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아름다움이 있었다…미학 오디세이
태초에 아름다움이 있었다…미학 오디세이
  • 선정 및 발췌 오대진 기자|사진 김해진 기자
  • 승인 2016.06.0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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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BOOK

피타고라스의 삼각형
플라톤 저기 피타고라스 선생이 그린 삼각형 좀 보게. 저게 완전할까?
아리스 아뇨, 아무리 정확히 그려도 몇 만 분의 1의 오차는 있겠죠.
플라톤 하지만 선생이 그 유명한 ‘정리a²=b²+c²’를 얘기할 때, 그의 머릿속에 든 직삼각형의 관념이데아만은 완전하겠지?
아리스 관념엔 오차가 있을 수 없죠.
플라톤 그럼 묻겠네. 과연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게 나왔겠나, 아니면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게 나왔겠나? 가령 노트를 복사한다고 생각해보게.
아리스 아무래도 원본이 복사본보다야 완전하기 마련이죠.
플라톤 그렇다면 완전한 이데아 세계에서 불완전한 이 세상이 나왔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아리스 글쎄요, 왜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게 나올 수 없죠? 지금 피타고라스 선생은 바닥에 그려진 저 불완전한 삼각형으로 제자들에게 완전한 삼각형의 개념을 설명하잖습니까. 선생이 저 불완전한 삼각형으로 그 유명한 정리를 설명할 때, 선생은 불완전한 그림에서 완벽한 직삼각형의 개념을 뽑아낸 게 아닌가요?
플라톤 거 참 신비한 노릇 아닌가? 자넨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설명할 수 있나.
아리스 거기까진 아직…….

동굴 속의 죄수들
플라톤 그게 바로 자네의 한계야. 들어보게.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원래 저 하늘 위 이데아 세계에 살았다네. 하늘, 바다, 꽃과 나무, 거기선 모든 게 그것의 ‘개념’만큼이나 완전하지.
아리스 저 하늘에요?
플라톤 물론. 그 나라에 비하면 이 세계는 그림자에 불과해. 가령 동굴 밖에 누가 서 있고, 그 사람의 그림자가 동굴 벽에 비친다고 생각해 보게. 이승에 사는 우리는 동굴 속에서 그 그림자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죄수의 처지라 할 수 있지. 그 그림자가 사물의 참된 모습이라고 상식적으로 믿으며 말일세.
아리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아시죠? 직접 가보셨나요?
플라톤 사실 나도 죽었다 여드레 만에 깨어난 사람한테 들은 얘기야. 그 사람 말로는, 그 나라와 이 세상 사이엔 ‘레테망각’라는 강이 있다더군.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그 강물을 마시는데, 그럼 이데아의 세계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다나?
아리스 그게 이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죠?
플라톤 들어보게. 비록 우리가 이데아 세계를 까맣게 잊어버려도, 이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가 아닌가? 그러니 이 세상의 사물을 보면, 어디서 본 듯하다는 느낌이 들면서 어렴풋이 그 이데아가 떠오르게 되는 거지.
아리스 결국 피타고라스 선생이 불완전한 삼각형에서 완전한 개념을 뽑아낼 수 있는 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이데아를 봤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이군요.
플라톤 아니면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나?
<미학 오디세이 1> 90~93쪽에서 발췌

▲ 미학 오디세이(20주년 개정판) 진중권 지음(2014. 1, 휴머니스트)
미학이라는 학문이 한국 사회에 처음 대중적으로 소개된 지 스무 해를 넘어섰다. <미학 오디세이>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 막 도래한 인터넷 문화와 호흡을 같이하며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제는 보편적 소통 방식이 된 다양한 이미지의 활용과 구어체 사용 등이 주요했다.

작가 진중권은 20주년 기념판 머리말에서 “이런 책을 다시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중략)… 물론 이 책을 쓰던 시절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미학에 대해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알고 있을 테고, 쓰려고만 한다면 이보다 낫게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 책만큼 대중적인 사랑을 받을 수는 없으리라. 그 시절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새로운 것을 알게 됐을 때의 황홀한 기쁨은 다시 반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가 주는 황홀한 기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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