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콜롬비아
굿바이 콜롬비아
  • 글 사진 정효진 기자
  • 승인 2016.06.28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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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여행자의 지구별 자전거 여행

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은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을 따라 7,000km 뻗어져 있는 안데스 산맥이다. 그곳에서 난 매일 같이 자전거를 탔다. 콜롬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메데진 후엔 끝없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됐다. 사탕수수밭을 양옆으로 끼고 네 시간가량 오르막을 올랐는데, 잘못된 길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충격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GPS가 없는 나로서는, 사실 GPS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럴 때 정말 힘들다. 우습게도 내려갈 땐 30분도 안 걸렸다. ‘인생 내리막길 순식간이다’란 건 이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 물통을 짐받이로 변신시켜 다니는 아르헨티나 자전거 여행자.
가족 중심의 문화
해지기 전에 잠자리를 찾아야 했다. 사실 텐트에서 자면 매번 긴장하게 된다. 머리맡에는 항상 호신용 스프레이를 놓는다. 이틀 전부터 악몽을 꿨다. 특히 어젯밤엔 끔찍한 악몽을 꿨다. 텐트를 쳐도 되냐고 현지인에게 물었는데 실내에서 자라며 호의를 베풀었다. 나와 동갑내기 현지인이 방을 내주었다. 벌써 아기가 있는 여자였다.

여자는 내게 “결혼은 했냐” , “아기는 있냐”라고 물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항상 사람들이 이 두 가지를 묻는다. 가족 중심의 생활이다 보니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들의 시선에선 20대 중반인 내가 아직도 애가 없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하룻밤 잔 곳에는 세 개의 집이 나란히 붙어있는데, 다들 한 가족이다. 대략 20~30명의 가족 구성원이 뭉쳐 산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볼 수 없는 끈끈한 끈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나 보다. 이런 가족단위의 생활이 사람들을 더욱 인간미 나게 하는 것 아닐까? 콜롬비아에선 대부분이 텐트 치는 걸 흔쾌히 허락해줬다. 저녁 식사에 초대해주고 아침에 차를 대접해주기도 했다.

▲ 학교 건물 안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냈다.

▲ 현지 시장을 구경했다.

▲ 안데스 산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피 농장.

다음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자전거 여행자와 만났다. 그런데 장비가 굉장히 화려했다. 그들의 짐받이는 물통이었다! 직접 제작했다고 한다. 완전 방수도 된다. 그들로부터 흥미로운 정보 하나를 얻었다. 자전거 여행자 쉼터가 주변에 있다는 것.

그들에게 얻은 정보로 찾아가니 부엌과 잠잘 곳이 있고, 인터넷도 할 수 있는 완벽한 호스텔 같은 곳이었는데 무료였다. 한 현지인이 자전거 여행자를 위해 사비로 관리하고 있었다. 자전거 여행자들을 집에서 재워주는 웜샤워와 비슷한 개념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호스텔처럼 여러 명이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무료로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는 이런 자전거 여행자 쉼터가 몇 개 있다. 친절함뿐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적인 자세도 있어야 이런 곳을 운영할 수 있을 거다. 물론 돈도 좀 필요하겠지? 이미 머물 곳이 정해졌었기에 쉼터를 둘러보고 다시 자전거를 탔다.

▲ 떠나간 친구 옆을 지키던 누렁이.

▲ 하수구에 빠지는 최악의 사고를 겪었다.

콜롬비아 마약 거래 실상

오랜만에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안데스 산맥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내리막 이후엔 평지가 이어졌다. 오랜만에 평지가 나와서 자전거 타는 게 신났다. 내리막과 평지 덕분에 100km 넘게 달렸다. 뚤루아라는 소도시에 도착하니 때마침 축제가 시작됐다. 그동안 여러 조그마한 축제들을 많이 봐왔지만, 오늘만큼 예쁘고 다채로웠던 적은 없었다.

뚤루아는 조그만 마을일 거 같아서 큰 기대 없이 잠시 쉬어가려고 했는데 뜻밖에 큰 횡재를 한 기분이다. 뚤루아에서 웜샤워를 통해 현지인 집에 머물렀다. 나를 초대해준 친구의 이름은 조나단이었다. 조나단은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올해 10월 최종테스트를 거치고 졸업을 하면 변호사가 된다.

▲ 내 키보다 깊은 하수구. 다행히 지나가던 행인이 구해줬다.

조나단은 국제철인경기에서 3위를 차지했다. 도대체 변호사 공부를 하면서 운동할 시간이 어디 있는지 궁금했다. 그가 말해준 비법은 간단했다. “만약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해야만 하는 거야.”

조나단은 빠스또 전에 100km 구간이 콜롬비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며 버스를 타라고 조언했다. 그에게 마약 거래의 배경을 듣게 됐다. 콜롬비아의 동쪽에서 마약 원료를 재배하고, 이것을 서쪽으로 운반한다. 그러면 서쪽에서 마약을 상품으로 제조한다.

▲ 게릴라가 도사려 버스를 타고 지나갔던 멋진 곳.

이후 멕시코로 운반하는데, 최종 목적지는 미국이다. 물론 유럽에도 간다. 콜롬비아에서 마약 1kg은 100$에 팔린다. 이후 이것이 멕시코로 넘어가면 1,000$로 팔리고, 미국에 최종 도착하게 되면 마약 1kg은 3,000$로 팔린다. 작은 마약상이 1년에 파는 마약은 15톤이다. 경력 있는 큰 상인들은 일 년에 100톤을 판다고 한다.

현재 아메리카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로 꼽히는 콜롬비아와 멕시코. 어쩌면 위험한 나라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가장 큰 해결방법은 미국의 마약을 뿌리 뽑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슬프게도 ‘전쟁=돈’이라는 꼬리표가 달리고 있다. 미국 정부가 돈의 이익보다 인간의 값어치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이 악몽을 근절시킬 기회를 콜롬비아, 멕시코 정부에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콜롬비아, 멕시코 정부가 스스로 마약과 관련된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 독특한 현지 의상을 입은 콜롬비아 사람.
남겨진 자의 슬픔

다음날도 평지가 이어졌다. 콜롬비아 경로에서 유일한 평지. 아마도 콜롬비아에선 앞으론 다시 평지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신나게 달리고 있다가 뭔가를 목격하게 되었다.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친구 곁을 지키고 있는 누렁 개 한 마리였다.

혹시 배고플 거 같아서 내 주식 식빵을 던져주었으나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동안 수없이도 많은 거리의 개들을 보았고 가끔 내 주식을 나눠주면 다들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그런데 이 누렁이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비가 오는데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먹는 것도 거부하고 멍하니 검정 개를 지키고 있었다.

혹시 몰라 식빵 먹는 시늉을 보이면서 가까이 가자 으르렁거렸다. 잠시 후 마른 땅을 핥기에 비닐봉지에 물을 담아서 건넸다. 나를 너무 경계해서 사탕수수 가지를 이용해서 멀리서 주었다. 다행히도 내가 건넨 물은 받아먹었다.

검정이를 두고 마을로 가면, 냇가에서 물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그냥 하염없이 앉아 있었나 보다. 누렁이는 물을 마신 뒤 다시 돌아와 친구를 지켰다. 쳐다보기도 하고 핥기도 했다. 큰 트럭들이 소음을 내며 지나갈 때는 겁을 먹고 바닥에 잔뜩 엎드렸다. 너무나도 불쌍해 보였다. 누렁이가 너무 바보 같아 보였다.

내가 갖고 있었던 식량이라곤 식빵과 과자 한 봉지라서 과자도 던져줬지만 쳐다도 안 본다. 배고플 거 같아서 식빵 몇 개 더 던져주고 할 수 없이 떠났다. 얼마 후 색깔이 똑같은 강아지 한 쌍을 길에서 보게 되었다. 내가 울었던 까닭은 나도 잘 모르겠다. 분명 이렇게 같이 뛰어놀았던 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차에 치여서 갓길로 겨우 내려왔을 것이고, 누렁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 곁을 지켜줬을 것이다. 죽음은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의 몫이다. 어떤 단어로도 남겨진 자의 슬픔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

▲ 이런 곳에서 자전거를 타는 건 축복이다.

끔찍한 추락사고를 당하다

콜롬비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깔리에 도착했다. 차와 오토바이가 엉켜 교통이 복잡했다. 결국, 그 사이를 피해가다가 도로 한가운데에 넘어졌다. 따라오던 차가 나를 밟고 지나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깔리 이후에 다시 힘겨운 오르막이 시작됐다.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자전거에 앉아 쉬기도 했고, 자전거를 세워두고 한쪽에 앉아 쉬기도 했다. 어느 소도시에 다다랐을 때 하수구 옆에 있던 턱에 발을 올려 쉬려고 했다. 그런데 아뿔싸! 몸의 균형을 잃고 옆에 있던 하수구 구멍에 몸이 쏠렸다. 순간 뭐라도 붙잡으려다가 자전거를 붙잡았다. 결국, 자전거까지 딸려 함께 떨어졌다.

▲ 엽서에 자주 나올 것 같은 성당에 방문했다.

최악이었다. 떨어지면서 머리가 벽에 부딪혔고 자전거가 딸려오는 바람에 몸이 자전거에 깔렸다. 자전거가 완전히 하수구에 잠긴 걸 보니 하수구 구멍이 내 키보다 높았던 거 같다. 바깥에서는 내가 보이지 않을 거다. 나 혼자 힘으로 빠져나가 보려고 했지만, 자전거와 짐의 무게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8,000km를 넘게 이동한 자전거가 그 순간만큼은 단 1cm도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가 45도 각도로 벽에 끼었고 몸도 접혀있던 상태에 다리는 자전거에 눌려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오히려 힘을 쓰려고 하면 자전거에 다리가 더 짓눌리는 거 같았다. 결국, 서러움에 목 놓아 펑펑 울었다. 하지만 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늦어지면 밤이 찾아올 거다. 또다시 짐승처럼 소리쳤다. 다행히도 지나가던 사람이 나를 구조해줬다.

오른쪽 다리가 심하게 멍들어 자전거를 타기엔 통증이 있었다. 자전거에 짓눌려 멍이 든 것인지 아니면 떨어진 충격에 멍이 든 것인지 알 수 없다. 왼쪽 발과 등에도 여러 군데 멍이 들었다. 안장 일부도 뜯어졌다. 천만다행인 것이 헬멧이 내 목숨을 살렸다. 헬멧이 없었다면 피를 잔뜩 흘렸을 것이고, 소리 지를 힘도 없이 의식을 잃어 하수구에서 오랫동안 있었을 거다.

아픈 몸을 이끌고 조금 더 자전거를 타고 갔다. 소나기가 온 덕에 무지개가 저 멀리 보였지만 내 마음속은 아직도 그 하수구에 갇혀있었다. 영화와는 달리 구조된 뒤에 희열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내 몸도 구조되고 자전거도 구조됐지만, 마음만큼은 구조되지 못했나 보다. 누군가 당장에라도 내 어깨를 토닥여줬다면 밤새도록 울 수 있을 거 같았다.

▲ 한국의 곱창과 비슷한 음식.

콜롬비아와 작별할 시간

조나단의 말대로 뽀빠얀에서 다음 대도시 빠스또까지 버스를 탔다. 호스텔에 이 구간은 절대 야간버스를 타고 가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인터넷에도 같은 말이 있었고, 여행 책자에도 마찬가지였다. 현지인도 이 구간은 위험하다고 했다. 버스 안에서 바라본 풍경은 어마어마했다. 거대한 협곡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콜롬비아는 정말 예쁜 도로가 많다. 사실 약간 아쉬운 점도 없진 않았다. 버스는 너무 빠르다. 자전거로 갔으면 천천히 감상할 수 있었겠지만, 안전이 더 중요하니 아쉬움을 접자.

이동구간은 250km지만, 산악지형이라 6시간이 걸렸다. 빠스또부터 다시 힘든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세계에서 가장 긴 안데스 산맥 넘기가 쉬울 리가 없었다. 해발 2,600m에서 3,200m까지 오르는 일은 너무 힘들어서 4시간 동안 15km를 기어갔다. 무엇보다 이슬비가 끊임없이 내려서 추웠다. 이렇게 힘들긴 했지만, 버스 타고 지나가는 거에 비하면 훨씬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악지형이라 하루 이동 거리는 50km가 전부였다. 해지기 전, 주변 주민에게 하룻밤 마당에 텐트를 쳐도 되냐고 물었다. 밖은 춥다며 안에서 자라고 침대를 내줬다. 저녁 식사에도 초대해주고 따뜻한 차도 대접해주었다. 역시나 콜롬비아 사람들! 매우 친절하다.

▲ 실내에서 재워준 친절한 콜롬비아 가족.

다음날엔 종일 이슬비가 내려서 아름다운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전거를 질질 끌다 보니 속도가 느려 오후 늦게 콜롬비아의 마지막 도시 이삐알레스에 도착했다. 이삐알레스 주민들은 다른 콜롬비아 사람들과 확실히 달라 보였다. 고산지대에 살다 보니 그런 거 같다.

이삐알레스에는 엽서에서만 보아왔던 예쁜 성당이 협곡 사이에 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곳에서 실어증을 앓는 소녀와 그의 엄마가 길을 가다가 폭우를 만나 동굴로 피신을 했다고 한다. 그때 성모마리아가 나타나서 소녀에게 인사를 했고, 소녀는 엄마에게 성모마리아가 자기에게 인사를 했다며 말을 하게 된다. 그 순간 소녀는 언어장애를 기적처럼 극복하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이후 이곳은 성지로 변해서 많은 이들이 소원을 빌러 온다.

콜롬비아를 떠나는 날. 입국도장도 전날 받아놨겠다, 환전도 다 해놨겠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젠 2개월 넘게 있었던 콜롬비아와 작별하고 에콰도르로 넘어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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