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자바의 잭키 스메루산을 바라보며
인도네시아 자바의 잭키 스메루산을 바라보며
  • 글 사진·안광태 여행작가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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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삼매에 빠진 수행자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 공통된 성지가 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땅, 예루살렘이 그곳이다. 유태인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요, 기독교인에게는 구세주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현장이요, 무슬림에게는 예언자 마호메트가 천국 여행 떠난 신성한 장소다.

힌두교와 불교에도 예루살렘 못지않은 공통된 성지가 있다. 메루(Meru)산, 혹은 스메루(Sumeru)산이 그곳이다. 우리식 한자음으로는 수미산(須彌山)이라 불리는 곳이다. 힌두교 신화에 따르면 메루산은 인간과 우주의 근원이자 중심축이다.

▲ 연기를 내뿜는 브로모 화산 분화구.
 
메루산의 주변에는 힌두교의 주된 신들이 살고 있다. 마야(Maya, 환영(幻影))을 통하여 끊임없이 시·공간적 세계를 창조하는 브라흐만(Brahman), 환영으로 창조된 이 현실 세계를 지탱하는 비슈누(Vishnu), 새로운 창조를 위한 파괴의 신 시바(Shiva), 그리고 우주를 지키는 인드라(Indra)가 그들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네 범부의 눈에는 메루산이 보이지 않는다. 시바와 그의 아내 빠르바티(Parvati)가 오순도순 살고 있는 메루산의 동쪽 카일라스산(Mt. Kailas, 6714m)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세 곳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성산 메루산 대신에 눈에 보이는 카일라스산이 순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카일라스는 티베트의 서부, 히말라야와 나란히 뻗은 강 디세(Gang Dise) 산맥에 실재하는 산이다. 카일라스는 산스크리트어로 힌두교 신자들이 부르는 이름이고, 불교인 티베트 사람들은 이 산을 강 린포체(Gang Rinpoche)라고 부른다. 원래 이름이 강 디세인 이 설산에서 티베트 불교의 걸출한 인물인 미라레(Milarepa)가 쐐기풀을 먹으며 수년간 정진수행 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강은 눈(雪)을, 린포체는 살아있는 부처를 뜻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이나교(Jainism)의 마하비라(Mahavira)와 티베트 토속 신앙 뵌교의 센라브 미우체(Senrab Miwoche) 또한 카일라스로 강림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들 4대 종교의 수많은 순례자들이 티베트의 그 황량함 속에서 반쯤 목숨을 걸고 카일라스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메루산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인도네시아의 중심 섬 자바 동부에는 스메루(Gunung Semeru, 3676m) 화산이 우뚝 솟아 거대한 화산 연기를 내뿜으며 신화처럼 군림하고 있다. 환태평양 화산대에 위치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에는 수만 명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가며 섬을 통째로 날려버린 크라카타우(Krakatau) 화산, 역사 이래 최대의 폭발을 일으켰다는 탐보라 화산 등 200여 개의 활화산이 있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에게 가장 신성시되고 신비로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 브로모(Bromao)·텡거(Tengger)·스메루(Semeru) 화산군이다.

▲ 수행 중인 힌두교 요기처럼 느껴진 흔하디흔한 잡종견 잭키.

이들은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 수라바야(Surabaya)에서 남쪽으로 100㎞ 가량 떨어진 뗑거 산맥에 위치하고 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곳에는 과거 텡거 화산의 폭발로 형성된 직경 10㎞의 어마어마한 분화구 안에 브로모산(Gunung Bromo, 2392m), 바톡산(Gunung Batok, 2440m), 쿠르시산(Gunung Krusi, 2581m) 등이 웅기중기 모여 있고, 이곳에서 남쪽으로 20㎞ 가량 떨어져 스메루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은 서쪽의 말랑시와, 북쪽의 빠수루안, 그리고 북동쪽 쁘로보링고를 각각 들머리로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두 곳은 교통편이 좋지 않아 많이 이용되지 않고, 쁘로보링고를 출발해 가디사리를 거쳐 쩨모로 라왕으로 가는 길이 주로 이용된다. 이곳은 텡거 분화구의 외륜산 꼭대기에 있어 브로모산이 내뿜는 화산 가스가 코끝에 와 닿는 산골 마을이다.

스메루산을 보기 위하여 문밖을 나선 것은 새벽 3시가 채 되지 않아서였다. 전날 스메루산을 찾아 나선 산행길에서 날씨가 좋지 않아 스메루산을 보기는커녕 비만 실컷 맞고 추위에 떨며 고생한 까닭에 등정은 포기하고 대신 전망 좋은 뻬난자깐산(Gunung Penanjakan, 2770m)에 올라 스메루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적도 바로 아래에 위치한 열대우림 기후대였지만 해발고도가 2000m가 넘는 고산지역이라 문밖을 나서자 찬 밤공기가 온몸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때까지 자지 않고 숙박집을 지키고 있던 잭키도 밀려드는 졸음을 주섬주섬 챙겨 들며 또다시 새벽 산행길을 따라나섰다.

“어제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잠도 못 잤을 텐데 괜찮겠어?”

사실 초행길에 그것도 야간 산행길에 동행자가 있다는 것은 시바신의 삼지창 하나 얻은 만큼이나 마음 든든한 일이었지만, 내심 그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이방인의 어쭙잖은 걱정에 잭키는 그까짓 하룻밤쯤이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마디 대꾸도 없이 사각거리는 달빛을 앞장서 밟아 나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거룩한 성산을 감히 올라보겠다는 애당초 생각이 잘못이지, 이 무지몽매한 중생아.’ 소리 없는 잭키의 일갈이 밤하늘에 쩌렁쩌렁 울려댔다. 텡거 분화구의 외륜산을 따라 고랭지 채소밭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밭들 사이로 나있는 좁다란 포장길이 뻬난자깐산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산자락에 도착하자 어슴푸레한 텡거 분화구 안쪽 모래바다 가운데로 갓 태어나 솜털 뽀송한 뾰족탑 근처에서 유황냄새 독하게 풍기며 화산 연기를 내뿜는 브로모산이 얼굴을 내비쳤다. 텡거 족들이 불의 신이 살고 있다고 믿는 브로모산은 스메루산 못지않은 신앙의 성지다.

▲ 텡거 족들은 달이 중천에 떠오르면 브로모 화산의 분화구에 봉물을 바치는 까소도 축제를 벌인다.

인도네시아는 인구의 90%에 달하는 2억여 명이 무슬림인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텡거 분화구 주변에 살고 있는 3000여 명의 텡거족들은 힌두교도들이다. 족자카르타(Yogjakarta) 근교에 있는 세계적인 유적지인 쁘람바난(Prambanan)과 보로부두르(Borobudur)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도에서 가까운 인도네시아는 오랜 옛날부터 힌두교와 불교가 주된 종교였다. 그러다가 13세기경부터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시작했고, 강력했던 힌두 왕국 마자빠히트(Majapahit)가 쇠퇴하면서 이슬람왕국의 시대가 열린다.

16세기 말 자바의 힌두 세력은 동쪽 발리(Bali) 섬으로 피난하게 되고, 그 중 일부인 텡거 족들은 첩첩산중인 텡거 분화구 주변으로 숨어들어 자리를 잡았다. 그들 말대로 ‘구름 속에 사는 사람들’인 텡거 족들은 그렇게 오늘날까지 그들의 신앙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다. 그들은 텡거 달력의 마지막 달 보름날이면 힌두사원에 모여 제를 올리고, 달이 중천에 떠오르면 브로모 화산의 분화구에 봉물을 바치는 까소도 축제(Upacara Kasodo)를 벌인다.

스메루산이 전날 안쓰러워 도와주었는지 뻬난자깐산을 오른 날이 마침 그날이었다. 마을을 떠난 지 한 시간 가량 지나서 뻬난자깐산 중턱에 있는 제2전망대에 도착했다. 산 아래 마을 오두막마다 졸린 불빛들이 깜박거리고 안개구름 가득한 모래바다 위로 물오른 달빛이 실낱같이 깔리어 묘한 신비감을 자아냈다.

세상이 잠들어 있는 새벽, 일출을 보려는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차량들만이 이따금 모래바다를 가로 지르며 홀로 밤을 지새우는 브로모에게 안부를 건넸다. 제2전망대를 지나자 산길은 급격히 가팔라졌다. 더구나 달빛이 있다손 치더라도 어두운 밤인데다가, 산행객의 출입이 잦지 않은 탓인지 길 찾기가 그리 녹녹치 않았다. 하지만 잭키는 민첩하고 노련한 산꾼이었다.

한참 뒤처져 따라가는 동행자의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그는 도움이 필요한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잭키는 동행자의 느린 터벅거림을 결코 탓하지도 보채지도 않았다. 다만 느긋하게 기다려 줄 뿐이었다. 또다시 한 시간 가량을 오르자 정상에 도달했고, 까소도 축젯날의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남쪽 멀리 천지간 중심에 우뚝 솟은 스메루산이 그 고대하던 모습을 드러냈다.

▲ 거대한 화산 연기를 내뿜으며 신화처럼 군림하고 있는 스메루 화산.

화산 활동을 통하여 대지의 새살을 돋아내고, 그 땅에 생명의 싹을 틔우며 우주 만물을 창조하는 스메루산의 장엄한 모습이 떠오르는 태양을 따라 안구에 뜨겁게 파고들면서 세상을 하얗게 만들었다. 사천왕을 거느리고 메루산을 지키는 제석천왕(帝釋天王), 인드라처럼 텡거 족들의 고단한 삶을 보듬어 안고 지켜주는 브로모산 또한 까소도 날의 아침 햇살 속에 더욱 늠름하게만 보였다.

신비로운 일은 하산길에서 벌어졌다. 산동네 유명인사인 잭키가 주변 상인들과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가며 한참을 앞서 내려가다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먼저 내려가 버렸나 생각하고 밝은 세상의 풍성한 눈요깃거리에 빠져 황소걸음 치다가 산 중턱에서 잭키를 다시 만났다. 그는 올라올 적 어두워 깨닫지 못했던 숨겨진 그만의 전망대에서 자리를 틀고 앉아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스메루산과 브로모산이 영겁(永劫)은 참았을 법한 쌓이고 쌓인 카르마(業)를 매섭게 토해내고 있었지만, 그는 결과부좌한 수도승이 되어 움직임이 없었다. 참을 수 없는 긴 침묵만이 그에게서 빠져나와 보랏빛 안개구름을 타고 산 아래 사바세계로 내려가 꿈결처럼 하느작거렸다. 잭키는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버리고 있었다. 아니, 거기에는 잭키도, 스메루산도, 세상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없다는 것조차도 없었다.

잭키(Jackey)는 쩨모로 라왕의 숙박집에서 일하는 친구가 기르는 개였다. 그럴싸한 종류의 유명한 개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잡종견이었다. 숙박집 주인은 말했다. 잭키는 그저 단순한 개가 아니라, 밤낮으로 손님들을 지켜주며 안내해 주는 훌륭한 종업원이라고. 명상 삼매에 빠진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문뜩, 어쩌면 잭키는 수행 중인 힌두교 요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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