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이 산에서 오르더라
달은 이 산에서 오르더라
  • 박성용 기자
  • 승인 2011.04.2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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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TRAVEL 영암 ①PROLOGUE

▲ 남도 평야에 우뚝 솟은 월출산은 기암괴석과 나무들을 품에 안은 명품 분재처럼 보인다. 사진 영암군청

영암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월출산이다. 드넓은 평야에 우뚝 솟은 월출산은 그 모양이 타오르는 불꽃이요, 그 기세는 불끈거리는 20대 청춘이다. 영암 땅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두 눈 꽉 차게 들어오는 월출산의 기세는 누구나 탄성을 지르게 한다.

누가 그랬던가. 월출산은 신이 만든 거대한 분재 같다고. 실제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는 월출산은 비옥한 들판을 받침대 삼아 기암괴석과 나무들을 품에 안은 명품 분재처럼 보인다. 여기에 벚꽃 점점이 날리는 가슴 저미는 봄날의 정경이 더해지면 대낮이라도 술잔을 끌어당기고 싶을 것이다.

▲ 남도 평야에 우뚝 솟은 월출산은 기암괴석과 나무들을 품에 안은 명품 분재처럼 보인다. 사진 영암군청
▲ 영산강 하류의 갯벌을 막아 만든 대불국사산업단지. 강 건너편은 목포시다. 사진 영암군청

불꽃처럼 기운 내뿜는 월출산  

월출산(月出山)은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에 월나악(月奈岳), 고려시대엔 월생산(月生山)이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구림마을에서 보면 달이 마치 월출산에서 생겨나 떠오르듯 보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다 같은 달이지만 영암에 뜨는 달은 어떤 특별함이 있을까.

영암 출신의 문인 박철씨는 “월출산은 빛은 빛이되 해처럼 눈부시지 않고 어둠을 밝히는 달빛처럼 신비감으로 가득 차있다. 대지의 기운을 모아 하늘을 향해 우람하게 솟아오른 바위산 위로 수줍은 듯 얼굴을 내미는 달뜨는 모습은 황홀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한편 매월당 김시습은 ‘남쪽 고을에 그림같은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서 오르더라’고 노래했다.

이처럼 영암 땅 어디에서나 보이는 월출산은 이곳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신령스런 바위’를 뜻하는 영암(靈巖)이란 지명은 월출산을 뜻하고, 그 정기는 이 지역의 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월출산의 기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현재 개발 중인 둘레길 ‘기찬묏길’, 천연 자연풀장 ‘기찬랜드’ 그리고 영암의 농산물 전시 판매장 ‘기찬장터’ 등 영암군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사업 이름에 ‘기(氣)’자가 빠지지 않는다.

영암군 자료에 따르면 월출산 구정봉 정상의 암반을 신령암(神靈岩) 또는 삼동석(三動石)일고 하는데, 열 사람이 움직이나 한 사람이 움직이나 그 흔들림이 똑같은 동석(動石) 세 개가 있어 영암(靈巖)이란 지명도 이 삼동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월출산을 아침 하늘에 불꽃처럼 기를 내뿜는 기상이라고 했다.

영암은 삼한시대부터 남도지방의 중심지로 자리 잡으며, 기원 후 1~5세기까지 대형옹관고분문화 라는 독특한 영산강 유역문화를 창조하여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대형옹관고분 100여 기가 분포하고 있는데, 옹관제조기술은 훗날 옹기기술의 바탕이 되었다.

▲ 통일신라말기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국보 제144호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구정봉 서벽 암벽 정상에 있다. 사진 영암군청
▲ 영암이 낳은 대표 인물인 왕인 박사 사당. 영암군은 군서면 동구림리에 왕인 박사 유적지를 조성했다. 사진 박성용 기자
왕인박사·도선국사가 태어난 땅  
월출산 서쪽 자락에 있는 주지봉을 주산으로 삼고 좌우에 죽순봉과 문필봉을 용마루로 거느리는 지세에 들어앉은 구림마을은 22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비둘기 구(鳩), 수풀 림(林)이란 마을 이름에는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가 전해진다.

성기동 구시바위에서 최씨 성을 가진 처녀가 빨래를 하다가 물에 떠내려 오는 푸른 오이를 먹고 아이를 가졌다. 처녀는 아이를 낳고 숲속 바위에 버렸는데, 며칠 후에 가보니 비둘기 떼가 아이를 감싸고 있어 다시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그 아이가 풍수도참사상의 시조인 도선국사다. 그 후 이 바위는 국사암으로, 숲은 구림(鳩林)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회사정, 국암사, 담숙제 등 12개의 누정과 전통가옥, 돌담 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구림마을은 낭주 최씨, 함양 박씨, 연주 현씨, 해주 최씨, 창녕 조씨, 선산 임씨 등의 집성촌이다. 조선 명종 20년(1565)에 박규정·임호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구림대동계는 설립 초기의 계문서(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8호)가 보존되고 지금까지 계 운영이 지속되고 있는 유서 깊은 향약이다.

이밖에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가 주축이 된 영보대동계, 남평 문씨의 장암대동계, 제주 양씨와 해주 오씨가 결성한 은곡대동계 등이 있다. 

▲ 사자저수지에서 바라본 월출산 전경. 뮤지컬 ‘영암아리랑’ 무대가 이곳에 꾸며진다. 사진 이두용 기자
월출산의 기운 탓일까, 구림마을에서 일본 고대문화의 시조 왕인 박사를 비롯해 고려 건국을 예언하고 불교 중흥에 힘쓴 도선국사, 고려 건국 일등공신 최지몽, 조선시대 이괄의 난의 평정한 김완 장군 등 도인과 무관들이 많이 태어났다. 

왕인 박사는 여덟 살 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에 입문하여 유학과 경전을 수학하고 문장이 뛰어나 열여덟 살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다. 이후 백제 제17대 아신왕 때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간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상대포는 당시 중국과 일본 등을 오가던 국제교역항으로 신라 말 최치원이 당나라에 갈 때도 이용한 포구였다. 왕인 박사는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그리고 도공, 야공, 제기 기술자를 모아 일본으로 건너가서 문물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태자의 사부이자 정치 고문으로도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 오사카 히라가타시에 묘소가 있다.

도선국사(827~893)는 중국 선불교의 6조 혜능대사의 법손(法孫) 마조 선사의 문중에서 수행하고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 선문(桐裏山禪門)의 제2대 선사를 지냈다. 도선의 음양지리설, 풍수상지법은 훗날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 담양에서 발원하여 장장 115km를 달려온 영산강은 영암에서 서해와 만난다. 사진 이두용기자
▲ 4월이면 장관을 이루는 영암 100리 벚꽃길. 사진 영암군청

남도 젖줄 영산강   

왕건의 삼국통일 위업 일등 공신인 최지몽은 어려서부터 밤마다 별만 쳐다보고 혼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별귀신이 붙어서 미쳐 실성을 했다고 모두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낮에는 공부에 매달려 남달리 총명한 재주로 선생과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천문학에 정통했고 어려운 주역을 줄줄 외웠다고 한다. 최지몽은 고려 태조부터 시작하여 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까지 64년 동안 여섯 임금을 모셨는데, 이는 고려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관직에서 왕을 보필했던 것으로 기록된다.

영암 땅의 서쪽 끄트머리에는 남도의 젖줄 영산강이 흐른다. 담양 용추봉에서 발원하여 담양·광주·나주를 적시며 장장 115km를 달려온 영산강은 영암군 삼호면에 이르러 서해에 발을 담근다.
이 물줄기를 따라 조선시대엔 쌀을 실은 조운선이 서해를 거쳐 김포까지 오르내렸고, 일제강점기엔 황포돛배에 실린 쌀들이 목포에서 화물선으로 갈아타고 일본까지 건너갔다.

그러나 1981년 길이 4350m에 달하는 하구둑이 들어서면서 뱃길이 끊어졌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줘야 하는 법. 영산강 유역 종합개발사업과 간척사업으로 갯벌을 잃은 대신 대불국가산업단지와 삼호지방산업단지를 얻었다.   

▲ 매년 4월에 열리는 왕인문화축제. 영암에서 태어난 백제 사람 왕인 박사는 일본에 건너가 고대문화를 전파했다. 사진 영암군청

물길이 막히자 발길이 끊어진 것은 배만이 아니다. 강을 오르내리던 황어·웅어 등 다양한 어종들이 자취를 감추고 뱃길 따라 번성했던 나루터 문화도 사라진 것. 그러나 같이 사라졌으면 좋을 설움과 한은 그대로 남아 때로 분노와 눈물로 흐르는 영산강. 시인 문병란은 이런 심정을 ‘우리들 한 시절 사람도 못 되어/ 전라도 놈들로 밀리며/ 설움을 안주 삼아 퍼마셨던 밤/ 빈병 줄 세워 쌓아 놓고 밤이 새도록/ 영산강이 마르도록 우리들은/ 한 많은 전라도를 마시고 또 마셨다’고 목 놓아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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