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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 하리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 하리오”
  • 박성용 부장
  • 승인 2016.05.25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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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CLASSIC 백담사의 봄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30번

설악산 백담사에 도착하자 눈이 환해졌다. 이제 막 봄기운이 퍼지는 산골의 풍경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백담계곡의 둥글고 흰 호박돌들 때문이다. 그래서 백담사에 올 때마다 셔틀버스 종점에서 짧은 돌계단을 올라 세심교에 접어들면 삼도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는 듯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곤 한다.

주말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세심교를 건너는 사람들은 젊은이 보다는 가족들하고 관광에 나선 노인들이 많다. 지팡이를 짚거나 허리를 구부린 채 세심교를 느릿느릿 걸어가는 노인들의 뒷모습을 보면 아련한 긴 생애의 그림자들이 드리워져 있어 가끔 가슴이 먹먹해진다. 절 마당의 나무들이 연둣빛 새순으로 먼 걸음을 한 얼굴들을 쓰다듬어주는 백담사의 봄. 산벚꽃 피는 이 무렵이면 만해 한용운의 시가 생각난다.

▲ 2016년 설악산 백담사의 봄. 사진 박성용

춘화(春畵)
1
따스한 별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 하리오.
2
봄날이 고요키로
향을 피고 앉았더니
쌉쌀개 꿈을 꾸고
거미는 줄을 친다
어디서 꾸꿍이 소리
산을 넘어 오더라

▲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30·31번이 수록된 에밀 길렐스의 마지막 레코딩. 사진 김해진

선풍이 강한 이 시에 어울리는 음악은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작품 가운데 제30번이다. 희로애락을 다 겪은 말년 베토벤의 인생이 함축된 음악이다. 특히 1개 주제와 6개 변주로 이루어진 3악장 변주곡은 꿈결 같은 선율로 삶의 고통과 기도를 담아내고 있다. 이 음반은 에밀 길렐스(1916~1985)의 마지막 레코딩이다. 에밀 길렐스의 타건은 백담사의 산벚꽃잎처럼 가벼웁고 애잔하다. 고요한 봄날의 산골, 분분 날리는 꽃잎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한들 무삼 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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