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k Column|하염없이 걷고 싶다
Desk Column|하염없이 걷고 싶다
  • 서승범 차장
  • 승인 2016.03.02 16: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참 자연의 법칙에 충실한 몸입니다. 만유인력에 자전의 원심력을 더한 중력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산에 가면 모든 오르막이 깔딱고개이고 힐러리스텝입니다. 그래서 클라이밍은 서너 번 도전 끝에 ‘자연친화적’이지 않아 접었습니다. 그렇다고 거꾸로 중력을, 아니 중력만을 따르는 것도 질색팔색입니다. 그 방향으로는 가속도의 법칙이 적용되니까요. 중력에 충실하니 중력가속의 법칙은 얼마나 잘 따르겠습니까. 번지점프, 스카이다이빙 이런 거 하는 거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저희 팀원들은 다 압니다. 평소 밥집 술집 갈 때는 뒷짐 지고도 선두에 서지만 산에 가면 의도와 상관없이 꼬랑지에서 후방을 주시하며 오른다는 걸. 몸탓만은 아닙니다. 예전엔 살 한 번 빼보겠다고, 능선과 정상에 한 번 서보겠다고 배낭 챙겨 산에 곧잘 올랐습니다. 버스 타고 매번 가던 북한산 입장권(그때는 입장권이 있었었었…)이 쌓이자 대학 때도 안 갔던 지리산을 떠올렸고 은박지에 된장 싸서 ‘츄리닝’ 바람에 뱀사골을 오르기도 했습니다. 일에 쫓기고 시간에 치이다 보면 여유 시간에 하는 것들을 놓치는 게 세상사입니다만, 제 스스로 심드렁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어지간한 건 제 몸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마음은 장수고 몸은 졸개여서 마음이 움직이면 몸이 따른다 했으니 마음을 빼앗지 못한다는 게 정확하겠습니다. 마흔을 넘기면서 더 그렇다고 생각되는 건 공구 선생 탓일까요?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김시습을 좋아하는, 한량을 꿈꾸는, 그 워너비에 근접한 한 선생께서 불혹에 대한 탁견을 내신 적이 있습니다. 그는 ‘농담의 독법’이라 했습니다. 이런 거죠. 불혹不惑은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마흔이나 되었는데 유혹에 흔들리지 말아야지’라는 의지의 표현으로 본 것입니다. 공구 선생이 참 인간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이 농담의 독법에 따르면 지우학으로 시작해 약관, 이립 거쳐 불혹에 이르는 길이 이렇게 정리됩니다. ‘그래, 열다섯이면 공부에 흥미를 잃을 나이지.

스무 살에 어른이 된다는 건 어불성설이야. 서른 살이면 사회에서건 가정에서건 앞이 캄캄해지는 게 정상 아니겠어? 네가 사십대라면 유혹에 기꺼이 넘어가도록 해. 더 나이 들면 아무도 너를 유혹하지 않을 테니까.’ 남은 건 지천명과 이순. 그는 오십과 육십 중간입니다. 하늘의 뜻을 알기는커녕 선악도 피아도 구분하기 어려워지더랍니다. 이순은 귀를 순하게 하라는, 입 다물고 귀를 열라는 뜻이라더군요. 아, 이 양반이랑 소주 한 잔 하고 싶네요.

처음으로 돌아가, 제 마음을 훔치는 것들이 갈수록 적어집니다. 퇴근하고 함허동천으로 달려가 제일 높은 데크까지 땀 뻘뻘 흘리면서 올라가 술 한 잔 하고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출근해 화장실에서 세수하던 시절은 이미 흔적도 없습니다. 캠핑 좋아하지만 하룻밤 자겠다고 바리바리 짐 싸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사소해지는 만큼, 거기서 사라져버린 절실함들이 한 군데로 모이는 것 같습니다. 하염없이 걷고 싶습니다. 문득 ‘하염없다’가 무슨 뜻인지 궁금해 찾아보니 시름에 쌓여 멍하니 아무 생각이 없거나 어떤 행동이나 마음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는 상태를 말하더군요.

얼마를 더 걸어왔고, 몇 킬로미터를 더 걸어야 하고에 마음 두지 않고, 나에게 길은 무엇이고 떠난다는 건 무엇인지 따위 말장난 생각장난 하지 않고 그냥 걷는 거죠. 말 그대로 하염없이. 지난해 옐로우스톤국립공원의 들판을 걸을 때 지평선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밥 먹는 것도 귀찮고 텐트 치고 자는 것도 번거롭다. 그냥 걷고 싶다. 너무 힘들어서 먹는 것도 귀찮거나 폴 꼽게 팩 박을 기운조차 없는 게 아닙니다. 걷는 게 너무 좋아서 그렇습니다. 중력을 거스르지도 않고 취재를 위한 메모를 빼면 기록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걸음걸음이 더할 수 없이 좋았거든요. 자 공구선생의 장난기 어린 조언대로, 이런 유혹이라면 기꺼이 넘어갈 만하지 않습니까?

걷다보면 그 양반이 좋아하는 김시습의 한시가 무슨 뜻인지 머리로 말고 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花開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 꽃이 피건 지건 봄이 어찌 상관하며, 구름이 가건 오건 산은 다투지 않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