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달리고 있다”
“나는 아직 달리고 있다”
  • 글 김지섭 | 사진 유희선 작가(Purna Yu)
  • 승인 2016.09.2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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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트레일러너 김지섭 DMZ 울트라 트레일 100km 우승 후기

새벽 5시 30분. 컴컴한 방구석에 무언가의 번쩍임과 동시에 익숙한 기계음이 귓가에 맴돌기 시작한다. 두 눈을 찡그리며 손을 길게 뻗어 몸 주변 구석구석을 뒤적인다. 오른쪽이었나? 왼쪽이었나? 반대 손을 다시 뻗어 이 기계음의 출처를 찾는다. 집어든 휴대폰 알람시간에 안도하며 ‘십분만’을 마음속에서 읊었지만 잠시 뒤에 책상 위에서 또다시 알람소리가 울려 퍼진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몸을 일으킨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보니 오늘도 까치집이구나... 그래도 보는 눈이 있을까 싶어 대충 머리에 물을 찍어 정리한다.

▲ DMZ 울트라 트레일 대회 100km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헐거워진 트레일러닝화를 대충 발에 끼워 맞춰보니 축축하다 못해 아직 젖어있다. 어제 밤 훈련을 끝내고 땀에 젖은 옷가지들은 세탁기 안으로 던져냈으나 이 신발들은 어떻게 해결을 못했다. 신발장 사이로 새어나오는 퀴퀴한 냄새가 이번 여름 따라 더 심해진 듯하다. 현관 앞 뿌옇게 깔린 모래먼지를 밟고 일어난다. 어스름을 뚫고 트레일 깊은 곳으로 달려 나간다. 나의 하루는 조금 일찍 시작된다.

원래는 수개월 전부터 프랑스 샤모니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의 트레일러닝 대회인 U.T.M.B의 O.C.C 종목에 참가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여러 사정이 겹치면서 참가할 수 없게 되어 다른 대회로 변경해야 했다.

트레일러닝을 시작한지 어언 3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정말 막막했던 것 같다. 많은 인구가 즐기고 있는 외국과는 다르게 뚜렷한 훈련 정보들이 없었고 체계적인 훈련이 쉽지 않았다. 여러 국내외 대회를 완주하고, 부상을 반복하며 훈련방법을 공부하고, 내 몸에 적용해가며 나만의 방법을 찾은 듯하다.

대회 준비도 강훈련과 부상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가며 훈련을 완료했다. 이번 대회의 정식명칭은 D.M.Z ULTRA TRAIL 대회로 9월 1일 선수등록 일정을 시작으로 9월 2, 3, 4,일 각각 37km, 50km, 13km를 나누어 달리는 스테이지 방식의 대회다. U.T.M.B에 초점을 두고 몸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여느 타 대회를 참가했을 때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물론 순위도 중요했지만 스테이지별 난이도에 맞게 기록을 앞당겨보고 싶은 마음도 강했다.

▲ 평화로운 DMZ를 달리면서. 내가 이곳을 다시 달릴 기회가 다시 찾아올까.

이른 저녁 민통선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캠프 그리브스에 도착했다. 캠프 그리브스는 D.M.Z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2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주한미군 막사로 사용되다가 2007년 한국 정부에 반환되어 현재는 유스호스텔로 리모델링되어 민간인에게 개방되어 사용 중인 곳이다. 얼마 전에 인기리에 방영된 ‘태양의 후예’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1일 저녁 참가자 모두 강당에 모여 레이스 디렉터인 안병식 선배님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대회 전반적인 내용에 관해서 전달받았다. 숙소로 돌아와 제공 받은 배번호와 내일 있을 대회 필수 품목을 다시 한 번 살피고 이른 시간 잠자리에 들었다.

STAGE1 - 37km +880m 김포, 평화누리길 1,2코스 및 문수산 일대
새벽 5시 눈뜨자마자 식당으로 향했다. 하나 둘 참가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들 피곤해하는 눈치다. 잠자는 시간 내내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몰아쳤다. 천둥번개 소리에 잠깐 뒤척이며 ‘힘든 레이스가 되겠구나.’ 걱정이 앞섰다.

캠프그리브스에서 첫 날 레이스가 펼쳐지는 김포 대명항으로 향했다. 잠자리에서의 걱정과는 다르게 큰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옅은 비가 출발지 주변을 적셨다. 큰 비가 아니라면 달리기엔 최고의 날씨라고 생각됐다.

▲ 가장 먼저 STAGE1의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해병 군악대의 식전행사를 시작으로 사회자의 출발 신호에 따라 뛰어 나간다. 처음부터 페이스를 올리기 시작했다. 경쾌한 발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따라 붙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발소리를 떨쳐내고자 한 번 더 속도를 올렸다 의식하지 않았던 나의 헐떡임이 심해질 때 즈음에 나를 따라오던 발걸음 소리는 멀어져간다. 구부러진 코너를 돌자마자 뒤를 돌아 슬쩍 살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페이스를 조금 낮추고 CP1까지 달렸다. 평화누리길 1, 2코스와 문수산을 달리는 코스로 초반 코스는 평지와 나지막한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CP1에 도착했다.

이어 문수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탁 트인 시야는 사라지고 오르막이 이어진다. 나의 속도는 조금 늦어졌을 뿐 뒤꿈치는 쉽게 땅에 닿지 않는다. 보폭을 줄이고 보속을 높였다. 점차 장딴지와 허벅지가 뜨끈해져 온다. 익숙하다 이 느낌이 나쁘지 않다.

연신 고개를 쳐들고 떨구기를 반복하며 혹시 길을 잃지 않을까 코스 마킹에 집중했다. 능선에 다다르자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탁 트인 시야 양옆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물론이고 과연 해외에도 이런 코스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문수산을 지나 마을 곳곳을 지나친다. D.M.Z 근처 들녘을 지난다. 평화롭기 그지없다. 한국이었지만 내가 이곳을 다시 달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싶었다. 코스를 뒤로 흘려보내며 아쉬움을 더한다. 그 아쉬움을 더해 주로 위에서 집중할 수 있었다.

곳곳에 해병대 장병의 길 안내를 받으며 쉬지 않고 달려 나갔다. 곧 사회자의 마이크 소리가 울려 퍼지며 가장 먼저 STAGE1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공식기록: 02:37:40

*현재 김지섭씨는 아웃도어글로벌 소속으로 근무하고 있다.

▲ 대회 참가자들이 모여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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