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머무는 속도, 초속 5센티미터
봄이 머무는 속도, 초속 5센티미터
  • 김경선 기자|사진 이두용
  • 승인 2016.04.1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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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 건축구조물 재활용해 생동감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

봄이 되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일본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가 떠오른다. 첫사랑의 아련함을 담담히 그려낸 애니메이션은 시종일관 섬세하고 세밀한 묘사로 기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난 지금도 영화의 첫 대사를 잊을 수가 없다.
“있잖아, 초속 5센티미터래.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 눈처럼 내리는 벚꽃비에 놀란 아이들.

기자에게 봄은 ‘초속 5센티미터’다. 기다리는 만큼이나 더디게 왔다가, 어느 순간 가버린다. 설렘의 계절을 완성하는 벚꽃은 올해도 어김없이 만개했고,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졌다. 그리고 찰나의 아름다움이 떠나가는 자리에는 복사꽃·철쭉·민들레 등 봄꽃들이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딸들은 흐릿한 벚꽃보다는 꽃분홍 진달래와 샛노란 개나리에 열광했다. 벚꽃이 제아무리 흐드러지게 피었어도 “하얀 꽃은 별로”라는 딸들에게 ‘봄의 여왕’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아이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핑크 공주’ 진달래와 철쭉도 빼놓을 순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장소는 어딜까. 가까우면서도 봄의 향기를 물씬 만끽할 수 있는 곳, 후배 기자들이 입을 모아 추천하는 선유도다.

▲ 선유도는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하기 좋은 공간이다. 식물원은 물론이고 공원 곳곳에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다양하다.

▲ 선유도이야기 앞마당에 있는 낙서 공간을 신기한 듯 쳐다 보는 아이들.

신록으로 생동하는 ‘물의 공원’

선유도는 2번째 방문이다. 첫 방문은 매서운 겨울이었다. 식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시멘트 구조물에 실망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걸까? 아니면 그 사이 선유도가 환골탈태라도 했나?’ 의아했던 마음도 잠시, 선유도에 들어서자 그 이유를 금세 눈치 챘다. 모든 것은 ‘계절’ 때문이다.

‘물의 공원’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는 선유도는 한강에 떠 있는 작은 섬으로 오래 전 정수장이었던 건축물을 재활용해 2002년 생태공원으로 조성했다. 녹색기둥의 정원, 수생식물원, 시간의 정원…. 각종 식물원이 가득한 공원은 신록이 만발한 수목과 화사한 봄꽃이 어우러져 봄의 축제가 한창이었다.

▲ 신록으로 푸른 공원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

과거 삭막하다 생각했던 시멘트 구조물에는 담쟁이넝쿨과 줄사철이 가득했다. 섬을 가득 메운 식물이 자취를 감추는 겨울에 ‘선유도의 매력’을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이었나. 선유도의 진짜 매력은 녹색식물이 가득한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에 만날 수 있었다.

선유교를 통과하는 봄바람이 제법 거세다. 아이들의 얇은 옷차림이 걱정스러워 옷깃을 여미며 선유마당에 도착하자 섬을 메운 수목 덕분인지 강바람이 잠잠해졌다. 선유도는 11만 400㎡ 규모로 원래 선유봉이라는 작은 봉우리 섬이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홍수를 막고, 길을 포장하기 위해 암석을 채취하면서 깎여나가 지금은 온전한 평지로 탈바꿈했다.

▲ 고양이 입 속에 손가락을 집어 넣고 무서워하는 유나와 예나.

공원은 선유교를 기준으로 동서쪽으로 조성돼 있으며, 섬을 아우르는 둘레길과 그 사이를 연결하는 샛길이 촘촘히 연결돼 어디로 가든 가볍게 걷기 좋은 코스가 가득하다. 우리는 선유마당에서 시작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며 섬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식물원과 전시관을 둘러보는 코스를 잡았다.

▲ 땅 위에 내려앉은 꽃잎을 한 움큼 손에 쥐고는 신기해하는 아이들.

흩날리는 꽃비에 마음이 살랑

“엄마, 눈이에요.”
산들산들 봄바람에 벚꽃이 우수수 떨어졌다. 흐드러지는 꽃비의 향연이 아이들에게는 눈이 내리는 모습과 흡사한가 보다. 그 황홀한 장면에 넋을 잃은 아이들의 순수한 표정이 순백의 벚꽃과 어우러지는 찰나의 순간, 땅 위에 가득한 꽃잎을 한 움큼 손에 쥐더니 하늘로 흩날리며 “꺄르르” 웃은 예나의 표정….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에 카메라를 쥔 엄마의 손이 바빠진다.

▲ 선유도이야기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이색적인 공간이 펼쳐졌다.

꽃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선유도이야기다. 건물 앞마당 한쪽 벽에는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시민들의 낙서가 가득하다.

“엄마, 하트에요.” 여느 명소의 낙서처럼 이곳에도 ‘OO♡□□’이 자주 눈에 띄었다. 하트를 찾아다니며 손가락질하는 유나와 예나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 녹색기둥의 공원에서 숨바꼭질하는 아이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독특하면서도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공간이 펼쳐졌다. 넓은 공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공간 구석구석에 계단을 배치해 정적인 요소와 동적인 요소가 상호작용하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기는 미술관에 온 듯한 느낌이랄까. 여백이 가득한 공간이지만 곳곳의 조형물로 인해 이색적인 구도의 사진을 건질 수 있어 카메라족에게 인기 있는 장소다.

건물의 반대편은 녹색기둥의 정원이다. 원래 이곳은 정수된 물을 송수펌프로 공급하기 전 잠시 물을 담아두던 지하 저수조로 지붕을 걷어낸 후 남은 30여개의 콘크리트 기둥만 남아있던 죽은 공간이었다. 폐허와 다름없던 공간을 다시 살려낸 건 담쟁이넝쿨이다. 차가운 기둥을 빼곡히 감싼 담쟁이는 멈추었던 시간을 다시 흐르게 만들었다.

▲ 조팝나무의 새하얀 꽃잎에 시선을 뺏긴 예나.

선유도의 모든 공간이 마찬가지다. 시간이 멈춰버렸던 폐허는 이제 살아있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물속 불순물을 걸러내던 수생식물원은 칸칸이 구획된 시멘트 공간에서 꽃수조로 변신했고, 약품 침전지를 재활용한 시간의 정원은 덩굴원, 이끼원, 고사리원 등 각각 주제가 있는 작은 테마정원으로 바뀌었다.

공원을 쉴 새 없이 뛰노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피곤이 몰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을 맞이하는 수목은 신록이 꿈틀대고, 봄꽃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화려한 제 모습을 뽐내니 기자의 지친 마음도 어느새 말랑말랑 풀어졌다.

▲ "엄마, 물 속에서 나무가 자라요." 공원을 가득 메운 수많은 식물들에 호기심을 보인 유나와 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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