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트재에서 바라본 벌교. 너른 중도방죽 너머로 벌교 안통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진트재~중도방죽~벌교읍내~홍교~소화다리~태백산맥문학관…도보 4~5시간 코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벌교는 그저 꼬막의 고장이다. 그렇지만 이 작은 고장에는 근현대사의 비극이 있고 애환이 서려있다. 육로와 해로가 통하는 벌교 땅은 일제가 수탈의 기지로 삼은 고장이다. 사람이 모이고 돈이 흐르고 좌·우익의 대립이 살벌하던 벌교의 한 시대를 조정래 작가는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담아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과거의 모습이 아스라이 남아있는 벌교 땅, 소설 속 무대를 찾아 그 품속으로 들어갔다.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의 시작은 진트재다. 진트재에 서면 벌교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소설의 시작과 끝이 되는 장소. 진트재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순천 사람들은 금치재라 하고,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진텃재, 진톳재라고도 부른다. 진톳재라는 이름은 불교적인 용어로 재 안쪽은 극락세계, 바깥쪽은 사바세계라는 의미다. 여기서 극락세계는 벌교를 가리키는데, 실제 재에서 바라보면 존제산(703m)과 제석산(563m), 두방산(489m)이 감싼 벌교는 포근한 어미의 품에 안긴 듯 아늑하기만 하다.
▲ 염상구와 땅벌이 결투를 벌였다던 철다리. 과거에는 이 다리를 지나 벌교 안통으로 드나들었다. |
보성군청 소속의 김옥자 문화해설사는 진트재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강조했다. 특히 좌익세력인 하대치와 안창민이 반란을 위해 군수품을 탈취하는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긴박한 장면으로 손꼽힌다.
“조정래 선생님은 벌교의 지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어요. 재 밑으로 보이는 경전선 철길이 평지로 보이지만 사실 오르막이거든요. 하대치 일당은 터널 입구를 돌로 막고 오르막에서 속도를 낮추는 광주발 여수행 열차를 세워 군수품을 탈취했습니다.”
일제가 육성한 고장, 벌교
소설 <태백산맥>은 벌교를 중심으로 광복 후 좌·우익의 이념적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그 중심에 있는 벌교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계획적으로 육성시킨 도시로 발전과 더불어 슬픔의 역사가 서려있는 땅이기도 하다. 당시 이 지역의 경제 중심은 보성이었지만 바닷길이 가까운 벌교는 공출한 곡물을 일본으로 보내기 쉬운 장소였다.
▲ 일일이 손으로 메워 만든 간척지 중도방죽. 포구를 따라 갈대가 가득했다. |
<태백산맥> 4권에서 중도방죽을 메웠다던 노인은 당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이렇게 회상했다.
‘워따 말도 마씨오.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헌 개 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 돼지 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 이제라. 옛적부터 산몬뎅이에 성 쌓는 것을 질로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 아무리 심든다 혀도 워찌 뺄밭에다 방죽 쌓는 일에 비허겄소…’
갈대가 무성한 포구를 따라 방죽을 되돌아 나오니 소설 속 염상구와 깡패두목 땅벌이 결투를 벌이던 철다리가 보였다. 둘은 철교 중앙에 서서 ‘누가 기차가 더 가까이 올 때까지 버티나’를 대결했다. 결투의 결과는 염상구의 승리. 결투에서 패한 땅벌은 부하 몇 명의 감시 속에서 고리짝만한 크기의 가방 하나를 들고 광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소설의 주무대인 벌교 읍내
▲ 지금도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농민상담소. 과거의 금융조합건물이다. |
▲ 벌교 읍내 중앙에 자리한 벌교역. 소설 속에서는 염상진의 목이 벌교역 앞마당에 사흘간 효수되었다. |
“저 앞으로 보이는 순천약국 골목이 가장 번화한 길이었어요. 벌교역이 생기고 외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남원장·남도장 등 여관들이 속속 생겨난 골목이죠. 그 옆으로 홍등가도 많았어요.”
과거 본정통 골목은 쇠락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났다. 바로 옆에 더 큰 도로가 생겼으니 과거의 여관도 술집도 이제는 거의 문을 닫은 것이다. 그나마 원형 그대로 남아있던 남도여관도 얼마 전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해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 지금은 쇠락했지만 과거에는 본정통이었던 골목이다. 남원장과 남도장을 비롯해 홍등가들이 줄지어 있던 자리다. |
벌교여중을 지나자 왼쪽으로 붉은 벽돌집인 옛 금융조합 건물이 보였다. 지금은 농민상담소로 쓰이고 있지만 과거의 건물을 원형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일본식 건축 양식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농민상담소에서 청년단 터를 지나 벌교공원으로 가는 길. 허름하지만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골목은 벌교 사람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이다. 좁은 골목은 미로처럼 복잡했다. 이정표도 없어 초행자들은 주민들에게 물어보지 않고는 공원을 찾기 힘들 듯 싶었다. 인가가 끝나는 지점에서 언덕을 따라 10분쯤 걸어 올라갔을까? 벚꽃 만발한 벌교공원이다.
소설 속에서 계엄사령관 심재모는 벌교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공원에 종합지휘소를 꾸미고 성능 좋은 소총의 이름을 따 M1고지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 사람들은 ‘엠원’이라는 외국말이 낯설 수밖에 없었으니 그냥 ‘에망고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질펀하게 시체가 널려있던 소화다리
▲ 보물로 지정된 홍교. 빨치산들이 빈농들을 위해 쌀가마를 내다 놓았던 자리다. 과거의 다리와 복구된 다리가 이질적이다. |
홍교를 건너 포구를 가로지르면 ‘김범우의 집’ 이정표가 보인다. 양심적 지주로 표현된 김범우의 집은 대지주의 집답게 어마어마한 돌담이 둘러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절대 안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높고 튼튼한 돌담이다. 하지만 집 안에 들어가자 담은 허리춤에 닿을 만큼 낮아졌다.
“이따 볼 현부자집이 일본식 건축양식을 많이 차용한 것에 반해 김범우의 집은 전통적인 한옥의 형태를 띠고 있어요. 사실 이 집은 조정래 선생의 친구 집이었다고 해요. 설탕 가루를 솔솔 뿌린 누룽지 튀김을 얻어먹으려고 이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 전통적인 한옥의 형태를 띠고 있는 대지주 김범우의 집. |
사실 소화다리는 벌교에서 가장 슬픈 장소다. 여순사건 때는 다리 밑으로 던진 시체들에서 나온 핏물이 소화다리 아래부터 홍교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후에는 인민재판의 학살장으로 악용된 장소이기도 하다. 굴곡 많은 소화의 인생처럼 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슬픈 인생을 마감하던 다리는 지금도 여전히 ‘소화’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조정래 작가가 살았다던 고택을 지나 아담한 교회당 회정리교회를 찾았다. 소설에서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곳이다.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교회당은 과거 야학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장소로 남아있는 셈이다.
<태백산맥> 문학길 트레킹의 마지막 코스는 태백산맥문학관이다. 2008년에 개관한 문학관은 <태백산맥>의 문학적 성과를 기리기 위해 설립된 공간으로 소설 전 권의 육필원고와 취재수첩, 작가의 메모 등이 전시돼 있다.
▲ 으리으리한 대궐집 현부자집. 대지주이자 읍내에 있는 남도여관의 주인이다. |
문학관 밖에는 소화의 집과 현부자집이 새롭게 지어져 관광객들을 맞아한다. 소화의 집은 현부자가 별장을 신축하면서 전속 무당이나 다름없는 월녀와 그녀의 딸 소화가 거처할 집을 마련해 준 것으로 방 셋에 부엌 하나가 딸린 작은 집이다. 아담한 소화의 집과 달리 바로 옆 현부자집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으리으리하다. 한옥을 기본으로 곳곳에 일본식을 가미한 것이 같은 대지주지만 김범우의 집과는 대조적이다.
“이 집은 풍수적으로 명당터라고 합니다. 소설 속에도 묘사돼 있듯이, ‘그 자리는 더 이를 데 없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였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으리으리한 현부자집을 마지막으로 <태백산맥> 문학길 트레킹을 마무리했다. 벌교 땅이 한 눈에 보이는 진트재에서 시작해 소설 속 주무대인 벌교읍내와 아픔의 장소인 홍교·소화다리를 걷는 동안 마치 소설 속 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마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벌교 땅에 과거의 흔적들이 아스라이 남아있기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