사이의 크고 작은 다양한 상점들이 모여 있는 시장통(이곳이 지도상에는 동대문시장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동대문종합시장을 포함하는 것으로 하겠다.

동대문시장과 동격인 광장시장은 빼놓을 수 없는데다, 종로5가역과 동대문역 사이의 시장통에는 본지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아웃도어 매장들이 무리지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 시장통에는 헌책방과 책도매상가, 생선구이, 닭한마리, 곱창집들이 골목골목 더해져 있어 오감을 만족시킨다. 시장여행의 재미를 더해주는 것은 물론이다.

18세기 이후 동대문 배우개(이현, 지금의 광장시장)는 시전상인들의 본거지 ‘종루(지금의 종로)’, 남대문 밖 칠패시장과 더불어 ‘도성 삼대시장’의 하나였다. 광장주식회사는 이 자리에 창고와 상점 건물을 지어 근대적 시장을 설치했다. 이후 동대문시장으로 불린 이 시장은 현재까지도 남대문시장과 함께 서울 재래시장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고불고불한 골목 사이로 이불가게며 등산복매장은 물론 그 유명한 광장시장 녹두빈대떡과 순대국, 그리고 마약김밥과  생선구이, 곱창, 닭한마리까지 먹을것도 넘쳐난다. 또 동대문시장 주변으로 자리한 대형 쇼핑타운은 밤새도록 불을 밝히며 양갓집 규수들의 노리개를 팔던 역사를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동대문 역시 남대문과 쌍벽을 이루는 등산 장비점의 메카다. 다만 동대문시장에 좀더 몰려있고 단독 브랜드 매장과 멀티 매장도 규모가 더 큰 편이다. 전문적인 꾼들이 많이 찾는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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