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스포츠가 텐트를?
잔스포츠가 텐트를?
  • 글 사진 ‘양식고등어’ 조민석 기자
  • 승인 2015.12.3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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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고등어’의 텐트 이야기 | 미국 잔스포츠

지난달 피엘라벤은 배낭 이야기가 반이 넘었죠? 자료를 찾다보니 재미가 있어서 그만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이번 호에 소개할 브랜드는 잔스포츠(Jansport)입니다. 또 배낭 브랜드라고요? 잔스포츠 역시 텐트를 만들었습니다. 바느질 기술도 괜찮았고, 원단 자체의 기능성도 괜찮았지요. 물론 잔스포츠의 텐트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디자인이었습니다. 빌 모스의 작품들에 비견할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공간의 활용성까지 복합적으로 고민한 흔적이 텐트에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배낭 이야기가 좀 많을 것 같긴 합니다.

▲ 1967년 잔스포츠가 공식적으로 출범할 당시 사용된 1세대 로고입니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산의 이미지는 이후 로고가 여러 세대를 거듭하여 변화하는 과정 중에 안드로메다로 사라져버렸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 1970년대 초에 발매된 잔스포츠 공식 카탈로그의 모습입니다. 마초 컨셉의 사진으로 눈치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잔스포츠는 당시 실험적인 카탈로그 사진으로 유명했습니다. 사진 속에 잔스포츠 3인방이 모두 숨어 있지요. 이름까지 완벽하게 맞추시는 독자분께 500원 드립니다. (농담) 밑에 있는 배낭은 약 350그램 정도 무게가 나가는 중형급 모델이었는데, 최대 적재하중은 15.8kg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물건이었지요.
배낭 디자인 하는 남자, 바느질 하는 여자

1960년대 중반, 스킵 요웰이라는 패기 넘치는 산꾼이 있었습니다. 피엘라벤을 설립한 오케 노르딘 아저씨처럼 배낭에 불만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알루미늄 소재를 사용한 배낭 프레임을 개발하기로 했죠. 한술 더 떠서 그의 사촌인 머레이 플레츠와 여자친구인 잰 루이스도 그 도전에 동참합니다. 사촌은 알루미늄 같은 자재를 다룬 경험이 많았고, 여자친구는 바느질 솜씨가 수준급이었지요. 제 여자친구도 이랬으면 합니다. 아, 농담입니다.

스킵 요웰이 배낭 시장에 뛰어든 것은 오케 노르딘보다 약 7년 정도 뒤입니다. 피엘라벤은 1960년도에 스웨덴에서 출범했고, 잔스포츠는 1967년도에 미국에서 출범했으니까요. 스킵 요웰과 그의 여자친구, 사촌. 이 3인방이 잔스포츠의 설립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습니다. 그들이 만든 알루미늄 백팩 프레임 시스템이 미국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차지했거든요. 당시에는 피엘라벤의 우드 백팩 프레임 시스템이 아직 미국 시장에 진출하지 않았습니다.

3인방은 백팩 디자인을 특허 출원하여 승인 받았습니다. 이 특허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잔스포츠의 백팩 디자인이 명맥을 이어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허 출원 성공을 계기로 다른 아웃도어 장비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스킵 요웰은 뜻을 함께 하고 있던 개국공신들과 힘을 합쳐 비밀 프로젝트를 기획합니다. 가장 먼저 도전한 장비가 바로 텐트였습니다. 스킵의 아내가 된 잔 루이스는 배낭을 만들면서 아웃도어 장비 제작에 필요한 바느질의 완성도를 꾸준히 높여왔고, 이는 잔스포츠의 도전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 잔스포츠가 1970년에 공식적으로 특허를 출원한 수십 종의 백팩 프레임 중 하나의 설계 도면입니다. 수십 종의 백팩 프레임을 특허로 출원시킨 것은 잔스포츠가 출범한 이후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카피품들에 여러 방식으로 대응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1970년에 공식적으로 출원한 특허 중에는 4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폭넓게 사용되는 캐주얼 백팩 프레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봤던 디자인 같습니다. 네. 우리나라에서도 중고생들이 사용하는 백팩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텐트 개발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이는 스킵의 사촌 머레이였습니다. 잔스포츠 최초의 텐트 디자인을 총괄한 사람도 머레이였습니다. 스킵이 텐트 전반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반영했고, 잔 루이스의 바느질은 이를 제품으로 현실화했습니다. 텐트는 출시 직후부터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돔 구조 텐트의 강성에 대한 검증이 사실상 끝났고, 이에 맞춰 완성도 높은 돔 텐트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으니까요.

첫 텐트의 이름은 마운틴 돔이었습니다. 이 텐트는 노스페이스에서 지오데식 돔 텐트 라인업을 선보인 1975년까지 인기를 이어갔습니다. 기간으로 환산하면 4년 정도입니다. 그 시간 동안 잔스포츠는 미국 내 텐트 시장을 주도했다는 뜻입니다.

▲ 뛰어난 구조적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대내외적 요소에 의해 빛을 보지 못했던 잔스포츠의 첫 텐트 모델입니다. 마운틴 돔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이 텐트는 노스페이스의 지오데식 돔 시리즈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돔 구조 텐트인데, 마운틴 돔이 과거의 타이틀을 찾는 일은 이제 요원해 보입니다.

▲ 잔스포츠의 카탈로그 이미지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된 실험 대상에서 텐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뒤집힌 텐트를 찍은 카탈로그 사진은 두고두고 잔스포츠를 접하는 산꾼들에게, 10대들에게 크나큰 센세이션이 되었지요. 텐트는 원래 저렇게 쓰는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아웃도어 브랜드 잔스포츠의 몰락

잔스포츠가 텐트 사업에 몰입하는 데에는 몇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몇몇 비주류 텐트메이커들이 마운틴 돔을 카피한 텐트를 앞다퉈 출시하는 바람에 공식적으로 텐트 구조에 대한 특허를 출원하는 데에 실패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잔스포츠의 텐트 개발 사업은 1990년대 들어 텐트메이커 왈루스에 외주형식으로 위탁생산 하는 형태로 바뀌었다가 1990년대 말에 끝나고 맙니다. 브랜드의 주력은 10대~20대의 학생들을 위한 캐주얼 백팩을 만드는 쪽으로 잡혀나갔고, 캐주얼 전문 브랜드인 다우니와 블루벨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미국 아웃도어 시장의 상당 부분을 독점하고 있는 VF 그룹의 자회사로 인수된 것이 가장 주요한 이유입니다.

잔스포츠는 충분히 아웃도어 장비 시장으로 그 저변을 넓혀 나갈 기술력과 잠재력이 있는 브랜드였습니다. 그런데 왜 실패했을까요? 잔스포츠가 VF 그룹의 산하에 들어가기 전과 후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VF 그룹 이전의 경우 잔스포츠를 인수하고 방출했던 두 그룹이 모두 패션/캐주얼 분야를 주력으로 하는 곳이었기에 수익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아웃도어 분야로 사업이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패의 주된 원인은 VF 그룹 합병 이후에 있습니다. VF라는 모기업 산하에는 노스페이스가 있거든요. 아웃도어 전문 브랜드로서 잔스포츠가 가지는 브랜드 파워가 노스페이스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밀렸다면, 모기업 입장에서는 아웃도어 시장 점유율이 높은 노스페이스를 확실하게 살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 잔스포츠는 캐주얼 백팩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실리적이었겠지요. 실제로 잔스포츠는 2000년 초반에 이스트팩을 인수합병하면서 미국 캐주얼 배낭 시장의 약 40%를 점유하게 되었습니다.

▲ 잔스포츠가 캐주얼 전문 브랜드인 도우너 사에 잠시 인수되었을 때 발행된 카탈로그입니다. 1970년대 후반인데, 더 과격해지고 대담해진 카탈로그 사진에 녹아 있는 실험정신은 배낭을 메고 싶어 하는 10대와 20대 같은 청소년층을 잔스포츠의 주요 고객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일조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지금의 잔스포츠는 1960년대의 잔스포츠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입니다. 아웃도어 마니아였던 머레이 플레츠는 1982년 회사를 떠났고, 잔 루이스는 2005년에, 스킵 요웰은 2011년에 각각 은퇴를 선언하고 회사를 떠났지요. 스킵 요웰은 2015년 10월 19일에 그의 사촌과 아내를 뒤로 한 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웃도어 브랜드의 역사와 철학에 대해 늘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지면을 빌어 그에게 애도를 전합니다.
사람을 위한 배낭을 만들겠다고 항상 강조하던 그들이 잔스포츠라는 브랜드에 불어넣었던 초기의 기조가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빛이 바랜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머레이가 아웃도어 장비 개발 사업을 끝까지 고집 있게 밀어붙였다면 잔스포츠가 오늘날 어떤 아웃도어 브랜드가 되었을지도 궁금합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요. 그게 현실입니다. 냉혹하기 그지없는.

내년에는 더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내년에 다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1970년대 후반에 잔스포츠에서 마운틴 돔의 후속으로 출시되었던 트레일웨지 모델입니다. 심실링이나 구조적 강성 등 기본적인 요소에는 충실했지만 노스페이스의 지오데식 돔 시리즈가 시장을 휩쓸던 당시의 대외적 환경에서 트레일웨지가 성공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 잔스포츠 설립 이후 1990년대까지 회사 내에서 이른바 ‘바느질의 여왕’으로 통했던 잔 루이스입니다. 1979년 카탈로그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사진입니다. ‘바느질의 여왕’이라는 별명은 제가 지었습니다.


▲ 미국 캐주얼 백팩 내수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잔스포츠가 오늘날 런칭하고 있는 캐주얼 백팩들입니다. 프레임 디자인은 거기서 거기 같은데, 단순해 보여도 실제로 사용해 보면 단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제품의 종합적인 완성도가 우수하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원단 디자인은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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