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안갯속 몽중산행
가을비 안갯속 몽중산행
  • 이슬기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 장비협조 MSR
  • 승인 2016.11.06 09:5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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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간월재 트레킹

가을빛 물드는 나뭇잎 사이로 10월의 비가 내린다. 여린 초록빛에서 짙은 녹색으로, 다시 오색으로 변하는 숲의 보호색. 청명하고 높은 가을 하늘 아래 감상하는 산도 좋지만, 비 오는 날의 분위기도 특유의 운치가 있다. 하얗게 피어오른 안개로 둘러싸인 우중의 산은 꿈속을 헤매는 듯 조용하고 고즈넉하다. 그 짙은 산안개 속에서 산정에 오른 나를 만나는 것은 마치 꿈결 같은 일이다.

짙은 안개를 헤치고 만난 영남알프스에는 꿈속에 들어온 듯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억새가 출렁이는 가을의 산으로
영남알프스 간월재는 선자령 바람의 언덕과 굴업도 개머리언덕, 호명산 잣나무숲과 함께 산꾼들이 인정한 백패킹 4대 성지에 꼽힌다. 봄·여름에는 파릇한 억새의 새순이 깔린 푸른 초원으로, 겨울에는 흑두루미 노니는 새하얀 설경으로 멋들어진 풍광을 자랑한다. 그래도 영남알프스의 참매력을 오롯이 느끼고 싶다면 역시 가을이 정답이다. 황금빛 물결이 출렁이는 광활한 억새밭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절경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백패킹 명소로 유명한 간월재에서의 야영은 실상 불법이라는 것. 간월재가 자리한 간월산과 신불산 일대는 일찍이 군립공원으로 지정돼 취사 및 백패킹이 금지돼 있지만 어마어마한 야영객 탓에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야영객들이 남긴 쓰레기로 골치를 앓던 울주군은 결국 최근 단속을 강화했고, 공공연하게 이뤄지던 백패킹이 이제는 불가능해졌다.

산행을 떠나기 전, 야영장에서의 여유로운 모닝커피 한 잔.

아쉬운 대로 등억온천단지 건너편에 위치한 작천정별빛야영장으로 향한다. 야영장은 KTX 울산역이나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323번 버스를 타고 1시간 반 거리다. 굳이 버스를 타고 돌아볼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면 10~15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택시를 추천한다. 밝은 표정으로 오가는 사람들과 가로수마다 걸린 현수막들. 울주오디세이와 제1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를 맞은 가을의 울주는 들뜬 듯 설레는 공기를 품고 있다.

밤새 내린 비가 텐트 플라이에 맺혀있다.
시원스레 쏟아지는 폭포수.

영남알프스는 가지산(1,204m), 운문산(1,188m), 천황산(1,189m), 신불산(1,209m), 영축산(1,059m), 고헌산(1,032m), 간월산(1,083m) 등 7개 산군이 펼쳐진 모양새가 유럽의 알프스처럼 아름답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었다. 등억온천, 사자평, 밀양 남명리 얼음골, 대곡리암각화, 밀양 농암대, 통도사, 석남사, 운문사, 표충사 등 돌아볼만한 명소와 사찰도 무수하다. 전체를 종주하는 데는 2박 3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멋진 산군의 가장 큰 매력은 단연 억새밭이다. 신불산과 취서산 사이 신불평원 60여만 평과 간월재의 10만여 평, 고헌산 정상 부근 20만여 평의 넓은 대지를 억새군락지가 가득 메운다. 구름 한 점 없이 말갛고 높은 가을 하늘, 그 아래 물결치는 억새가 그리는 파노라마. 기분 좋게 살랑이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그사이를 찬찬히 거니는 모습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칼바위 구간인 신불공룡능선 코스가 위험할 수 있어 임도를 이용했다.

우중산행의 맛
이른 아침부터 채비를 서두르는데 날씨가 심상치 않다. 추적추적 새벽잠을 방해하던 가을비는 시나브로 잦아드는데 하늘은 여전히 잔뜩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 여행 중에 늘 만족스러운 날씨만 만나기란 어렵다. 늘 맑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상황을 즐기는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특히 궂은 날씨의 등산은 처음 겪는 이들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 될지 모르지만, 익숙해지면 오히려 꽤 운치 있는 산행이 될 수 있다.

신불산 등산로는 등억온천단지 내 복합웰컴센터 부근에서 시작한다. 국제클라이밍센터 옆 등산로 입구를 출발해 간월재, 신불산 정상을 거쳐 다시 내려오는 데는 4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산행 난이도는 중간 정도. 달콤한 용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몇 개월 만의 산행에 나선 기자의 친동생도 무리 없이 오를 수 있는 수준이다. 홍류폭포를 지나 신불공룡능선을 타는 칼바위 구간은 비에 젖어 위험할 수 있어 임도를 타기로 했다.

짙은 안개가 영남 알프스의 멋진 풍광을 가려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출발한 지 2시간여 만에 '달을 보는 고개' 간월재에 닿았다.

찬찬히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데, 오를수록 시야가 흐려진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산머리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자욱한 안갯속 구불구불한 길이 전부. 때때로 키 작은 쑥부쟁이나 구절초와 눈길이 닿을 뿐이다. 비 오는 날 산의 한갓진 분위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겹겹이 이어진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영남알프스의 경관을 볼 수 없는 점은 아쉽다. 그 때문인지 드문드문 지나치는 길손들과의 인사가 더욱 반갑다.

‘달을 보는 고개’란 뜻을 품은 간월재는 신불산과 간월산 두 형제봉 사이에 자리한 잿마루다. 옛사람들은 ‘왕방재’ 혹은 ‘왕뱅이 억새만디’라고 불렀다고 한다. 왕뱅이는 간월재의 옛 지명인 ‘왕방재’ , ‘억새만디’는 억새가 많은 고개를 일컫는다. 간월재는 배내골과 언양을 오가는 장꾼들의 삶의 통로로 이용됐다. 사람들은 산에서 만든 숯이나 옹기, 지성으로 먹여 키운 소를 장에 내다 팔기 위해 이 고개를 넘어다녔다.

허탈한 마음에 간월재 데크에 앉아 뿌연 안갯속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꿈속을 거닐다
촉촉하게 젖은 낙엽을 밟으며 걷기를 2시간 정도. 드디어 간월재에 닿았다. 아니나다를까 산정을 두껍게 에워싼 안개는 한 치 앞 풍경도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껏 애써 자기 위안을 하고 있었는데, 이쯤 되니 실망한 기색을 감출 길이 없다. 먼 길을 달려 영남알프스까지 왔는데 그 멋지다는 억새밭 구경도 못 하다니. 볼멘소리를 꺼내자 동생 상구가 한마디 거든다. “이거 다시 오라는 뜻이야. 산이 누나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아쉬운 마음에 간월재에서 한참을 머무르다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정상은 찍어야지!” 신불산 정상을 향해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안개가 더욱 짙어져 계단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분간도 어렵다. 다행히 계단에는 사이사이 벤치가 마련돼 있어 쉬엄쉬엄 오를 수 있었다. 한 40분쯤 길을 따라 걸었을까. 구름 모자를 둘러쓴 신불산 정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야호!”

안견의 몽유도원도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신불산은 영남알프스 가운데 가지산과 천황산에 이어 세 번째 높은 산으로 산세가 험한 편이다. 그중에서도 소위 칼바위 능선이라고 불리는 신불공룡능선은 산악인들에게 특히 사랑받는 코스기도 하다. 이곳 신불산의 산군은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과 비슷하다고 해 영험한 기운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신비로운데.” “무릉도원에 온 것 같다.” 그래서일까. 지독한 산안개 속, 끝없이 이어지는 뿌옇고 몽롱한 풍경을 바라보자니 꿈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산꼭대기의 짙은 구름 위, 괜한 허탈함에 마음에도 드리웠던 안개를 털어내기로 한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부서진 돌 사이로 고개를 늘어뜨린 억새와 빗방울을 머금은 나뭇잎, 안갯속에서도 색을 잃지 않는 야생화. 돌아보니 어느새 우리는 누군가 꿈결에 보았다던 몽유도원도 속 도원경에 들어와 있었다.

오래간만에 함께한 동생과의 산행. 마음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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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2016-11-06 18:10:54
굿!
좋은곳이지요.
수년전에 야영도 했던곳인데..

조금희 2016-11-06 17:27:33
잘 읽었습니다
글을 따라가다보니 산행하는듯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