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성의 매력에 빠지다…남한산성길
겨울, 산성의 매력에 빠지다…남한산성길
  • 이지혜 기자|사진 양계탁 기자|게스트 안경혜
  • 승인 2016.02.03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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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MUT PERFORMANCE ①TREKKING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에 이어 이번 달도 산성이다. 병자호란의 아픔을 지켜본 한양의 수호 성이 가고 싶었다. 경기도에 있는 남한산성에 가기로 했다. 겨울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역사를 가깝게 느낄 수 있고 코스 또한 쉬워 가족 단위로 가기 적당한 곳. 아름답고 유쾌한 경혜 씨와 겨울 산길을 걸었다.

그깟 눈이 뭐라고
사실은 눈이 와야 했다. 예정된 일정은 강원도 발왕산 백패킹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눈을 퍼내고, 텐트를 치고, 겨울 입김을 호호 내뿜은 그림. 발자국 하나 없이 쌓인 눈을 헤치고 내려오는 산악 스키의 아찔함. 아, 이 얼마나 겨울다운지. 계획은 어긋나야 계획인가. 무릎까지 오는 눈은커녕 1cm도 눈을 내려주지 않는 하늘이 야속하길 일주일. 첫 겨울 백패킹이 두렵기만 하던 감정도 마감의 무서움보다 클 순 없었다. 더는 미룰 수 없다. 대안을 찾아야 했다. 요즘 산성에 제대로 꽂혀서 일까. 또 보이는 건 산성길이다.

그래, 그깟 눈이 뭐라고. 안 되면 눈 스프레이라도 가져가서 뿌려야지 뭐. 어차피 이렇게 된 것, 가고 싶던 곳에 가자. 산악스키를 짊어지고 함께 백패킹가려 했던 모글스키 선수 안경혜 씨는 고맙게도 바뀐 일정에 흔쾌히 함께 해주기로 했다.

목적지는 가까운 남한산성이다. 서울과 하남, 광주 경계에 걸쳐있는 남한산성은 접근이 쉽고 대중교통으로도 충분히 닿을 수 있어 방학을 맞은 아이와 함께하는 곳으로 적당하다. 하얀 겨울 왕국 대신 산성길을 선택한 건 등교보다 출근이 익숙해진 내게 ‘방학’이라는 키워드가 신선해서였다. 이번만큼은 아이의 눈으로 걸어봐야겠다.

경혜 씨, 예쁜 경혜 씨
2월호부터 함께 하기로 한 경혜 씨는 모글스키 선수다. 스키 대회에서 입상도 여러 번. 일과 취미의 간극이 너무 큰 나머지 아웃도어 활동에 갈증을 느꼈다는 그녀는 다음 달부터 일과 취미를 함께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스키 외에도 자전거, 골프, 등산 등 다양한 운동을 즐기는 멋진 여자다.

반면 운동이라곤 동네 뒷산만 타다 이제야 등고선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잘 부탁합니다”를 연신 내뱉었다. 응당 내가 안내하고 리드해야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녀의 경험치가 나보다 높은 것을 느꼈다.

조그마하고 예쁘장한 얼굴에 비해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의 경혜 씨는 매우 활달했다. 사진을 찍는 내내 연신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몸을 사리지 않는 포즈로 나와 사진기자를 놀라게 했다. 경혜 씨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겨울 산성을 가득 메웠다.

기자님, 몇 살이죠?
서른둘이요.
아!
왜 그러세요?
저와 같을 줄 알았어요.
하핫! 머리를 볶아서 그런가!! 하하핫…!!!

경혜 씨는 나보다 조금 언니다.

전멸의 아픔을 간직한 북문
본격적으로 산성에 오르기 전, 우리는 행궁부터 둘러봤다. 행궁은 임금이 궁궐 밖을 행차해 머무는 별궁이다. 이곳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으로 불렀다. 지리적으로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인 만큼, 위급한 상황이 되었을 때 나라를 통치할 수 있도록 종묘와 사직까지 갖춘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가 47일 간 머물렀던 이곳은 숙종, 영조, 정조가 여주 영릉에 참배 갈 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할만큼 다른 행궁보다 자주 사용됐다. 행궁은 남한산성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는 곳이다. 한남루와 외행전, 내행전, 재덕당, 좌승당, 좌전, 우실 등 다양한 유적을 만나 볼 수 있다.

행궁을 나온 뒤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됐다. 먼저 북문으로 올라가 반시계방향으로 걷는 것을 추천한다.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이 많고 거리가 짧지만 사대문을 다 만날 수 있는 코스기 때문이다.

북문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의 전승문이라고 불렀다. 병자호란 때 성문을 열고 나가 전투를 치른 유일한 문이다. 총을 든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나가 청나라 군사를 공격했지만, 적의 유인작전에 말려 총을 쏘아보지도 못하고 전멸한 아픔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승문은 그 기억을 잊지 말고 언제나 승리하자는 각오가 깃들어져 있다.

만난다는 것
날씨가 심상치 않다. 1cm 정도의 눈 예보가 있었는데, 눈이 오기 직전이라 그런지 날씨는 금세 영하 8도를 찍었다. 손끝이 시렸다. 다정한 경혜 씨는 트레킹 내내 내 손을 주물러 주기도 하고, 날이 춥다며 안아주기도 하고, 미끄러운 곳에선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처음 만나는 사이에도 스스럼없는 경혜 씨가 부러워요.
운동을 하다 보면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돼요. 자연스레 성격이 활달해졌죠.

빼도 박도 못 하고 서른 줄에 걸린 두 여자가 만나면 하는 이야기는 으레 비슷하다.

경혜 씨, 연애는 안 하세요?
쉽지 않네요.
예쁘고 성격도 좋아서 운동하시며 많이 만날 것 같은데.
그런데 운동하며 만나는 사람과는 힘든 점이 있어요.
오래 운동해서 거의 모든 사람을 알고, 워낙 좁아서 그런지 위험 부담도 크죠.
기자님은 어때요?
사실 제가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 했던 직업군이 기자에요.
그런데 기자를 만나고 있죠.
그러고 보면 인연을 만난다는 건 예상을 벗어나기 마련이에요.
사람일은 참 몰라요. 그렇죠?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트레킹 끝나고 떡볶이 어때요?

드디어 만났네, 눈
곧 서문이 나타났지만 안타깝게도 공사 중이었다. 천막에 가려져 있었지만, 규모와 위용을 쉽게 감출 순 없었다. 날이 춥다. 곧 눈이 내릴 것 같다. 아이젠이 없는 발에 힘을 실었다. 얼마 안 가 남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남한산성의 하이라이트인 수어장대를 만났다.

수어장대는 전투 시 지휘하기 편한 지점에 세운 장수의 지휘소였다. 그러다 보니 성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설치했다. 수어장대 주변은 햇빛이 잘 비치고 주변에 샘물이 있어 나무가 크게 자라고 있다. 담장 안으로는 360년 된 향나무 한 그루가 시간을 고이 품고 우리를 맞이했다.

수어장대를 조금 더 지나면 남한산성의 성문 가운데 가장 크고 웅장한 남문을 만난다. 조선 정조 때 성곽을 보수한 남문은 사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데, 남문 앞에는 350년 된 느티나무가 오고 가는 사람을 지켜보며 역사의 증인으로 서 있다.

남문을 통과하는데 드디어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야속했다. 애타게 바랄 땐 오질 않고, 아이젠도 없이 떠난 오늘 같은 날 온다. 쉽게 지나갈 것 같던 눈구름은 예보보다 오래 있었고, 마지막 코스인 동문으로 가는 길엔 세상이 점점 하얗게 변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선 1년에 눈을 한 번 보기도 힘들다. 어쩌다 눈이 코팅지처럼 쌓이기라도 하는 날엔, 모든 학교가 휴교됐을 정도다. 제설작업도 체계적이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 내겐 서울 생활이 몇 년 지난 지금도 눈은 항상 새롭고 낯설다. 쌓이는 눈에 덜컥 겁부터 났다.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지 마
와, 드디어 눈이 와요!

반면, 경혜 씨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가워했다. 스키선수라 눈에 익숙한가 보다 하는 생각도 잠시. 아이의 눈으로 트레킹을 해보겠다던 시작이 생각났다. 오늘 가야 할 코스가 얼마나 남았는지, 해가 지기 전에 다다를 순 있을지, 돌아가는 길이 멀진 않을지, 예상보다 많이 쌓이는 눈에 가다가 넘어지진 않을지. 나는 무의식중에 또 내 안의 걱정 인형을 꺼내고 있었다.

내 걱정 인형이 무색하게 우리는 안전하게 트레킹을 마쳤다. 마지막 문인 동문까지 내려오는 길엔 발자국이 선명해질 정도의 눈이 쌓였다. 하지만 눈이 내리고 나니 오히려 코끝 시리던 공기는 훈훈해졌다. 병자호란의 아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로 인한 천주교인들의 아픈 역사가 담긴 동문 역시 한참 공사 중이었다.
사실 방학에 가족과 즐긴 문화유산에 대한 기억은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합천 해인사를 가려던 우리 가족은 꽉 막힌 왕복 2차선 길에서 터무니없이 시간을 낭비했고, 아빠의 버럭과 동시에 과감한 유턴으로 돌아왔다. 그게 가장 인상적인 기억이다.

그때 만일 해인사에 도착했어도 나는 잘 기억하지 못했을 거다. 아름다운 산세와 절의 자취는 어린 내게 큰 감흥이 없었을 거다. 그래서 그곳이 해인사였든, 2차선 도로 위의 비번 택시 안이었든, 상관없었다. 내 기억 속 그날엔, 가족이 함께였다.

얼마나 오래 기억할 수 있을까. 엄마, 아빠와 쉽게 올 수 있는 남한산성. 힘들지 않은 산책과 느릿느릿 걷다 보면 성실히 나와 주는 웅장한 역사의 자취. 가족이 함께하는 맛깔나는 점심. 아빠의 셔터 소리, 엄마와 동생의 말소리. 이번 방학엔 이곳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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