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없는 선자령의 진객 ‘바람’…겨울 한복판에서 꺼낸 음반 3장
눈 없는 선자령의 진객 ‘바람’…겨울 한복판에서 꺼낸 음반 3장
  • 박성용 부장|사진 김해진 기자
  • 승인 2016.02.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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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CLASSIC

“선자령에 몇 번이나 갔지만 이렇게 눈이 없는 겨울은 처음이네.”
얼마 전 일요일 정기산행을 다녀온 산악회 선배는 포털 밴드에 허탈한 후기를 올렸다. 나도 이보다 앞선 일주일 전에 선자령을 갔지만 아름다운 설경은 없고 을씨년스런 풍경만 펼쳐져 적잖이 놀랐다. 등산로를 몇 걸음만 벗어나도 허리춤까지 빠지던 눈은 응달에만 옹색하게 남아 있고 마른 흙먼지만 풀풀 날렸다.

▲ 좀처럼 보기 드문 눈 없는 선자령.

겨울 선자령에서 뽀드득거리는 눈길을 걷다가 울퉁불퉁한 흙길을 밟고 걷는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올 겨울 강력한 엘니뇨 현상이 엄습할 것이라는 기상예보가 실감이 났다. 빙벽을 손꼽아 기다리던 산꾼들도 얼음이 달리지 않아 애가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얼음맛을 보고 싶어 밤마다 크램폰의 열 두 발톱은 으르렁거리고, 아이스바일의 피크는 하얗게 날을 세웠다.

비록 풍성한 눈은 없었지만 겨울 선자령의 진객 바람이 백두대간 마루금을 온통 흔들어놓았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초속 19m의 차가운 북서풍이 선자령의 명성을 확인시켜주는 듯 꼭꼭 여민 옷깃을 파고들었다. 사나운 바람이 주둔하고 있는 선자령 일대의 황량한 목초지를 보자 비로소 겨울 한복판에 들어섰음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그러나 강풍 너머로 무심한 입춘이 다가오고 있다. 얼어붙은 계곡과 땅 밑에서는 어김없이 새로운 생명이 꿈틀대고 있을 터.

하산길에서 만난 ‘녹병정자기공동조사구’라고 적힌 낡은 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한참을 들여다봐도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뜻을 찾아보았다. 용어도 어렵지만 용어해설은 더 난해했다. 이 새초롬한 만남을 며칠 후에 졸시로 남겼다.


가뭄

평창 국유림 산길에서 만난
낡은 안내판

녹병정자기공동조사구

바람이 주석 달아주기만을 기다리며
한참 동안 서있었다

녹병…정자기공, 동조사구…
소리만 요란하지 바람도 문맹
건너편 목장에서는
양들도 침묵

흙먼지만 풀풀 날리는
정월 선자령

▲ 존 바비롤리 경이 지휘한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2번.
북구의 겨울판타지…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2번
핀란드 출신의 시벨리우스는 북유럽의 자연과 서정을 음악으로 풀어낸 작곡가이다. 2번 교향곡은 핀란드의 자연이 농후하게 느껴져 시벨리우스의 ‘전원교향곡'으로 불린다. 2악장 안단테 마 루바토는 겨울 밤하늘에 넘실대는 북구의 오로라를, 연이어 연주하는 3, 4악장 비바치시모-알레그로 모데라토는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와 울창한 침엽수림을 연상케 한다. 존 바비롤리 경이 지휘한 로열필하모닉은 디테일하면서도 웅장하게 북구의 서정을 그리고 있다.


▲ 프리드리히 그림이 인상적인 에밀 길렐스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음반.
두렵고도 적막한 얼음산… 가스파르 프리드리히 ‘빙해’
이 음반은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의 명성도 한몫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재킷 사진이 더 끌린다. 이 그림은 19세기 전반기에 활약한 독일 낭만풍의 화가 가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빙해’다.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대자연의 위용을 화폭에 담았는데, 적막한 기운이 맴돈다. 원본 그림 오른쪽에는 얼음더미에 갇힌 난파선이 있지만, 음반 표지에는 이 부분을 트리밍하였다. 음반에 수록된 베토벤의 소나타 ‘발트슈타인’ , ‘고별’ , ‘열정’ 등 3곡하고도 잘 어울린다.

▲ 지안 왕의 첼로 연주가 돋보이는 브람스 피아노삼중주 제1번.
“괜찮다 괜찮아” 첼로의 음성… 브람스 피아노삼중주 제1번
브람스 피아노삼중주 1번은 보자르삼중주단, 수크삼중주단 등 명연주가 즐비하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선율로 가득 찬 브람스 초기 작품으로 부담스럽지 않게 들을 수 있다. 통상 삼중주는 피아노가 중심 역할을 맡지만 피르스, 뒤메이, 지안 왕이 호흡을 맞춘 이 음반은 중국인 지안 왕의 첼로 연주가 돋보인다. 지안 왕은 3악장 아다지오에서 따뜻하고 섬세한 선율을 들려준다. 눈 없는 선자령에 실망한 내게 낮은 목소리로 “괜찮다 괜찮아” 하는 것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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