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않아도 좋아…포르투갈 리스본
기대하지 않아도 좋아…포르투갈 리스본
  • 글·사진 이두용 기자
  • 승인 2017.03.25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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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머물며 현대를 사는 도시, 걸음마다 아름다운 그곳으로

로마에서 몇 개월 머물고 난 뒤 난 다른 곳으로 떠날 채비를 했는데 한곳에 오래 있다 보니 움직이는 것에 더 심사숙고하게 됐다. 명소를 검색했고, 사진 찍기 좋은 곳을 골랐고, 내게 의미있을 만한 곳을 찾아봤다. 하지만 우연히 방송에서 본 ‘포르투갈’에 꽂혔고 여정은 정해졌다. 그리고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처럼 우연에 의해 추억이 쓰였다.

마을을 벗어나면 흙길이 이어지고 사방이 적막에 사로잡혔다.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
밋밋한 일상에 뛰어드는 우연은 때로 좋은 이벤트가 되고,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거창하지 않지만, TV에서 본, 정확히는 TV를 틀어놓고 저녁 식사를 위해 토마토를 씻다가 주방에서 힐끗 본 포르투갈의 모습은 내게 꽤 신선한 충격(?)을 줬다.

한국에서 상상했던 유럽은 이랬다. 고풍스러운 건물이 즐비하고 골목마다 예스러운 느낌이 많이 남아있으며 때로 투구를 쓴 로마 병정이라도 지나갈 것 같은. 하지만 이탈리아와 프랑스, 스페인 등을 다니면서 느꼈던 유럽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던 사진 속 명소의 상징을 빼면 오래된 건물에서 요즘 사람들이 사는 그런 이미지였다.

더욱이 로마에서 오래 머물면서 느껴지는 유럽은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였다가 ‘생각보다 볼 것 없는 곳인데’라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당시에 스스로 오만방자한 바람에 로마를 더 오롯하게 누리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늘 좋은 기회는 놓치고 나서야 안다.

내리쬐는 햇살이 도시의 건물, 트램, 거리의 사람들과 부딪혀 묘한 색을 만들어낸다.

암튼 포르투갈은 달라 보였다. (사실 잘 편집한 영상미도 한몫했다) 우연이 무서운 건 확신이 생기면 보통 때보다 진행이 빠르다는 것이다. 우연은 순식간에 내 여정의 운명이 되었고 난 무엇에 홀린 듯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

사실 예전에 읽었던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떠오른 것도 빼놓을 수는 없다. 인생이 밋밋하기 그지없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우연한 계기로 포르투갈 리스본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예기치 않았던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단순한 재미보다는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다. 리스본을 떠올리면서 혹시 내게도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연히 운명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은근 오버랩 시켜봤다.

낡은 건물 한 채에서도 다양한 컬러가 느껴지는 리스본은 사진가에게 더 특별한 곳이다.
길을 잃고 마주친 막다른 골목에도 아름다운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이야기 흐름은 극 중 등장하는 아마데우 프라두가 쓴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통해 흘러간다. 이 책에서 누누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인생에 등장하는 우연’에 관한 것이다.

그는 책에서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라거나 ‘인생이란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잊고 있던 그 문장들은 로마에 머물던 내게 우연을 가장해 다음 여정을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구절이 돼 주었다.

과거에 머물며 현대를 사는 도시
없었다, 아무것도. 좋았다, 기대할 게 없으니. 리스본을 크게 한 바퀴 돌았는데 한 나라 수도에 변변한 극장 하나 없다는 것에 놀랐고, 높다란 건물이 즐비한 번쩍거리는 거리가 없다는 것이 즐거웠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고 바라던 유럽 나라에 이제야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매일 아침 모든 일정을 리스본 중심의 로시오 광장에서 시작했다.
메인 스트리트로 향하는 초입에서. 포르투갈의 컬러를 이 사진으로 설명해도 좋겠다.

로마의 콜로세움이나 파리의 에펠탑처럼 도시를 말하면 바로 떠오르는 상징은 없었지만, 거리에 묘하게 흐르는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온 듯한 강하지만 따듯한 컬러가 있었다. 말 그대로 레트로(Retro)였다.

어느 순간 툭 튀어나온 ‘레트로’라는 말이 있다. 회상, 회고, 추억이라는 뜻의 ‘Retrospect’를 줄인 말인데 복고주의를 지향하는 유행, 패션 스타일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마치 리스본은 올드한 느낌이 아니라 레트로라는 단어를 가지고 도시를 리모델링한 느낌이었다.

채도를 살짝 줄인 것 같은 말끔한 건물들, 반대로 시시각각 컬러를 바꾸며 화려하게 변하는 하늘과 사진 보정이라도 한 것 같은 거리 분위기. 여행했던 나라들과는 느낌이 달라서 똑같이 찍었다간 나중에 정리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도심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고 트램을 타고 다녔다. 사실 포르투갈 리스본을 검색해보면 트램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많다. 유럽 어디를 가도 트램은 있다. 하지만 이곳은 대부분 교통수단이 오래전부터 이용해온 트램이다. 덕분에 어딘가로 이동해야 할 때면 역사를 품고 운행 중인 낡은 트램과 디지털이 적용된 현대식 트램을 골고루 타볼 수 있었다.

트램으로 유명한 리스본에선 낡은 트램과 현대식 트램을 모두 타볼 수 있었다.

이곳의 대표적인 트램 노선은 12, 15, 18, 25, 28번 등이 있는데 이 중 28번을 타면 리스본의 주요 관광지를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에야 리스본을 다녀간 사람들의 기록이 온라인에 많아서 정보도 얻기 쉽고 일정이나 동선을 정하기도 좋지만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땐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나 식당은 고사하고 거리에서 동양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었다.

무지에서 비롯된 불편은 조금 있었지만, 오히려 사진을 찍는 내겐 마치 걸음마다 횡재하는 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단 이도 저도 모를 땐 중심가로 향하는 게 제일. 아침마다 외곽의 숙소에서 트램을 두 번 갈아타고 리스본 중심에 있는 로시오 광장(Praca do Rossio)으로 향했다. 매일 그곳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허름한 골목의 풍경도 찍어놓으면 신기하게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가난이 깃든 곳에도 빛은 고르게 내린다. 억지로 꾸미지 않아 더 아름다운 이곳.

걸음마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광장이 보이는 카페에서 간단하게 샌드위치와 커피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햇살이 내리쬐며 도시의 건물, 트램, 거리의 사람들과 부딪혀 묘한 색을 만들어냈다. ‘이거다!’ 식사하다가 뛰어나가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로마에서 TV로 봤던, 식사준비를 하던 무방비상태의 날 매료시켰던 그 도시풍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좋은 기분은 며칠간 꾸준히 이어졌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골목에서 만나는 집과 창틀·낡은 처마가 새로웠고, 거리로 나오면 반짝거리는 빛과 만난 집들이, 대충 심은 나무가, 코팅이 떨어져 나간 자동차가, 그 위에 올라앉은 고양이가 예뻤다. 사진 찍기에 더없이 좋았다.

붉은 지붕과 하얀 벽, 푸른 바다와 그 바다를 닮은 하늘이 그림보다 더 그림 같다.

기대하지 않고 내딛는 걸음이 기대 이상의 미소로 돌아왔다. 오후엔 바닷가로 나왔다. 해외에 가서 해변을 만나는 게 처음도 아닌데 판타지 게임에서 본 듯한 절묘한 풍광이 연속으로 이어진다.

어둠이 내리는 것 같아 벨렝지구로 향했다. 이곳은 과거 포르투갈 전성기인 대항해시대를 기념하는 곳이다. 당시 전 세계로 떠나던 탐험가들의 안전한 여정을 위해 기도했다는 ‘제로니무스 수도원(See Jeronimos Monastery)’과 포르투갈의 역사를 이끈 용감한 선원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범선 모양의 ‘발견기념비(Padrao dos Descobrimentos)’가 세워져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엔 작은 성 모양의 벨렝 탑이 서 있다. 1500년대 초 만들어졌다는 데 최근에 만든 것처럼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포르투갈의 역사를 이끈 용감한 선원들, 그들을 위해 만든 범선 모양의 발견기념비.

안개비가 몇 번 지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거치면서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해와 구름이 만나 몽환적인 풍광을 만들어 낸다. 벨렝 탑 인근에 모인 사람들은 환호하며 바닷가로 모여들었다. 아름다운 장면을 바라보며 노부부는 어깨동무를 했고, 한 커플은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끌어안으며 진하게 포옹을 한다. 사진을 찍던 나도 카메라를 내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아름다운 장면은 가끔 눈으로 담아두어야 더 오래 추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과장해서 내가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고 리스본에서 마주했던 것들이 모두 거짓이었다고 해도 난 감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리스본에서 머물며 만났던 모든 것이 좋았고, 모든 것이 새로웠으며, 모든 것이 추억이 되었다.

우연히도 좋은 고맙게도 담아낸
발견기념비를 지나서 멀리 긴 다리가 보이는 곳에 앉아 잠시 쉬었다. 오래 걸어서 다리가 아프기도 했지만 어두워질 때까지 한 곳에서 벨렝지구 인근의 풍광을 찬찬히 만끽하고 싶어서였다. 물 한 병만 챙겨 종일 걸었는데 신기하게 배도 고프지 않았다.

오래돼서, 낡아서, 서민적이라 더 따뜻한 추억이 있는 골목의 모습.

멀리 다리 너머에서 타이타닉을 닮은 커다란 크루즈 한 대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이미 땅거미가 내린 시간이라 눈에 보이는 채도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이 장면은 흑백으로 촬영하면 멋지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카메라 모드를 재빨리 맞춰놓고 다시 크루즈 쪽을 봤는데 뭔가 아쉬웠다. 멋진 풍경 사진엔 사람이 들어있어야 화룡점정이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느낌도 꼭 그랬다.

‘내 앞에 옛날 자동차라도 한 대 딱 서 있다면 좋을 텐데’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거짓말처럼 그런 자동차가 한 대 눈앞에 나타났다. 유럽을 다니면서도 본 적 없는 자동차였다. 그 차는 정확하게 내가 상상한 포인트에 정확히 멈춰 섰다. 그리고 자동차 밖으로 흑백영화의 주인공 같은 긴 코트를 입은 남자가 나오더니 바다를 보며 잠시 서 있었다. 그때 크루즈가 남자와 오버랩되어 지나고 있었다.

노을 아래 짙은 포옹을 나누는 연인.

설레는 순간이었다. 고작 세 장을 찍었는데 셔터를 누르면서 희열을 느끼기도 오랜만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남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크루즈가 눈앞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남자는 다시 자동차에 올라 떠나버렸다. 불과 1분도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촬영했던 흑백 사진으로 난 국내의 한 사진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사진으로 일할 수 있는 계기도 주어졌다. 당시 포르투갈에 대한 추억이 흐려질 대로 흐려진 지금도 어디선가 포르투갈 혹은 리스본 얘기를 들으면 난 묘한 색을 띠던 골목과 집들, 바다와 하늘, 그리고 한 장의 흑백 사진을 떠올린다. 그리고 누군가 유럽 여행을 떠나는 데 목적지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기대하지 않아도 좋거나 뚜렷한 뭔가를 보지 않아도 된다면 당당히 포르투갈을 추천한다. 물론 난 리스본 말고도 여러 마을을 다녔다. 하지만 리스본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 가봐야 알 수 있으니 말로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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