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라니, 좋잖아요… 풍도 백패킹
섬이라니, 좋잖아요… 풍도 백패킹
  • 이지혜 기자Ⅰ사진 양계탁 기자
  • 승인 2017.03.18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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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번 뜨는 여객선 타고 1시간 30분, 환상적인 북배에서의 하룻밤

일정의 이유로 급박하게 정해진 날짜보다 하루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마감이 코앞이었다. 지금 당장 출장을 다녀와도 불안한 마당에, 하루가 늦어지니 초조함이 앞섰다. 하지만 원래 떠나기로 했던 날은 갑작스런 풍랑주의보로 배가 뜨지 않았다. 날짜를 미루지 않았다면 난처한 일이 벌어졌을 거다. 시간이란 얼마나 내 편인가. 하루의 기다림은 야생화를 움트게 했고, 올해 최고 온도를 찍을 법한 따뜻한 날씨와 미세먼지 하나 없는 바람. 모든 것이 완벽했다.

올해 최고 온도를 찍을 법한 따뜻한 날씨였다.

풍도 어때요?
급작스럽게 정한 출장이다. 막막한 일정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섬 캠핑 전문가 아볼타님께 무작정 연락했다. 섬 가시려면 저 좀 끼워주세요. SNS 좋아요로 다져진 우리의 우정은 퍼거슨 감독도 감동할 거다. 머지않아 답신이 왔다. 풍도 어때요?

그렇게 떠났다. 하루 늦춘 일정이 우연히 풍랑주의보를 피해갔고, 덕분에 우린 꽉 찬 서해누리호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풍도로 가려면 인천이나 대부도에서 하루에 한 번 뜨는 배를 타야 한다. 인천에서 출발한 배는 대부도를 경유해 남은 승객을 태우고 풍도와 육도로 향한다. 풍도까지 인천에선 2시간 30분, 대부도에선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차량을 선박에 태우려면 대부도에서만 가능하고 선착순이다. 단, 모든 차량은 현지 주민 우선이다.

배는 하루에 한 번, 육지에서 풍도를 오간다.

우린 대부도에서 배를 탔다. 단출하고 군더더기 없는 배지만 있을 건 다 있다. 삶은 달걀이며 갈매기 밥이며 뜨끈한 컵라면까지. 1층 좌식 칸엔 주로 현지인이, 2층 입식 칸엔 주로 외지인이 타는 듯하지만, 딱히 정해져 있진 않다. 좌식 칸에 몸을 누이고 둥실둥실 파도의 기척에 몸을 맡겨봤다. 뜨끈한 방바닥에 등을 지지고 있자니 잠이 솔솔 쏟아진다. 24시간은 못 느낄 온기 일거야. 배터리를 충전하듯, 몸에 온기를 채워나갔다.

문득 잠이 든 걸까. 도착지에 가까워졌는지, 한창 수다 꽃을 피우던 아주머니들이 갑자기 분주하다. 깊은 대야를 꽉 채운 성인 남자 주먹만 한 새조개를 까기 시작한다. 단단하게 입을 다문 새조개 하나를 까는 데 5초나 걸릴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서커스를 보는 아이처럼 화려한 손놀림에 시선을 뺏겼다. 조개 까는 거 보니 섬 여인이구먼, 멀리서 한 아저씨가 농을 던졌고, 아주머니들은 섬사람 특유의 단단한 미소를 던진다.

낮은 담벼락은 알록달록 예쁜 그림으로 채워졌다.

붉은 바위와 백패킹
항구에 정박했다. 현지인은 일상으로 집을 찾아가고, 반가운 이웃을 맞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린다. 꽃보다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고 세상 해맑게 웃고 계신 어른들은 민박을 잡고 야생화를 보러 온 관광객이다. 한편, 엄청난 크기의 배낭을 메고 묵묵히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를 포함한 백패커다.

풍도 백패킹은 대부분 북배에서 이뤄진다. 북배는 몇 차례 미디어에도 소개됐을 만큼 수려한 경치를 자랑해 백패커에겐 최고의 숙영지다. 북배로 가기 위해선 항구 오른편 길로 1시간 정도 걸어야 한다. 트레킹 길 입구에 유일한 슈퍼가 있으니, 이곳에서 부족한 식량을 사면된다. 길가의 낮은 벽엔 귀여운 그림과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심겨 있다. 고양이를 피해 높이 매단 서대와 물메기가 신기하다. 오른편의 바다와 왼편의 섬은 걸음마다 풍경을 갈아입는다.

북배로 가려면 1시간 정도 걸어야 한다.

풍도엔 진달래석이라는 불긋불긋한 돌이 유명하다. 때문일까. 흙길을 따라 걷다 보니 몸통을 반쯤 내 준 채 파헤쳐진 채석장이 보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돌을 캐 배로 실어 날랐다. 자금 운용이 중단되며 지금은 폐허로 변했다. 영화 <스타워즈: 로그 원>의 도입부, 겔런 어소 박사가 가족과 함께 숨어 살던 집이 떠오르는 경치다. 누군가는 불미스런 일로 멈춰버린 벌거숭이 폐허를 흉물이라 하겠지만, 나에게만큼은 멋진 풍경이었다.

깔딱고개랄 것도 없는 짧은 오르막을 마지막으로 시원한 북배가 펼쳐진다. ‘붉은 바위’를 뜻하는 ‘붉바위’에서 유래된 지명인 만큼, 붉은 바위와 푸른 바다 빛이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는 절경을 연출한다. 어제 하루 결항한 탓일까. 생각보다 많은 백패커가 모여들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눈인사와 묵례를 나누고, 콧노래를 깔며 텐트를 펼친다. 자연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한바탕 감탄 뒤엔 으레 노동의 시간이 온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사람도 만나야 한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아무것도 하기 싫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법한 절경이다.

그래서 우린 잠시나마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못다 한 안부 인사를 접어두고, 끊임없는 수다도 접어두고, 정치 이야기까지 접어두고서. 각자의 의자에, 텐트에, 바닥에, 북배 어딘가에 앉고 누워 시간을 가졌다. 잠을 자도 되고, 낚시를 해도 된다. 책을 읽어도 되고, 음악을 들어도 된다. 그래도 괜찮다고 바다가 말해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바다가 말해준다.

해가 수평선으로 다가가자 사람들도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북배를 찾는다. 백패킹 뿐만 아니라 일몰 명당이기도 한가 보다. 풍도의 절경을 소개하고픈 방송국 사람들부터 야생화 관광을 마친 아주머니 일행까지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는다. 굼벵이 같은 우리에게도 성실히 시간은 지난다. 해와 달은 바지런히 자리를 바꾼다. 썰물과 밀물은 시선을 던질 때마다 다른 높이로 노닌다.

느림보처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시간은 부지런히 지난다.

등대가 본격적으로 일 할 시간이다. 북벽 왼편으로 뻗은 등대는 밀물과 썰물에 따라 그 길을 숨기고 내준다. 밝은 불을 내뿜는 등대. 후망산 북쪽 기슭의 풍도 등대는 인천과 평택, 당진항을 오가는 선박, 인근 해역을 지나는 여객선, 어선의 안전 항해를 위해 1985년 8월 점등했다.

차(車)를 포기하다
저녁을 마쳤더니 어느새 바람마저 조용하다. 밀물과 함께 물러난 바람은 썰물과 별을 가져왔다. 우리에게도 손님이 왔다. 서울에서 끈 공예를 한다는 김규상 씨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이 깊은 이야기를 쉽게 한다고 했던가. 우린 꽤 많은 이야기를 했다. 끈 공예에 관한 철학적인 이야기(끈은 사람이 가장 원시적으로 –이를테면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예술작품)부터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여행 이야기까지. 짧은 시간이지만 그는 우리에게 마음 한 평을 내줬다.

멋진 정경을 촬영하는아볼타님.

자영업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은 일단 부러워한다. 시간도 많고 자유로워 보인다는 이유일 것이다. 그 사람이 시간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는 생각지 않은 채 말이다. 규상씨의 고민도 같았다.

“장기 두실 줄 아세요? 장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 중 하나는 차(車)죠. 사람들은 대단한 능력을 갖춘 차로 장기를 이기려 해요. 차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지켜야 할 것이 왕을 포함한 3개의 말로 늘어나요. 하지만 정작 지켜야 할 것은 왕인데 말이에요. 차를 포기하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아요. 저는 일종의 차를 포기한 거죠. 저에겐 차가 돈이겠지요.”

해가 뉘엿뉘엿한 북배의 야경.

“차가 돈이다. 아볼타님도 차가 돈인가요?”
“아무래도 그렇죠. 백패킹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정말 힘들게 내가 사랑하는 것을 찾은 기분이었어요. 인생의 목표는 어릴 적부터 두 가지. 좋은 반려자를 만나는 것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어요. 좋은 반려자는 다행히 만났지만, 좋아하는 것을 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죠.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지금 행복해요. 저 역시 뭔가 포기하고 있다면 그건 돈이죠. 저 역시 차는 돈이네요.”

누구에게나 차(車)는 있다. 세상을 사는 데 많은 효용가치를 가진 중요한 무언가는 어쩔 수 없이 돈이란 걸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차가 돈이 아닌 시간, 건강, 가족일 수 있다. 포기하면 채워지는 건 세상의 이치다. 성실히 몸을 비우고 채우는 달처럼. 북벽 하늘엔 보름달을 목전에 둔 커다란 달이 떠올랐다.

꽃 앞에 겸손해지는 계절
서해 바다까지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전날보다 더 따뜻한 아침에 열렸다. 풍도를 떠나기에 앞서, 이곳에서 유명한 야생화를 보기로 했다. 마을 안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이괄의 난을 피해 풍도로 피난 온 인조가 심었다는 500년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은행나무 뒷길로 접어들면, 본격적인 야생화 군락지가 눈에 펼쳐진다.

풍도의 후망산, 야생화 군락지로 유명하다.

야생화를 품은 낮은 산은 후망산(177m)이다. 풍도대극, 풍도바람꽃이 일품이다. 개체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특유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 때문이다. 풍도바람꽃은 2009년 변산바람꽃의 신종으로 학계에 알려졌고 2011년 풍도바람꽃으로 정식 명명됐다. 복수초 역시 금박을 두른 듯한 화려한 노란빛을 띠고 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짧게 피었다 지는 야생화를 보려는 많은 사람이 발길을 두는 곳이다. 가시덤불 같은 산길을 지나 군락지를 마주하니,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야생화로 입을 모으는지 이유를 알겠다. 너른 군락지에선 절로 탄성이 나오고, 너나 할 것 없이 카메라를 꺼내 든다. 인근에선 전셋배를 타고 사진 동호회가 출사를 나왔다.

“이 시기가 웃기죠. 꽃 앞에 사람이 겸손해 지는 시기라고나 할까요.”

누군가 쓱 꺼낸 말에, 아니나 다를까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사람이 꽃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진에 담고 있다. 솔직하고 위대한 자연의 순리, 성실히도 채우는 시간의 공백. 망각과 기억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바른 계절에 자신의 꽃을 틔우는 것. 그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사실 마지막일지 모르는
슬픈 소식이 있었다. 어제 오후, 풍도에 막 도착한 우리가 가벼운 식사를 위해 방문한 민박집에서 들은 소식이었다. 3월 20일부터 북배 백패킹이 금지된다는 것. 5천 원이라는 입도비 때문에 백패커들과 섬 주민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고, 쓰레기를 무단투기하고 용변을 잘 처리하지 않는 등 환경 문제가 불거졌다. 결국, 논의 끝에 북배 백패킹을 섬 차원에서 금지하기로 했다고.

꽤 많은 백패커가 북배를 찾았다.

민박집 사장님이 퉁명스럽게 전한 그 소식에, 같은 백패커로 부끄럽고 미안함이 앞섰다. 돈을 내기 싫었다면 흔적을 남기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비용을 지급했어야 했다. 모든 백패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부로 인해 좋은 장소를 더 이상 올 수 없다는 아쉬움과 원망이 앞섰다. 바야흐로 백패킹 포화상태. 성숙한 문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운 좋게 북배 명당에 텐트를 쳤다.

비록 북배에선 야영이 안 되지만, 풍도엔 충분히 백패킹 할만 한 곳이 많다. 마음만 먹는다면 다양한 자연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북배의 아름다움을 텐트 안에서 담는 건 당분간 힘들겠다. 그래서였을까. 더 아름다워 보였던 건. 아마 아닐 거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자연은 그저 시간과 협의한 후 아름다운 풍경을 내준 것이다. 은행나무 뒤켠 어딘가에서 흐드러지던 성실한 야생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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