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 누이를 아시나요?
라파 누이를 아시나요?
  • 글 사진 정효진 기자
  • 승인 2016.08.2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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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여행자의 지구별 자전거 여행

여행 1년을 기념해 나 자신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바로 모아이 석상 보러 가기.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슈퍼마리오’ 게임에서 봤던 게 전부인 모아이 석상을 보러 가려니 벌써 두근댄다.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은 태평양 한가운데 있다. 칠레 영토에 속하지만,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가는 방법이 가장 저렴하다. 그래도 왕복 비행기 요금이 400달러(46만 원)이라 부담되긴 마찬가지다. 비행시간은 대략 6시간. 내게 주는 선물 치고 과한 것일까?

신비의 섬 라파 누이
이스터 섬에는 6일 정도 머무르기로 했다. 하루 11달러로 캠핑 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날씨 예측이 거의 불가능하다.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섬이라 물가는 유럽보다 훨씬 더 비쌌다. 엄지만한 바퀴벌레도 주변에 많다. 화장실엔 바퀴벌레가 항상 있어서 화장실 가는 것이 모험이었다.

텐트도 치고 주변 시설도 다 확인했겠다,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본다. 풍경들이 낯익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곳, 그래서 직장을 관두고 9개월 간 살았던 제주도와 매우 비슷했다. 태생적으로 따져보면 제주도와 이스터 섬은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섬이라 그 모습이 닮을 수밖에 없다. 제주도에도 돌하르방이라는 석상이 있다. 다른 것은 크기가 모아이 석상에 비하면 굉장히 작다는 것. 이스터 섬은 제주도보다 11배 작은 크기지만 섬을 둘러보려면 렌터카가 무조건 필요하다. 대중교통이 전혀 발달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한국 여행자들을 만나 같이 차를 렌트했다.

▲ 게임에서 본 것이 전부였던 모아이 석상.

드디어 본격적으로 모아이 석상 탐험을 할 차례다. 고대 원주민들은 왜 모아이를 만들었을까? 많은 사람이 모아이 석상을 외계인이 지었다고 믿는다. 정말 그런지 확인해봐야겠다. 외계인 조사를 하기 전에 실제 역사 기록을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이 섬은 네덜란드 선장이 1722년 부활절날 발견하게 되어서 부활절의 뜻인 이스터라는 명칭을 얻었다. 그런데 이 섬을 부르는 명칭이 다른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라파 누이’다. 라파 누이와 이스터는 무슨 관계일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잇는다.

▲ 일주일간 머물렀던 야영장.

▲ 제주도를 빼닮은 이스터 섬.

이스터 섬 관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채석장이다. 말 그대로 채석을 했던 곳이니 그곳에 가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다. 입장료 50달러의 압박이 있긴 했지만 아주 중요한 장소기에 꼭 들러보기로 했다. 채석장에는 많은 모아이 석상이 있다. 엽서나 인터넷에 자주 보이던 석상들도 보였다. 그동안 마을 근처에서 봤던 석상과는 다르게 크기도 거대했다.

전 세계 모든 섬 중에 라파 누이는 사람의 거주 지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다. 면적은 166㎢, 한국의 안면도 크기다. 이 섬엔 총 887개의 모아이가 있다. 채석장에 방치된 모아이만 400개가 넘는다. 가장 큰 모아이 높이는 10m가 넘으며 무게는 90톤에 가깝다. 이보다 작은 모아이 3.5~5.5m는 20톤에 달한다.

▲ 마을 근처 모아이 석상.

▲ 채석장 안의 모습.

모아이 석상이 외계인이 지은 게 아니라는 증거들이 곳곳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800~900년경, 폴리네시아 항해자들이 이 섬에 정착했다. 당시 이곳엔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바닷새 25종, 육지 새 6종, 그리고 바다 멀리에 참돌고래, 야자수는 대략 1억 그루 정도 있었다고. 한마디로 이곳은 지상낙원이었다.

원주민들은 처음 조그마한 모아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돌하르방을 만든 이유와 똑같았을 거 같다. 마을의 수호신 혹은 부족을 통치하기 위해서 세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 더욱 강력한 통치와 부족의 단결을 위해서 모아이를 더욱 크게 만들었을 것이다. 1400년경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때 거대 모아이의 대부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 조각을 추측할 수 있는 채석장.

▲ 거대한 모아이 석상을 실감할 수 있다.

비극적인 식인 문화

인구가 늘어나며 자연스럽게 한정적인 식량이 문제였을 거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모아이를 만드는데 대부분 자원을 다 쓴 것. 90톤이 넘는 모아이를 옮기기 위해 바닥에 굴릴 수많은 야자수 나무가 필요했다. 야자수 나무를 자르니 새들의 서식지가 사라지고, 바다낚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카누를 만들 수조차 없게 됐다. 1600년경 섬의 모든 나무가 멸종하고 나서야 대형 모아이 석상 건립이 중단됐다. 가장 최악인 것은 먹을 게 없어서 같은 종족을 잡아먹기 시작, 즉 식인 문화가 시작된 것이다.

▲ 아침 일찍 일출을 보러 갔다.

그렇게 섬은 폐허가 다 되어갔다. 1722년 네덜란드 선장에 의해 외부로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발견 당시에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1770년대 스페인이 이 섬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했다. 1800년대에는 1,000명이 넘는 원주민이 페루의 노예로 팔려갔으며, 섬에는 질병이 퍼져 나가서 인구가 급격히 줄었다.

결국, 1872년 이 섬에는 110명의 원주민이 전부였다. 그러다 1888년 칠레의 영토가 된 것. 다시 말하면 칠레는 남의 땅을 차지 한 것이다. 심지어 이곳은 라파 누이가 아닌 이스터 섬이라는 공식 명칭까지 붙게 된다. 이후 1900년대 칠레는 관광 사업을 위해 본토인 이주 정책을 펼치게 된다.

▲ 우연히 만나게 된 한국인 여행자들.

사실 원주민은 폴리네시아 계통으로 인종적으로 남미와 전혀 관련이 없다. 한 외국 인터뷰 내용을 보니 본토인들은 원주민들을 막 대한다고 한다. 원주민들은 호텔 허드렛일이나 물고기를 잡는 일로 삶을 꾸리고 있다. 폴리네시아 섬 중 사모아(1962년), 통가(1970년), 투발로(1978년) 등의 독립국 탄생이 원주민들의 독립 열망을 더욱 자극했다.

독립을 향한 원주민들의 물리적 저항은 2010년에 가장 거셌다. 원주민들은 그 해 9~12월, 섬 내 10여 개의 관공서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 벌였다. 농성은 칠레 본토에서 넘어온 전투 경찰들이 최루가스 등으로 관공서 점거 주민들을 진압하며 중단됐다. 나중에는 라파 누이 사람 20명 이상이 크게 다치자 유엔은 양측에 자제를 촉구하기도 했다.

▲ 라파 누이 섬의 아름다운 오롱고 분화구.

칠레에 병합되기 직전, 섬을 다스렸던 라파 누이의 마지막 왕 시레온 리로 카인가는 칠레 정부에 의해 독살됐다고 한다. 만약 우리나라가 일본에 점령된 후에, 일본이 우리나라 이름을 멋대로 지어낸다면, 과연 그 이름이 달가울까? 앞으론 이스터 섬이라기보다는 라파 누이라고 이 섬을 불러줘야 할 것 같다.

원주민들은 이후 현재까지도 비폭력 시위를 통한 독립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국제사법재판소 등을 통해 칠레와의 억울한 병합을 알리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동시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꿈꾸는 뉴 칼레도니아 등 다른 폴리네시아 섬들과 연계해 독립운동에 나서는 방법도 검토 중이다.

▲ 색을 느낄 수 없던 회색 도로.

많은 사람이 라파 누이의 원주민을 보며 안타깝고 불쌍하게 생각할 것이다. 모아이를 만들다가 섬의 모든 자원을 다 써버린, 식인종으로까지 변하게 된 원주민. 그런데 사실 그 원주민과 우리는 언뜻 보면 서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중요치 않은 일에 목숨을 걸고 돈을 들이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굿을 위해 과한 돈을 들인다든지. 혹은 남들과의 무의미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과시한다든지. 필요도 없는 비싼 외제차를 할부로 긁거나 자기 월급에는 맞지 않은 비싼 명품들로 자신을 치장하다가 결국엔 빚을 감당 못 해 파산 신청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오래 전 라파 누이 섬의 파괴가, 이 지구의 종말 모습과 닮진 않을까? 과거는 단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과거의 재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흘려 넘긴다면 과거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 사막 너머의 모습.

오아시스를 찾아 떠나다

페루 리마로 돌아오니 라파 누이에서 일주일이란 시간이 꿈같다. 리마에서 몇백㎞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오아시스가 있다. 또 다른 신비스러운 곳을 향해 이동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 두 번째 뺑소니 교통사고가 났다. 파란 3륜 모토 택시가 내 자전거 옆을 치고 도망갔다. 트럭도 아니면서, 도로 폭이 충분할 텐데 왜 내 자전거 옆을 치고 지나갔는지 이해가 안 갔다.

‘고의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전거와 함께 넘어지면 크게 다칠 거 같아, 순간적으로 자전거에서 점프해 두세 바퀴 굴렀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너무 서러웠다. 숙소를 찾는 한 시간 동안 길에서 펑펑 울었다. 나쁜 사람. 사과라도 하고 갔다면 내가 이렇게 슬프진 않을 텐데. 어두컴컴한 5달러짜리 숙소에 짐을 풀고 1달러짜리 점심을 먹으며 하루를 마감했다.

▲ 마침내 찾게 된 오아시스.

다음날부터 한참 헤맨 후 드디어 진짜 오아시스가 있다는 와카치나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근데 오아시스는 어디 있지? 마을만 보였다. 사람들은 앞으로 계속 가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말 달리다 보니 저 멀리 거대한 사막 언덕이 보였다.
그런데 정말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대부분 숙소에 방이 없다는 것. 이 동네가 이렇게 인기 있는 곳이었나. 알고 보니 갑자기 마련된 정상 회담으로 휴일이 지정되었고, 많은 사람이 휴가를 왔다고 한다. 힘들게 8달러짜리 숙소를 찾았다. 보기엔 별거 없어 보여도 나에겐 천국이었다.

드디어 사막투어를 신청했다. 가격은 약 11달러. 며칠 동안 자전거를 타며 봤던 사막과는 차원이 다르다. 어떻게 이 동네에만 이렇게 거대한 사막이 있을 수 있는지. 어떻게 이곳에 오아시스가 있는 건지.

사막의 표면은 모래로 쌓여있다. 그런데 그 밑을 파고 들어가면 딱딱한 지반이 나타난다. 이 지반 위로 지하수가 흐른다. 모래가 바람에 날리면서 모래 언덕 위치가 끊임없이 변하게 되는데, 그러다가 푹 꺼지는 부분이 생긴다. 그러면 그 부분이 오아시스가 되는 것이다.

▲ 도시에서 벗어나면 작은 집들이 보인다.

이론으로 보면 참 쉬워 보여도 실제로 보면 경이롭게 보이는 곳이 사막의 오아시스다. 저녁에는 별사진을 찍으러 사막 위를 기어 올라갔다. 첫째 날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사막 중간에 다들 앉아있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침보라소 산 오르는 것만큼이나 정상에 오르는 건 힘들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발이 푹푹 사막 모래에 묻혔다. 고산 등산 실패를 사막 등산으로 분풀이. 네 발로 기어서 정상에 올라갔다.

오아시스를 찾아서 4일 동안 미친 듯이 달렸다. 3일 간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간다. 태어나서 처음 본 사막의 오아시스. 그래, 언젠간 열심히 달리다 보면 이렇게 오아시스를 만나는 날도 오겠지. 내 여행기는 달콤한 일도 있고, 힘들고 눈물 나는 일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런 소소한 행복이 있기에, 여행을 포기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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