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감악산 트레킹, 하늘을 걷다
파주 감악산 트레킹, 하늘을 걷다
  • 글 이슬기 기자 Ι 사진 양계탁 기자
  • 승인 2017.02.27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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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R OUTBOUND 독특한 폭포와 계곡, 깎아지른 암벽 펼쳐져
2월의 감악산은 아직 황량함이 남아있지만, 공기 속에는 봄의 따스함이 녹아있다.

지상 411.5m, 110층 높이의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쌍둥이 빌딩을 연결하는 외줄 위에 선 남자. 영화 ‘맨 온 와이어’의 실제 주인공 필리페 프티는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이 기다란 막대 하나에 의지해 그 위를 횡단하는 데 성공한다. 목숨을 걸고 이처럼 아찔한 도전을 한 이유를 묻자 돌아온 그의 대답. “이유는 없습니다.” 위험천만할지 몰라도 높은 구름 위를 맨몸으로 걷고 싶은 것은 아마도 하늘을 동경하는 인간의 본능일터다.

감악산(紺岳山)은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고 붙은 이름이다.

콧노래 나는 ‘악’산으로
까마득한 중천에 줄을 매달고 걷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고, 물론 함부로 시도해서도 안 되지만, 맛보기로나마 하늘을 거닐고 싶다면 파주로 향하는 게 상책이다. 국내에서 가장 긴 산악 다리가 있는 감악산(675m)이 거기 자리한 까닭이다. 45m 높이의 감악산 출렁다리에 섰을 때의 기분을, 먼저 다녀온 지인은 ‘구름 위에 떠 있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더는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최근 조성된 21㎞의 감악산 둘레길은 파주와 연천, 양주를 연결한다. 둘레길 들머리는 잘 닦인 데크길에서 시작한다.

감악산은 본디 가평 화악산과 포천 운악산, 개성 송악산, 과천 관악산과 함께 경기 오악에 속하는 곳이지만, 출렁다리가 개통되기 전에는 그리 많은 등산객이 찾는 곳은 아니었다. 독특한 모양의 폭포와 계곡,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두루 갖추고, 맑은 날 남쪽으로는 북한산, 북쪽으로는 임진강과 멀리 개성의 송악까지 내다볼 수 있는 감악산의 매력이 이제야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셈이다.

감악산 출렁다리는 범륜사 입구 서쪽 방면부터 사찰이 있는 운계폭포까지 이어진다.

산 이름에 ‘악’자가 들어가면 산행이 힘겨워서 “악”소리가 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감악산은 그 가운데서도 수월한 편이라 누구나 콧노래를 부르며 즐길만한 곳이다. 서울 도심에서 출발해 감악산까지는 자유로를 따라 한 시간 반 남짓. 굽이진 숲속 도로를 올라 들머리인 감악산 힐링파크 출렁다리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직 잔설이 희끗한 주차장은 이른 봄맞이 산행을 나온 차들로 빼곡하다.

15층 건물 높이의 출렁다리는 생각보다 꽤 무섭다. 내려다보이는 설마천 계곡과 운계폭포는 좋지만, 다리를 건널 때는 난간을 꼭 잡았다.

눈앞이 아찔, 고소공포증 주의
100대 명산인 감악산을 음미하는 등산로는 총 9개다. 보통은 범륜사 입구에서 출발해 만남의 숲~약수터를 거쳐 정상에 오르거나, 임꺽정봉을 경유해 범륜사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를 택한다. 지난해 9월 출렁다리가 문을 연 후에는 출렁다리 주차장이 가장 인기 있는 등산 기점이 됐다. 산에 오를만한 여유가 없다면 출렁다리를 비롯해 범륜사 계곡, 운계전망대 등 감악산 대표 명물을 쉬엄쉬엄 감상할 수 있는 둘레길 일주도 추천한다.

산행은 새로 조성돼 깔끔하게 닦인 계단식 데크길에서 시작한다. 은근히 비탈진 길을 따라 15~20분 정도 몸을 데우다 보면 금세 출렁다리의 서쪽 출입구에 닿는다. 진입로 오른편에 솟은 기념비석에는 ‘글로스터 영웅의 다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6.25 전란 때 이 지역을 사수한 영국군 글로스터 부대원들을 기리고자 붙인, 감악산 출렁다리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즈넉한 산사에서 즐기는 약수 한 잔의 여유.

실제로 마주한 150m의 출렁다리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길고, 더 높다. 반대편을 향해 한 발짝씩 내딛는데, 세상이 양옆으로 흔들려 난간을 꼭 잡았다. “여기 900명이 한꺼번에 지나가도 안전하대.” 친구 승목이의 말에도 여전히 엉거주춤.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출렁다리의 묘미를 느끼기까지 잠시간 마인드 콘트롤이 필요하다. 설마천 계곡을 내다보며 두근거림을 달래고 나자 비로소 우주 한가운데 두둥실 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찔하면서도 간질간질한 기분이 싫지 않다.

범륜사를 출발해 묵은 밭터~만남의 숲을 지나 정상까지는 단조로운 풍경이 이어진다.

굴레를 벗어야만 닿을 수 있는
하늘에서 내려다본 감악산에는 아직 지난 계절의 황량함이 머물러 있다. 고새 여유가 생겨 눈 쌓인 산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길은 범륜사 방면의 아스팔트 언덕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사찰에 들어가려면 작은 돌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엄지기둥에 적힌 이름이 다름 아닌 해탈교(解脫橋)다. 이 해탈교를 지나며 번뇌의 속박을 잠시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범륜사에 다다를 수 있다.

운계전망대에서 감상하는 감악산 정경. 멀리 출렁다리가 보인다.

소박한 산사는 화려하지 않지만 고요하고 아늑하다. 감악산 중허리에 자리 잡은 범륜사는 의상대사가 세운 옛 운계사가 불타 없어지고 그 터에 다시 세운 절이다.

경내에는 동양 최대의 백옥석 관음상이 우뚝하고, 그 앞으로 늘어선 십이지신상은 관세음보살을 호위하는 모양새다. 절 뒤편으로는 산신각이 있는데, 그 안에서 시원한 석간수가 흘러나온다. 법당에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를 벗 삼아 물 한 모금의 여유를 즐겨본다.

감악산의 필수 코스인 운계전망대는 범륜사 뒤쪽 샛길을 오르면 금방이다. 팔각정에 올라 잠시 숨을 돌리려는데, 범륜사 경사로 아래 공사가 한창이다.

출렁다리에서 전망대까지를 잇는 데크란다. 지금 있는 길이 불편하지 않은데도 굳이 새 데크를 만들어야 하는지, 공연히 아쉽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추위에 얼어붙은 운계폭포다. 여름에는 시원스레 쏟아지는 풍부한 물줄기로, 이맘때면 빙벽 훈련 장소로 사람들을 모으는 명소다.

감악산 곳곳에는 아직 미처 녹지 못한 잔설이 쌓여있었다.

검고 푸른 감악산 오르기
산길은 완만하지만 줄곧 오르막이다. 전망대를 떠나온 지 30여 분. 이쯤 되면 다른 풍경이 펼쳐질 만도 한데 한참 동안 비슷한 장면만 스쳐 지난다. 빼곡한 나무 그늘아래 이어지는 돌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숯가마 터를 만나게 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감악산에는 토막을 짓고 살아가던 이들이 많았다. 이제는 풀만 무성한 가마터 곁에 검게 그을린 돌멩이가 고달픈 생의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잣나무로 둘러싸인 감악산 야영지에서.

만남의 숲 삼거리를 지나 정상에 가까워지자 드디어 하늘이 열린다.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쏟아져나와 이름 붙었다는 감악산이 눈앞에 제 온몸을 드러낸다. 후련하게 탁 트인 조망이라면 임꺽정봉(670m)이 한 수 위다. 정상 부근은 군사시설과 송신탑이 철조망에 둘러싸여 시야를 방해한다. 대지는 다가오는 봄의 서막이라도 알리듯 겨우내 쌓인 눈을 밀어내고 있다.

“어차피 다시 내려올 거, 뭐하러 힘들게 산에 올라가?” 사람들은 이렇게 물어온다. 산을 찾는 사정은 저마다 다를 터다. 정상에서만 음미할 수 있는 청량함이나 성취감 때문에, 혹은 사람들과 나누는 노정의 즐거움이 좋아서. 손으로 쥘 수 있는 보상은 없기에 산 맛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대답이다. 하지만 때로는 대가 없이 저지르는 어떤 행동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그 어떤 이유 없이 하늘을 걸었던 필리페 페티의 도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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