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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은 웃는데, 눈에선 눈물이…뮤지컬 <빨래>
입은 웃는데, 눈에선 눈물이…뮤지컬 <빨래>
  • 글 이지혜 기자 / 사진제공 씨에이치수박
  • 승인 2016.10.2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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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PLAY

2009년, 유행처럼 번졌던 단어 ‘88세대’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87만 원의 월급으로 시작했던 기자 생활. 보증금 없이 월 50만 원짜리 옥탑방에서 시작했던 그때, 집으로 오는 중화동 골목길에서 오렌지 주스가 먹고 싶었다. 동네 슈퍼 앞에서 3,000원짜리 오렌지 주스를 먹을까 말까를 한참 고민했었다. 빈손으로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와 한참을 울었다. 기억은 어느새 트라우마 비슷한 거로 자리를 잡았는지, 이제 우리 집 냉장고에는 항상 오렌지 주스가 있다. 구질구질한 옛날이야기를 늘어놓는 꼰대는 되지 말자 살았는데, <빨래>를 보다가 그 골목길 위의 내가 보여 눈물이 흘렀다.

서울에서도 하늘과 맞닿은 작은 동네. 오밀조밀한 단칸방으로 서울살이 5년째인 27살 나영이 이사 온다. 나영은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서점에서 부당 해고에 맞서다 자신도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빨래를 널러 올라간 옥상에서 우연히 이웃집 몽골 청년 솔롱고를 만났다. 나영에게 첫눈에 반한 솔롱고. 하지만 불법 노동자로 받은 월급보다 받지 못한 월급이 더 많은 그에게 사랑은 사치다.

두 주인공의 줄거리다.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래>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나영과 솔롱고 말고도 집주인 할머니, 옆집 아줌마, 솔롱고의 친구인 외국인 노동자, 나영의 직장 동료와 사장 등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일만 한 수많은 우리 곁의 밉고 고운 사람들이 나온다.

경쾌한 음악 사이로 “서울살이 몇 핸가요?”하는 가사가 흐르며 공연은 시작된다. 글쎄, 얼마나 됐지, 생각할 시간도 잠시. 가슴에 박히는 대사가 넘쳐난다.

억척스럽게 관리비와 월세를 받아내는 집주인 할머니에겐 비밀이 있다. 사고로 사지 절단 장애를 가진 딸을 40년간 숨기고 산다. 냄새나는 딸 방 앞에서 미간을 찌푸리는 공무원에게, “사람이 살아 있으면, 다 냄새 풍기며 사는거여”하며 서럽게 울부짖는다.

15년 가까이 옆방에 사는 아줌마는 과부다. 가끔 그를 찾는 홀아비 구 씨와 연애 중이다. 밤이면 싸우고 낮이면 다정해지는 사이다. 집주인 할머니와 맞먹는 강단과 어마무시한 오지랖을 자랑한다. 집주인 할머니의 딸이 위급한 어느 날 밤, 할머니의 부름에 급히 달려가 “뭐시 문제여, 내 등이 한 밭이여”하며 딸을 업고 뛴다.

그녀들의 대사는 하나같이 마음에 박힌다. 그러면서도 우습다. 할머니의 찰진 사투리와 욕이 우습고, 옆집 아줌마의 천연덕스러운 옷맵시가 우습다. 필리핀 노동자의 어색한 한국어도 우습고 꾸벅꾸벅 조는 게 일상인 슈퍼 아저씨도 우습다. 우스워서 입은 웃고 있는데, 눈에선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참 이상한 뮤지컬이다.

공연은 길다. 인터미션을 포함하고 3시간에 가깝다. 하지만 그 어떤 공연보다 지루하지 않다. 어제의 아픔은 깨끗한 물에 빨아버리고, 내일의 행복을 탈탈 털어 넌다. ‘팡’하며 털리는 이불에 우는 나영의 앞머리가 날린다. 마치 행복이 곧 올 것만 같다.

공연은 서울살이 지친 당신에게, “고생했어”라고 말해준다. 11년째 이어지는 공연이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뮤지컬 중에서도 특히 좋은 평을 받아 외국에서 연일 호평이란다. 그럴만하다. 놀랄만한 점은, 11년 전 만들어진 공연의 내용이 지금 보아도 전혀 현실감 없지 않다는 점이다.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론 또 슬프다.

바짝 마른빨래처럼, 지금 힘든 당신의 눈물이 언젠가 바짝 말라지길. 이제 오렌지주스를 그만 마셔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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