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바람 사이로 느끼는 나무
바람과 바람 사이로 느끼는 나무
  • 박성용 부장
  • 승인 2016.06.22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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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CLASSIC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와 슈베르트 즉흥곡

지난 5월에 방송된 EBS의 다큐프라임 3부작 <한반도 대서사시 나무>는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겨울에서 이듬해 겨울까지 5계절 동안 경상도·전라도의 작은 마을들과 지리산 골짜기, 충청도 들녘까지 나무들을 찾아 나선 여정을 담은 다큐다. 이중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예지와 나무 인문학자 고규홍이 출연한 3부 ‘슈베르트와 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고규홍의 안내로 나무를 만져보고 느끼는 김예지의 감성이 슈베르트 음악에 실려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 운길산 수종사의 은행나무. 사진 박성용

▲ 나무 인문학자 고규홍 씨가 지은 <슈베르트와 나무>.
3부에 나오는 배경음악은 슈베르트의 즉흥곡 Op.142(D.935) 제3번으로 1개 테마와 5개 변주곡으로 이루어진 음악이다. 원곡은 극부수음악 <로자문데> 3막 간주곡으로, 아주 간단한 선율로 시작하지만 현악기와 관악기들이 주고받는 주제는 콧등이 시큰거릴 만큼 아름다워 슈베르트의 짧은 생애가 남긴 한숨과 우수처럼 느껴진다. 슈베르트는 마음에 드는 선율이 있으면 다른 작품에도 종종 차용을 했다. 현악사중주 제13번 ‘로자문데’ 2악장 안단테의 주제 선율도 3막 간주곡에서 가져왔다.

학교 캠퍼스, 여주 고향집, 천리포수목원 등지를 찾아다니는 나무여행은 독주회를 앞둔 김예지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방송을 보면서 평소 즐겨 듣던 슈베르트의 즉흥곡이 이렇게 나무와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이제 슈베르트의 즉흥곡을 들을 때마다 나무에 얽힌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짙게 배어나올 것 같다. 김예지는 나무와 즉흥곡의 정서를 이렇게 연결하고 있다.

“변주곡을 치면서 나무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왜냐하면 변주곡 같은 경우에는 하나의 주제가 있어요. 계절마다 변했던 나무의 느낌들, 잎사귀 변화들, 열매나 꽃의 변화들, 그런 특징들처럼 변주곡에서도 자연스럽게 변화가 흐르는 걸 느끼고 연주할 때 항상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 피아니스트는 눈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자기만의 나무를 마음속에 심어놓았다. 그 나무는 계절이 지나가고 삶의 변주가 흐르는 한권의 악보인 셈이다. 김예지가 나무 앞에서 느낀 표현은 한편의 시다. “나무가 있는 공간에서는 바람이 불었을 때 바람이 한 번에 몰려오는 게 아니라 바람에 공간이 생겨요. 바람과 바람 사이에요. 그리고 냄새가 있어요. 흙과 섞인 향기가 있고요. 그런 향기, 느낌, 소리로 나무를 느끼는 것 같아요.”

▲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하는 슈베르트 극부수음악 <로자문데>와 알프레드 브렌델이 연주하는 슈베르트 즉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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