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여행자의 짐바브웨 자전거 여행
지구별 여행자의 짐바브웨 자전거 여행
  • 글 사진 정효진 기자
  • 승인 2017.02.13 14:1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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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산으로 가고 나도 산으로 간다

겁을 잔뜩 먹고 짐바브웨로 입성했다. 이민국에는 짐바브웨서 보츠와나로 가는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다. 일거리가 없어서 다들 넘어오는 것 같다. 반대로 보츠와나에서 짐바브웨로 들어가는 내 줄은 짧았다. 짐바브웨는 비자가 필요한 나라다. 필요한 준비물은 30달러가 전부다. 여권 사진을 비롯한 각종 서류는 전혀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래 걸리는 건 아프리카만의 특징인가보다.

친절하고 온순한 나라
한 시간을 기다려 겨우 짐바브웨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많은 버스 정류장을 지나친 후 조용한 길로 접어들었다. 멀리서 도로를 정비하고 있는 현지인들이 보였다. 실업률이 90%인 이곳. 일하는 사람만 봐도 신기했다. 저 사람들은 10%의 행운을 가진 사람들일까?

실업률이 90%이지만,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은 계속 보인다

종일 쉬지 않고 자전거만 탔다. 전날에 이어 엉덩이가 너무 아팠다. 마땅히 텐트 칠 곳을 찾지 못할 때 교통경찰에게 경찰 캠프라는 곳을 소개받았다. 여러 주택이 모인 곳이었다. 내가 들어가게 된 집엔 방이 총 세 개였는데 세 명의 여경들이 자녀와 머무르고 있었다.

여경 프리실라와 그녀의 아들 방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여경이 방에서 같이 자자기에, 침대에서 함께 자자는 줄 알고 폐를 끼치는 거 같아 텐트 치겠다고 하니 표정이 굳었다. 결국, 그녀의 방 안에서 자기로 했다. TV에선 나이지리아에서 악령을 쫓아내는 장면을 방영 중이었다. 얼마 전, 바오밥 나무 앞에 살던 여자가 나이지리아에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갔었다고 했는데, 꽤 유명한가 보다.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참 많다. 우려와는 달리 여경과 한 침대에서 자진 않았다. 식사 후 식탁을 치우더니 그 아래 두꺼운 이불을 깔아 줘서 편히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날이 밝았다. 주변엔 전통 가옥이 많았다. 짐바브웨 실업률이 전 세계 1위라고 했기에, 정말 많이 긴장했다. 하지만 뜻밖에 사람들은 참 순박하고 온순했다. 다들 가볍게 손 인사를 해 준다.

정치는 결국 삶이다
짐바브웨는 1965년에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났다. 복잡한 독립 과정에서 로버트 무가베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시장경제체제를 유지하며 백인을 경제성장에 동참시켰고, 높은 경제성장과 식량 수출국으로써 아프리카의 낙원이라고 칭해지는 단계까지 발전시켰다.

그러나 달콤한 권력의 맛을 본 무가베는 장기집권에 집착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부정부패의 문제가 서서히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90년대에 들어서 일당독재를 구축하고 언론매체와 정보기관을 통해 반대파를 억압하기에 이르렀다.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어서 히치하이킹 하는 여성.

무가베 대통령은 국민 지지를 얻기 위해 선심정책으로 백인들을 적으로 돌리고 흑인들에게 여러 최첨단 장비와 원료 등도 무상으로 공급했다. 기업에 가격을 반으로 줄이라 강요한 결과 기업들은 해외로 철수했고 당연히 외국의 투자 역시 급감했다. 그러나 영농기술이 없는 흑인들은 영농에 실패했고 이는 국가 경제 파탄으로 이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제적인 위기뿐만 아니라 콜레라라는 전염병으로 인해 국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만 갔다.

학교를 가기 위해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아이들.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짐바브웨서 안전하게 자전거를 타는 이유는 그들의 국민성이 다른 나라에 비해 순진하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많은 아프리카계 사람이(특히 남자들이) 너무 예의 없이 행동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 하지만 짐바브웨 사람들은 적당한 선을 지킬 줄 아는 거 같아 편안하다. 어쩌면 그들의 순진함 때문에 이렇게 장기간 독재가 이어진 걸까? 독재자가 90살이 넘었는데도 권력을 놓지 않는 걸 보면, 사람의 욕심은 무덤까지도 따라가나 보다.

머리에 뭐든 이고 다니는 현지인.

단기적으로 봤을 때 독재가 나라를 성장시킨 것처럼 보이겠지만, 결국엔 그 독재가 나라를 파괴했다. 이게 바로 독재의 한계다. 대한민국의 첫 단추는 잘 못 꿰여도 너무 잘 못 꿰였다. 독재로 시작해서 독재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장기간 진행된 그들의 세뇌 정책으로 생각 없는 투표와 생각 없이 투표하지 않는 이들 때문에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꼴이 되었다. 후진국에 속하는 페루, 필리핀에서도 독재자 가족이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당선되지 않았다.

정치는 결국은 삶이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 자살률 1위에 가깝다. 결국은 잘못 준 한 표가, 관심 없어 하며 버린 그 한 표가 대한민국을 자살률 1위로 몰았다. 왜 자살률이 1위인지 이유를 따지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면 결국은 그곳에 정치가 있다.

예상외로 비싸지 않은 물가
짐바브웨 수도는 하라레다. 다음으로 큰 도시 불라와요에 도착했다. 도착 후 철물점을 찾아 나사 몸통이 자전거에 박힌 걸 빼냈다. 일하는 직원이 불로 자전거를 지지기에, 놀래서 뭐하는 거냐고 그냥 못과 망치로 빼달라고 했더니, 그러면 그 부분이 아예 망가진다면서 불로 지져서 녹인 다음에 다른 철에 접촉해서 식힌 다음 돌리면 된다고 한다. 아, 저렇게 하면 되는 거였구나! 결국, 부러진 나사 몸통을 빼내고 짐받이를 자전거에 고정했다.

아프리카 여행 4개월만에 처음으로 돈을 주고 숙소를 찾았다.

불라와요에 도착해서 <론니플래닛> 책에 나와 있는 숙소 중에 캠핑이 4달러라고 적혀있는 곳으로 갔다. 근데 막상 도착해 보니 10달러라고 한다. 내가 본 책은 도대체 몇 년도에 나온 걸까? 캠핑장소도 숙소 옆 담벼락이었다. 결국, 2달러 깎아서 8달러에 하룻밤 묵기로 했다. 아프리카 온 지 4달 만에 처음으로 숙박비를 위해 돈을 썼다.

어디선가 웃음 소리가 들려 쳐다 보니 아이들이 나를 보며 재미있는 포즈를 취한다.

목표 도시 빅토리아 폭포까지는 조그마한 마을밖에 없다기에 15L 물을 사 왔다. 짐바브웨서 물가가 엄청나게 상승했던 당시 빵 하나 사 먹으려고 수레에 돈을 가득 실기까지 했었다. 현재 짐바브웨는 미국 달러를 쓰고 있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예상외로 물가가 그리 비싸지 않았다. 감자 칩은 1달러, 치킨 3조각엔 3달러, 큰 소시지는 1달러 정도 했다.

매일 밤 경찰서에서 잠을 청하다
아프리카는 교통이 정말 불편하다. 버스도 적다. 때문에 히치하이킹이 일반화되어 있다. 물론 젊은이들이 여행 수단으로 즐기는 ‘히치하이킹’과는 전혀 다르다. 버스 대신 이용하는 거라 운전자에게 돈도 줘야 한다. 이전 나라 보츠와나에서 봉사활동 다닐 때 버스가 너무 오질 않아서 나도 이런 식으로 이동한 적이 몇 번 있다.

경찰 캠프에서 하룻밤 머물었다.

오후 늦게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한번 경찰서에 갔다. 이번엔 경찰서 건물 안에 텐트를 치고 잤다. 밤새 경찰 직원들이 어찌나 큰 목소리로 쩌렁쩌렁 대화하던지 귀막이를 귀에 꽂고 자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시골길을 빠져나와 다시 도로로 향하는데 아침 일찍부터 많은 사람이 길을 걷고 있었다. 중남미도 그렇고, 아프리카도 그렇고 아침이 한국에 비해 참 이르다. 아무래도 태양이 이른 시간에 떠서 그런 거 같다. 가을에 접어드는 날씨라 밤에는 매우 쌀쌀했지만, 낮에는 햇볕이 너무 뜨거웠다.

짧은 휴식 끝에 다시 자전거를 탔다. 빅토리아 폭포로 가는 고속도로 길은 굉장히 좁았다. 그런데 그 좁은 길에 큰 배 한 척이 트럭에 실려 이동 중이었다. 앞에 보이는 직원이 나에게 오더니 어디 가냐고 물었다. 빅토리아 폭포에 간다고 하자 얼마나 걸릴 거냐고 물었다. 한 3일 걸릴 거 같다고 하니 자기 배도 3일 뒤에 도착할 거라며 거기서 보자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실제로 트럭 이동 속도는 아주 느린 편이었다. 게다가 길이 좁아서 주변에 나뭇가지가 걸리면 그 나뭇가지를 다 쳐내야 했다. 어제도 배를 싣고 가는 트럭을 봤는데, 오늘 또 봐서 반가웠다.

나의 새로운 여행 파트너가 생겼다. 바로 큰 배다.

이날 밤에 도착한 곳은 과이강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사실 시골 마을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작은 곳이었다. 오늘도 결국은 경찰서에서 하루 신세를 졌다. 조그마한 시골이라 그런지 경찰서 건물이 매우 작았다. 빈방이 있어서 거기다 텐트를 쳤는데 화장실도 없고 물 나오는 곳도 없었다. 경찰이 총 3명 있었는데, 여러모로 '조'라는 친구가 신경을 써줬다. 물을 옆 농장에서 가져온다고 하기에 직접 물통을 들고 조와 함께 날랐다. 나도 아프리카 사람이 다 됐나 보다. 씻으려고 저 멀리서 물 가지러 가는 거 보면.

자전거를 타고 가다 자주 마추졌던 짐바브웨 전통 가옥.

매일 산길이 이어졌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끊임없이 나왔다. 자전거를 타며 아프리카 전통 집을 많이 봤다. 그래서 일부러 그런 곳에서 자보고 싶어서 대도시를 지나치고 다음 마을로 갔으나, 전통 아프리카 마을이라기보단 그냥 빈민가처럼 보였다. 전통 가옥은 없었고 조그마한 벽돌집밖에 없었다. 그래도 현지인과 소통하고 싶어서 텐트 쳐도 되냐고 몇 번 물어봤으나, 다들 위험하다며 경찰서에 가라고 했다. 결국, 대도시로 다시 돌아가 경찰서에 가는 일이 반복됐다.

사진찍어도 되냐고 묻자 갑자기 일어나서 포즈를 취하는 현지인.

강을 건너기 위한 만남

다음날 아침 코끼리 주의 표지판이 보였다. ‘드디어, 드디어! 아프리카코끼리를 보는 건가?’ 기대했건만, 코끼리는커녕 코끼리 똥도 안 보였다. 아쉽다. 며칠 동안 길 위에 조그마한 시골 동네와 슈퍼가 자주 보였었다. 그런데 오늘은 하나도 안 보인다. 허기져 죽을 것 같았다. 하필 비상식량도 없는데 아무리 가도 슈퍼가 안 보였다. 12시쯤 건물 하나가 보이기에 들어가니 구멍가게가 보였다. 먹을 거라곤 조그마한 과자와 콜라뿐. 콜라 2병과 과자 5봉지를 사서 마구 흡입했더니 조금은 살 거 같았다.

학교를 가기 위해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아이들.

오후에는 마을 한 개를 발견했다. 위생 문제로 그동안 꺼렸던 현지 음식을 먹어 보기로 했다.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허겁지겁 먹는 나를 바라보고 있던 주인아주머니가 채소와 닭고기 국물을 더 챙겨 줬다. 이후 계속 언덕이 이어졌었다. 오후 5시쯤 드디어 빅토리아 폭포 마을에 도착했다.

때마침 나의 파트너 배도 도착했다. 개인 배가 아니라 국가 소유의 배라고 한다. 관광을 위해 사용된다고 한다. 기념식을 위해 하얀 테이블도 있었고 카메라도 있었다. 마을에 들어가는 데 카메라가 나를 찍으니 기분이 묘했다. 뭔가 나를 위한 날 같다. 사람들도 다 나를 위해서 나온 거 같은 착각도 들었다. 3일 전에 우연히 대화했던 직원이 나에게 다가왔다.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 직원과 정말 멋진 악수를 나눴다. 카메라도 어느새 우리를 찍고 있었다. 직원과 악수를 하는 그 순간 성취감에 너무나도 행복했다.

결국 우리는 마지막 목적지에서 다시 만났다.

배도 산으로 갔고, 나도 산으로 갔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더 큰 강으로 가기 위해 이렇게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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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계 2017-05-14 20:36:37
이양반은 잘못된것만 골라보고다니나? 우리나라가...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데... 정치가들이 개판을쳐서 좀 그렇지 세계3대빈국중 하나에서 세계일류나라중의 하나가

Tes 2017-03-01 19:02:02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