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모랑마 그리고 휴먼원정대
초모랑마 그리고 휴먼원정대
  • 오대진 기자|사진 아웃도어 DB
  • 승인 2016.01.19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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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람들의 휴먼스토리 1

<히말라야>가 개봉했다. 휴먼원정대의 실화를 영화화했다. 영화는 재미와 감동을 위해 극화된다. 등정과 조난, 사망과 구조의 실제 이야기는 어땠을까. 산사람들의 휴먼스토리는 또 있다. 휴먼원정대를 비롯해 믿기지 않는 휴먼스토리 세 편을 석 달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휴먼원정대는 2005년 5월 에베레스트를 찾은 원정대다. 감동적이면서도 가슴 아픈 사연을 갖고 있는. 이야기는 한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5월 18일 오전 10시 10분, ‘2004 계명대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등반대장 박무택은 세계의 지붕(8,850m)에 우뚝 섰다. 아직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인 후배 장민과 함께. 박무택은 1996년 가셔브룸2(8,035m)에 오른 이후 8,000m급 정상만 무려 다섯 개, 에베레스트는 두 해 전인 2002년에 이미 오른 바 있는, 한국 산악계를 이끌 차세대 주자였다. 장민 역시 스물두 살 되던 해인 2000년에 시샤팡마(8,027m)와 초오유(8,201m)에 오른, 어리지만 만만치 않은 경력을 가진 신예였다. 초조하게 두 사람의 소식을 기다리던 저 아래 6,400m 지점의 ABC(전진캠프)는 박무택의 무전기를 통해 전해진 “여기 정상입니다!” 한 마디에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대구 계명대학교 개교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떠나온 산악부 OB와 YB는 에베레스트가 떠나가도록 함성을 질렀다.

“상황이 안 좋습니다”
환희는 오래가지 않았다. “장민이가 탈진했습니다!” 이번에도 박무택의 무전이었다. 위치는 정상 아래 에베레스트 북동면에서도 가장 험난한 암벽 구간인 세컨드스텝(8,600m) 위였다. 얼음과 바위가 뒤섞여 있어 등반이 곤란하고 심지어 그 아래턱은 오버행Overhang(암벽이나 빙벽의 일부가 처마처럼 튀어나온 부분)이었다. 다시 박무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황이 안 좋습니다. 설맹이 옵니다. 앞이 안 보입니다.” 절망적이었다.

끔찍한 조난 상태에 빠진 그들 주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함께 정상에 올랐던 셰르파는 이미 하산한 뒤였다. 박무택은 결단을 내렸다. “민아, 너 먼저 내려가라.” 눈시울이 붉어진 장민은 혼자 갈 수 없다며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박무택의 결단은 확고했다. “야 이 새끼야, 여기 있으면 우리 둘 다 죽어! 너라도 빨리 내려가! 내려가서 구조대를 올려 보내야 될 거 아냐!” 박무택은 그렇게 후배 장민을 먼저 내려 보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 천지에 얼음보다도 차가운 바람만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산소통 계기판의 바늘도 0을 향해 가고 있었다.

움직이는 것을 포기한 박무택은 비박을 감행했다. 이 때 시각이 오후 3시. “더 이상 못 움직이겠습니다…. 비박을 해야겠습니다.” 그로부터 40분 후, “고통스럽습니다…. 못 견디겠어요…. 산소가 없어요…. 숨을 못 쉬겠어요….” 박무택과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오후 1시경에 먼저 내려보낸 장민으로부터도 연락이 끊겼다. 장민에게는 무전기가 없었다.

절망에 빠진 ABC는 20여 개의 외국 원정대들을 직접 찾아가 구조 활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탈리아 원정대와 셰르파가 사고 지점으로 급파되기도 했지만 현장에 도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이 그를 구하러 올라갔다. “내가 가서 무택이를 데려올게!” 같은 원정대의 부대장 백준호였다.

탈진한 채로 설맹에 걸려 해발 8,750m 부근에 고립되어 있는 사람을 홀로 구조하러 간다? 이성적으로는 옳지 않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백준호와 박무택은 이성적 판단이 침범할 수 없는 사이. 산 속에서 수많은 밤을 함께 보낸 산악회의 후배였고, 술자리에서 수많은 잔을 함께 기울인 정겨운 동생이었다. 그리고 2004년 5월 18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백준호는 한국 등반사상 가장 외롭고 고독한 등반을 해냈다. 오직 박무택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에베레스트의 최난구간 세컨드스텝을 홀로 돌파해냈다. 이튿날 새벽 6시경 백준호의 목소리가 ABC로 들려왔다.

“대장님, 무택이 만났습니다! 상태가 안 좋습니다! 밤새 무산소에 노출되어 손과 코에 동상이 심합니다. 완전 탈진 상태입니다! 저도 체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동상 정도와 장민의 소식을 되물었지만 백준호의 목소리도 이미 기력이 쇠잔해 있었다. “장민이는 못 봤어요. 지금 2도 동상인데 조만간 3도로 진행될 것 같아요!” 절망적이었지만 그보다 시급한 것은 두 사람의 생환뿐이었다. 그러나 백준호도 마지막 목소리를 남기고 연락이 두절되었다. “여기가 8,700m가 넘어서 구조가… 구조가 어렵습니다….”

세븐 서미트Seven Summits(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르는 것)의 일환으로 에베레스트를 찾았던 여성 산악인 오은선이 사고 지점을 향해 출발한 것은 5월 20일 새벽이었다. 세컨드스텝을 오른 직후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서보니 누군가가 고정 자일에 매달린 채 비스듬히 눕다시피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은선은 소속팀 원정대장에게 최후 판결문과도 같은 정식 보고를 올렸다. “무택이 시신을 발견했어요…. 고정 자일에 묶인 채 숨져 있어요…. 준호는 안 보입니다.”

“무택이는 그렇게 죽을 놈이 아니야!”
엄홍길이 박무택의 조난 소식을 들은 것은 얄룽캉(8,505m)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뭐라고? 무택이가 어쨌다고? 무택이가? 나랑 같이 다니던 그 계명대 박무택이가?” 그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어찌할 도리가 없어 혼잣말처럼 떠들어댔다. “기다려봐! 무택인 안 죽어! 지금 그냥 무전이 안 되는 것뿐이라구! 무택이 걔는 그렇게 죽을 놈이 아니야! 그놈이 얼마나 강하고 끈질긴 놈인데…!”

엄홍길과 박무택의 인연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계명대 산악회가 히말출리(7,893m) 원정대를 꾸려 떠났을 때, 엄홍길은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빌라 에베레스트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은 첫 만남을 가졌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이후 등반 파트너로서 2000년 칸첸중가(8,586m)와 K2(8,611m), 2001년 시샤팡마, 2002년 에베레스트를 함께 올랐다. 박무택이 조난당하기 훨씬 전부터 엄홍길은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있다. “무택이는 나한테 등반 파트너 이상이에요. 그놈은 내 친동생이나 다름 없어요.”

시작은 계명대 산악회 OB, 그 중에서도 맏형격인 손칠규였다. 쉽지는 않았다. 계명대 산악회 OB로는 구성에 한계가 있었다. 손칠규는 엄홍길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 결과 장헌무와 박창수 등 국내 베테랑 산악인들이 합류했다. 목표는 시신의 위치가 확인된 한 사람(박무택)과 실종된 두 사람(백준호와 장민)을 모두 찾아내어 그들을 적어도 베이스캠프까지 후송하는 것이었다. 국내외 산악계의 중평은 ‘불가능하다’는 쪽이었다. 8,750m는 세계 제2위봉인 K2보다도 더 높은 곳이다. 세계적인 전문가들 역시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목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휴먼원정대가 결성되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정식 원정대원으로 참여하게 된 사람은 모두 18명이었다. 엄홍길, 손칠규, 고인경, 정오승, 박근영, 이길봉, 장헌무, 전경원, 김인환, 김동민, 임채유, 이원영, 박창수, 송인혁, 이춘근, 김세준, 오종택, 심산이 그들이다. 산악계의 전설부터 계명대 산악부 동기와 후배들에 베테랑 언론인까지. 세계 등반역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을 위해 휴먼원정대원들이 모였다.

대원이 확정된 원정대는 눈 내리는 팔공산과 한라산에서 혹독한 등반 훈련을 감행했다. 그러나 실제로 모의 훈련을 실시해보니 적잖은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세컨드스텝의 절벽을 시신 수습용 들것을 들고 오르내리는 일은 풀 수 없는 수학 문제처럼 난해했다. 그리곤 새로운 평가와 제안이 끝없이 이어졌다.

휴먼원정대는 2005년 3월 14일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네팔 루크라 공항에 도착한 원정대는 본격적인 등반에 앞서 임자체를 오르기로 한다. 팍딩(2,750m)에서 임자체 베이스캠프(5,200m)를 거쳐 그 정상(6,189m)에 이르는 과정이다. 첫 번째는 고소적응을 위해, 두 번째는 2004년 계명대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바로 이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대원들의 고소증세가 심각해진 것. 가장 젊어 힘을 제대로 쓸 것 같았던 대원들이 밥도 못 먹고 걷지도 못하고 구토까지 해댔다. 직전해에 7,000m급 등반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해도 올해 5,000m도 안 되는 곳에서 퍼질러 앉게 만드는 것이 고산병이다. 하산해야만 하는 대원들이 하나둘씩 늘었다. 산사람에게 하산 조치는 곧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지만, 고산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유일한 치료방식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고소적응 훈련을 마쳤다. 그리고 외쳤다. “가자 이제, 초모랑마로!”

네팔의 코다리에서 티베트의 장무(2,750m)까지 군용헬기를 타고 이동한 휴먼원정대는 다시 캐러밴을 타고 니알람(3,700m)을 거쳐 딩그리(4,200m)로 향했다. 그리고 2005년 4월 7일 오후 2시, 당초 계획보다 3일 빠르게 초모랑마 베이스캠프에 입성했다. 초모랑마는 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이름이다. 대지의 여신이란 뜻으로 네팔에서는 사가르마타로 불러왔으며 중국에서는 주무랑마라고 부른다.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은 히말랴아 봉우리에 대한 삼각측량을 실시, 지구 위에서 가장 높은 산임을 확인한 영국군 측량장교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제 베테랑 셰르파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휴먼원정대 등정을 시작한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게 4월 7일, 그리고 그곳을 떠난 날은 6월 5일이다. 베이스캠프와 ABC를 오가며 보급품을 챙기고 전열을 가다듬는 지루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8,300m의 캠프 3까지 140개가 넘는 산소통을 옮겼고, 정상 부근의 가파른 암벽 구간인 퍼스트스텝, 세컨드스텝, 서드스텝에는 장헌무와 박창수가 약 4km에 달하는 고정 자일을 깔았다. 4월 19일에는 캠프 1(노스콜, 7,100m) 캠프 구축을 완료했고, 그 이튿날에는 필요한 물량을 그곳까지 모두 옮겨 놓았다. 노스콜에 올라서면 그 위의 캠프 2와 캠프 3 그리고 초모랑마의 정상이 빤히 올려다 보였다. 일주일 내에 캠프 2와 캠프 3을 설치하고 나면 곧바로 치고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날씨가 도와주질 않았다. 강풍에 이를 악물고 캠프 2까지 전진했지만 목표량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반의반도 안 되는 물량만 운반해놓았을 뿐 제대로 된 텐트 하나 쳐놓지 못한 상태였다.

디데이는 5월 17일이었다. 3일 전에 받은 기상 자료로는 그날 8,000m 위에는 초속 2m 정도의 바람이 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BBC와 NASA로부터 받은 최첨단 과학 자료도 이곳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당일 체감한 바람의 세기는 20m 이상이었다. 노스콜로 철수한 장헌무는 “형님,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어! 올라간다고 해도 텐트를 못 쳐! 이건 아예 태풍이야, 태풍…! 정말 환장하겠어….”라며 쉬어 터진 목소리로 소식을 전해왔다. 18일도 마찬가지였고, 19일에는 노스콜 이상에서 머물던 모든 대원들이 ABC로 철수했다. 휴먼원정대는 절망했고, 허망하게 주저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풍경 좋고 양지 바른 돌무덤
마지막으로 디데이를 잡았다. 5월 29일. 새벽에 캠프 3을 출발, 두 팀으로 나눠 시신 수습 작업에 돌입한다. 새벽 3시경 셰르파들로 구성된 선발대가 출발, 새벽 4시에는 엄홍길이 올라갈 채비를 했다. 선발대원들이 발견한 박무택은 눈 속에 거의 파묻혀 있다시피 했다. 눈 밖으로 나와 있는 그의 머리와 팔을 잡아끌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장님, 무택이가 완전히 얼어붙어 있어서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엄홍길은 단호하게 답했다. “떼어내야 돼! 무택이를 거기에 내버려둘 수 없어! 피켈로 얼음을 깨라! 조심해야 돼, 시신이 손상되지 않도록!” 해발 8,750m 위에서 힘겹고도 지루한 작업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박무택의 시신을 얼음덩어리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는 데만 무려 3시간이 걸렸다. 시신을 분리해냈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돌출된 시신의 각 부분들이 들것을 무력화시켰다. “대장님, 구조낭에 무택이를 넣을 수가 없어요!” 엄홍길은 비통한 목소리로 답했다. “…… 그냥 자일로 묶어서 내려와라!” 세컨드스텝을 주저 없이 올라간 엄홍길은 서드스텝 바로 밑에서 박무택을 만났다. “무택아… 무택아… 무택아….” 엄홍길은 얼음덩어리로 변해버린 박무택을 부여안고 하염없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울음소리가 초모랑마에 넓고 깊게 울려퍼졌다.

박무택의 시신을 운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음덩어리로 변한 박무택의 시신은 100kg은 족히 넘을 듯했다. 대원들이 전부 달라붙어 두 시간 이상을 운구했지만 이동 거리는 고작해야 100m에 불과했다. 설상가상으로 기상까지 급격히 악화되었다. 캠프 3까지 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이대로라면 또 다른 조난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엄홍길의 뇌리에 한 장소가 떠올랐다. 네팔 쪽 풍경과 티베트 쪽 풍경이 모두 내려다보이고 해가 하루 종일 드는 곳이었다. “조금만 더 가자! 내가 봐둔 장소가 있다! 무택이를 거기다 묻고 돌무덤을 쌓아주자.” 해가 드는 곳에 도착한 대원들이 돌무덤을 쌓기 시작했다. 베이스캠프에 소식을 전하던 엄홍길은 울고 있었다. “네팔 쪽하고 동쪽 보이는 능선 상에… 돌무덤을…. 무택이를 묻어주고….” 원정대장과 등반대장의 무전 통화는 각자의 베이스캠프에서, ABC에서, 노스콜에서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한 후 등반 시 함께 실종된 백준호와 장민을 찾고자 했으나 무리였다. 수습 과정에서 이미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부상자들도 속출했다. 두 사람의 실종 수색 작업은 결국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ABC 이상의 하이캠프들을 모두 철수하여 내려온 것은 6월 3일. 이튿날에는 이번 원정의 의미를 총결산하고 고인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는 위령제를 열었다. 그렇게 휴먼원정대의 휴먼스토리가 막을 내렸다. 세 산악인 박무택, 백준호, 장민. 부디 편히 잠드소서.

이상 휴먼원정대의 이야기는 실제 휴먼원정대에 참여한 심산 작가의 <엄홍길의 약속>을 참고했다. 이 책은 <히말라야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다시 발간되었고, 실화를 차용한 영화 <히말라야> 개봉에까지 이르렀다. 지난 12월 16일 개봉한 <히말라야>는 개봉 5일 만인 20일, 15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영화팬들을 초모랑마로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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