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산을 못 봐도 즐겁구나!”
“후지산을 못 봐도 즐겁구나!”
  • 글 사진 김동규(경희대 산악부 OB)
  • 승인 2016.04.24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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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알프스 단독 종주 ①

방랑 시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도 후지산(3,776m)을 못 보았던 모양이다. 나 역시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 때마다 흐린 날씨 때문에 제대로 그 자태를 볼 수 없었다. 하이쿠(俳句)의 대가는 보이지 않는 후지산에서도 그 고고함을 읽을 수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가로막고 있는 구름 앞에서 그러한 심미안이 나오지 않았다.

▲ 센조가다케 정상의 능선길.

후지산과의 대면을 위한 여정
그동안 줄기차게 나와의 대면을 거부하던 후지산에게 멋진 복수를 생각해 냈다. 후지산을 내내 바라볼 수 있는 곳인 일본 남알프스 종주를 계획한 것이다. 더욱이 장마를 피해 9월로 잡았고 종주 기간도 12일이나 되므로 제아무리 고고한 후지산이라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남알프스 소재의 일본 백명산 열 개를 모두 경유하기로 했다. 또 하나. 하루 10만 원 정도의 경비가 드는 산장 유숙과 매식은 감당할 수 없으므로 텐트와 식량을 가지고 가기로 했다.

시즈오카 공항에 내린 것은 황금들판에 추수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시즈오카 행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총총 걸음으로 공항 전망대에 올랐으나 후지산은 지난 여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구름 속에 있었다.
기차를 타고 미노부(身延)로 이동했다. 일본의 시골 마을은 차분하다. 우리네 마을 풍경과 비슷한 듯 다른 거리와 집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평화롭다. 장시간 걸리는 환승이 오히려 고맙다. 집집마다 가문을 나타내는 문양이 이채롭다.
마을 뒷길을 거닐다가 한 상점의 노랭(상점 인구에 드리운 천)을 걷고 들어갔다. 주인장이 낯선 손님에게 고장 와인을 권한다. 한 잔 마셨더니 창밖으로 후지강 강물이 꿈처럼 흘러갔다.

▲ 미노부 시의 집의 가문을 나타내는 문양.

비행기 운송 규정으로 연료를 가져 오지 못했는데, 산장에서는 판매하지 않고 등산로 입구 히로가와라에서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며칠간 남알프스 산행을 마친 뒤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노 등산객이 이 사실을 알려주며 자신의 배낭에서 남아 있던 연료를 꺼내주었다.
그는 멀리 북쪽 홋카이도에서 기차를 타고 이 곳까지 온 열혈 등산객이었다. 며칠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차 패스는 의외로 저렴했다. 퇴직 후 기차 표 한 장을 들고 전국의 산을 돌고 있는 그의 얼굴에 여유가 넘쳐났다. 도시가 아름답다고 했더니 ‘미노부는 일본 법화종의 창시자 니치렌(日蓮, 1222~1282)이 태어난 곳’이라고 알려 주었다.

일본의 산들은 행복하다. 그 동안 몇 군데 돌아다닌 일본의 산을 보면, 어느 한 산을 사랑하고 추종하여 평생 그 모습을 담아내는 붙박이 사진사가 있음을 알았다. 다이센은 ‘가라키다카시(柄木孝志)’ , 후지산은 ‘사노히로코(佐野弘子)’가 그런 분들이다. 시라하타씨는 평생 남알프스의 사진을 촬영해 온 분이다. 사진첩에서 본 그의 사진은 남알프스를 전경으로 서있는 후지산이 장엄하고 또 코믹했다. 그가 그런 명작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성원과 후원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 지역의 산림을 보유하고 있는 동해 펄프 주식회사는 그의 업적을 존중해 2007년도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그의 산악 사진관을 설립했다.

▲ 미노부 시의 거리 풍경.

나라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늦어서 ‘시라하타(白旗史朗) 산악 사진관’을 찾아갈 수는 없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피해 정류장 데크에 텐트를 쳤다. 주위를 보니 내일 기타다케를 오르기 위해 나 말고도 숙박하는 사람이 몇 있었다. 그들은 나의 남알프스 종주계획을 에베레스트 등정이라도 되는 듯 놀라며 성공을 기원해 주었다.

가이고마가다케 수호신을 만나다
산행 첫날 아침은 화창했다. 새벽 첫 차를 타고 히로가와라(広川原)에 내렸다. 산행 후반부 식량 8일분을 코인라커에 맡겨 놓고 다시 버스를 환승해 기타자와 고개(北沢峠)에 도착했다. 센조가다케와 가이고마가다케 산행 기점이 되는 곳이다. 오늘은 가이고마가다케를 오르기로 했다.

▲ 가이고마가다케.

도쿄에서 JR 중앙선을 타고 고후(甲府)에 이르면 좀 전까지 멀리 보였던 산이 갑자기 창밖으로 다가와 있다. 가이고마가다케의 괴이한 암봉이 우리들 눈을 놀라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다. 왼쪽의 강바닥에서부터 2,000여 미터를 일거에 솟아 오른 산이 우리를 마주하는 것이다. 기차 여행에서 이만큼 가까이서 압박하듯 다가오는 산은 없을 것이다.

후카다 선생이 ‘일본백명산’에서 묘사한 대목이 떠올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센스이(仙水) 고개부터는 급경사가 시작되고 열대 우림 같은 숲길을 벗어나자 오른편으로 하얀 바위산이 나타났다. 드디어 가이고마가다케와 조우했다고 들 떠 있는데 고마쓰미네(駒津峰)에 이르러 진짜 주봉이 아닌걸 알았다.

▲ 가이고마가다케 오르는 길에 본 기타다케 정상.

▲ 하야오네(早川尾根) 능선을 경계로 운해가 펼쳐졌다.

좀 전 그 것은 무사의 수호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마리시텐(摩利支天)이라는 봉우리였다. 주봉을 베일 속에 가려 놓고 눈길을 호도하기까지 하는 충실한 수호신이었던 것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자 수호신은 기분이 좋아진 듯 천천히 문을 열어 주었다. 주봉 역시 급할 것이 없다는 듯 짙게 깔려 있던 안개 틈 사이로 도도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가이고마가다케는 햇빛을 받아 마치 흰 눈을 머리에 쓴 듯 하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파란 옷을 입은 산은 피라미드처럼 뾰족 솟은 정상부분이 마치 독수리의 머리처럼 벗겨져 있었다. 이는 부석부석한 화강암 탓이겠지만 주변의 넓은 산중에서도 우뚝 눈길을 끄는 요인이 됐다. 과연 정상에는 신사라든가 불상 비석 그리고 창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특히 꽂혀진 창을 보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경우였는데 창 역시 뭔가를 수호하기 위한 안성맞춤으로 생각되었다. 정상 동쪽의 길은 화강암이 부서진 주황색 고운 입자가 황홀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 센조가다케 오르면서 바라 본 가이고마다케. 우측의 뾰족한 바위가 가이고마가다케의 수호신 마리시텐(摩利支天)이다.

기대와는 다르게 정상에 오르는 사이 구름이 몰려왔다. 하야오네(早川尾根) 능선의 태평양 쪽은 짙은 운해가 펼쳐졌다. 후지산은 가이고마가다케 정상 북동쪽 어딘가에서 운해 밑으로 꼭꼭 숨어버리고 말았다. 후지산과의 조우를 내일의 센조가다케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 기타자와 고개 텐트 사이트에서 바라보는 센조가다케.
다시 초에이 산장(長衛荘)으로 하산했다. 산장 옆의 공터 텐트사이트에 텐트를 쳤다. 산장 벽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초에이 산장의 이름의 유래를 알았다. 남알프스 개산(開山)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다케사와초에이(竹沢長衛, 1899生)’는 어린 시절부터 산을 좋아했고 커서는 최초의 남알프스의 가이드가 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 산장을 짓고 안전 등산에 힘을 쏟았다. 그는 이런 공로가 인정되어 산장 입구 바위벽에 그의 모습이 조각돼 있다. 또한 매년 7월 중순엔 초에이 축제가 열릴 정도로 존경 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날 밤 초에이 산장지배인 다케모토(竹元直亮)씨를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행운이었다. 먼저 궁금한 산 정상의 신사와 불상이 많은 이유를 물었다.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말기 가난 질병 등 엄청난 시련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기 위하여 산악신앙의 개념이 생겼습니다. 가이고마가다케는 그 대상이었습니다. 정상 부분의 모습에서 이미 느끼셨겠지만 삼각추의 신비로운 모습이 영험함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마을에서 올라가는 등산로는 참배길이라 할 수 있으며, 입구에는 신사가 있고 정상에 이르는 길에는 도리이(鳥居, 신사 입구에 세운 두 기둥의 문)나 불상, 비석이 연달아 있습니다.”

산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도 설명이 이어졌다. “고마(駒)란 말(馬)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름이 불린 것은 근처 산기슭에 말 목장이 많은 데서 유래한 것 같습니다.”
한반도를 통해 한자와 불교가 전해졌고, 말이 건너갔다. 말의 존재도 모르던 마을에서 그 빠르고 힘 센 말이 그들에게 주었을 충격은 상상할 만했다. 가이고마가다케는 일찍이 말이 귀한 시절 붙여진 이름이었다. 마음 한편이 뿌듯해짐을 느꼈다.

▲ 가이고마가다케 정상. 제단, 불상, 삼지창 등이 모셔져 있다.

▲ 센조산장에서 바라보는 중앙알프스.

▲ 우마노세(馬ノ背) 능선에서 본 센조산장.

▲ 기타자와 고개 계곡의 이끼 낀 숲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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