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문턱에서 제대로 만났다
겨울의 문턱에서 제대로 만났다
  • 글 성신여자대학교 산악부 / 사진 정영찬
  • 승인 2016.12.2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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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운악산 백패킹

날이 부쩍 추워졌다. 추위를 많이 타는 탓에 벌써부터 내복에 목도리까지 온몸을 꽁꽁 감싸 매고 다닌 지 오래다. 지난 원적산 산행 때 예상치 못했던 맹추위에 크게 데이기도 했고 말이다. 날도 어느새 부쩍 싸늘해져서 냉랭한 겨울 산을 떠올리며 단단히 짐을 꾸렸다. 그렇게 만난 운악산은 뜻밖에도 따뜻하고 청명한 가을의 끝자락을 품고 있었다.

산맥은 이 땅을 지켜주는 듬직한 근육 같다. 우뚝 솟은 운악산 정상에 올라 멋들어진 우리나라의 근육을 감상했다.

씩씩하게, 출발!
운악산이라. 선배들이 당부하길 이름에 ‘악’ 자가 들어간 산은 쉽게 봐선 안 된다고 했지만, 사실 그보다 산 이름에 들어간 ‘구름 운’ 자를 보고 좋아하는 구름바다를 볼 수 있을까 딴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무거운 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스틱도 챙기고, 산에서는 밥도 맛있게 먹어야 씩씩하게 산행할 수 있기에 요리 재료도 빠짐없이 챙겨넣었다. 빼먹은 것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뒤 가평 운악산으로 출발! 운악산 입구 부근은 두부 마을이라 직접 손두부를 만드는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내일 하산하면 꼭 여기서 두부 먹고 가자!” 잔뜩 부푼 기대감으로 운악산에 발을 내디뎠다.

밤 안개 속 산중 안개에 둘러싸여 먹는 저녁. 내일은 또 어떤 즐거운 산행이 기다리고 있을까.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맑게 갠 운악산.

<아웃도어>와 함께 하는 산행의 묘미는 초행길과 야간산행이다. 눈앞은 어둑어둑한 데다 처음 가는 길이라 어느 쪽이 더 편한 길인지, 맞는 길로 가고 있긴 한 건지 여러 고민과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때마다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것은 다른 산악회들이 남겨 놓은 표시들과 정상 표지판이다. 이 표지판들도 산 밑에서 보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왔을 나무 막대기였을 텐데, 이 컴컴한 산 한가운데에서는 모두에게 마음의 위안과 용기를 준다. 정상까지 3시간 걸리는 코스에서 절반 정도 올라오니 길이 어려워지고 배도 고프기 시작해서 마음이 급해졌다.

운악산의 아침 풍경은 옛 선비들이 표현한 무릉도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길을 잃다?
긴 오르막을 오르고 나서 병풍바위에 도착했다. 불빛이 없는 밤에 보아도 그 실루엣이 거대하고 웅장했는데, 아침에 구경하면 정말 장관일 것 같았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옆으로 나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넓은 공터가 있고, 표지판 하나가 서 있었다. 정상으로 가는 방향과 남은 구간 길이가 쓰여 있었고, 의심 없이 따라 내려갔다. 한 열 발자국 정도 내려가다 보니 여기가 길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가파른 사면과 살아있는 낙엽들이 길이 아닌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냉랭한 아침 공기 속 몸을 녹여주는 모닝커피 한 잔.

내려오는 도중에 혹시 놓친 길이 있는지 잘 찾으며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 보니 공터를 벗어나는 내리막 입구에 ‘탐방로아님’ 표시를 발견해냈다. 온통 어두운 데다가 길을 일러줄 사람도 없고 표지판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길 잃기 딱 좋은 곳이었다. 허탈한 마음에 내일 도로를 찾아보기로 하고 그 공터에서 1박을 하기로 결정했다. 운행을 멈추기에 절대 이른 시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서둘러 텐트를 치고 저녁 준비를 했다. 원래 계획했던 일정에서 약간 차질이 생겨서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저녁 식사를 하면서 다 잊어버렸다.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오는 장관 앞에서 다 함께 한 컷!

분위기가 충만한 밤
오늘 저녁 메뉴는 삼겹살과 순두부찌개! 보현 언니가 사 온 은혜로운 떡갈비도 열심히 흡입하며 푸짐한 저녁밥을 즐겼다. 열심히 먹고 있는데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다들 이 정도 비는 맞아도 된다며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옷이 정말 다 젖어버렸다. 뒤늦게 주섬주섬 노란 우비를 꺼내 입고 물먹은 땅콩을 입에 넣다 보니 어느새 비가 그치고 향그러운 밤 안개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운치 있는 한밤중, 산중 안개가 아주 멋있는 분위기를 자아내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밤이 깊어지자 다음 날 기상 시간을 정하고 텐트 안에 들어가 취침을 했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게 푹 잤지만, 다른 언니들은 내 코골이 소리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이번 산행도 무사히 마치게 해주세요! 아 참, 기말고사도….”
악’산인 운악산은 중간중간 가파르고 위험한 돌길이 많았지만 새로운 길은 항상 즐겁다.

아침에 보는 운악산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신입생도 산행 다섯 번이면 알아서 일어나 아침 준비를 시작한다. 다만 지난 밤 분위기에 취해 마신 술이 덜 깨서 제정신이 아닐 뿐이다. 몸을 일으키고 신발을 신는 것조차 힘이 들지만 언니들의 밥을 만들어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신입생들은 술에서 깨려고 고군분투한다. 어지러운 머리를 깨우려고 하늘을 보았더니 하늘은 지난 밤 언제 비를 내리게 했느냐며 반짝반짝 별들과 달을 환히 보여주고 있었다.

밥을 할 준비를 하고 보니 저 멀리 태양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그러자 서서히 어제 보지 못했던 운악산의 모습이 보인다. 앞은 안개 속에서 솟아오른 봉우리들과 그 위에 붉게 달아오른 태양이, 뒤에는 야간산행이라 보지 못했던 병풍바위가 있었다. ‘이것이 옛 선비들이 무릉도원이라고 표현했던 광경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풍경이었다. 옛날에는 ‘등산‘이 아닌 ’입산‘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등산은 산을 정복한다는 뜻이지만 입산은 산 정상에 올라서는 것이 목적이 아닌 산에서의 자연을 즐기기 위해 산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조상님들의 말씀이 백번 맞다고 생각한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산에서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경관이 산악부가 산을 가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산 내음도 좋다!

단단히 싸매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하산 길은 가파른 구간을 지나쳐야 했지만 다치는 것보다는 느린 편이 훨씬 낫다. 서로 “조심 또 조심”을 재차 당부하며 발을 디뎠다.

가벼운 발걸음
아침을 든든히 먹은 뒤 다시 정상을 향해 걸어본다. 식량이 모두 배에 들어가서인지 쉬었다가 가서인지 몸이 가볍다. 아침 일찍이지만 올라오는 등산객이 많아서 어젯밤의 고독한 산행과는 달리 활기찬 분위기였다. 정상을 향해 가면서 가파르고 위험한 돌길도 많고, 오르막을 오르고 난 후 경치가 예쁜 곳도 많아서 지난 밤 병풍바위 앞에서 텐트를 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길만 걷다가 이렇게 바위로 된 재밌는 길을 올라가니까 재밌고 올라가는 내내 내 마음도 조금씩 콩닥콩닥했던 것도 있었다. 새로운 길은 항상 즐거운 것 같다. 만경대에 올라서서 잠시 쉬는데 누군가가 이러한 말을 했다. ‘저렇게 이어져 있는 울퉁불퉁한 산맥이 근육 같아요!’ 그 말을 들으니 정말 산맥이 근육처럼 보였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지켜주는 듬직한 근육. 이러한 생각을 하며 걸으니 우리는 벌써 정상에 도착해있었다.

운악산은 가을과 겨울 사이, 그 어디쯤 머물고 있었다.

정상에서 행동식을 간단하게 먹은 후에 바로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가파른 길을 내려가야 해서 가방이 무거운 우리에게는 좀 시간이 걸렸다. 그렇지만 다치는 것보단 천천히 가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어느 정도 내려가다 보니 점점 길은 평탄해지고 우리 산행이 마무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점점 사람들 얼굴에도 여유가 보이고 허기짐에 속도를 올린다. 조금은 아쉬웠던 점은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바로 가파른 하산길에 접어들어서 너무 빨리 산 아래로 내려와 버린 점이다. 산을 너무 빨리 벗어난 느낌 때문에 산에서 내려오고 나서도 여운이 오랫동안 남았다.

산악부가 산에 오르는 이유? 산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자연과 산 내음, 그리고 내 곁에 함께 하는 좋은 사람들 때문이다.

*장비협찬 툴레, 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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