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까지 물드는 낙조 보러 오시겨”
“가슴까지 물드는 낙조 보러 오시겨”
  • 이슬기 기자
  • 승인 2015.12.26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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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들길① | 7코스 ‘갯벌 보러 가는 길’

매일 뜨고 또 저무는 해가 새삼스레 짙은 의미를 갖는 순간이 있다. 묵은해를 날려 보내고 다시 새로운 1년을 맞는 일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년 이맘때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다. 나 이슬기는 지난 새해 일출을 보며 희망차게 꿈꿨던‘2015년의 나’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섰을까. 괜한 미련에 쏜살같은 시간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싶지만, 그 대신 지고 다시 태어날 해를 바라보며 또 다른 2016년의 나를 그리기로 했다. 비록 빼곡히 써두었던 신년 목표들은‘복·붙’할지라도 말이다.

▲ 강화나들길 7코스는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어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걷기길이다.

“거기 일몰이 그렇게 멋지대”
강화도를 향해 떠난 것은 순전히 그 한마디 말 때문이다. 겨울을 맞은 섬 특유의 쓸쓸하고 황량한 공기가 떠올랐지만 크게 거리낄 일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그리웠던 겨울 바다가 있고, 다들 기가 막힌 일몰을 담보했다. 날씨만 도와준다면 멋들어진 경치를 눈에 담을 수 있을 거라 믿었기에 망설임 없이 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나라에서 다섯째로 큰 섬인 강화도는 수도권에 자리한 보물섬 같은 곳이다. 서쪽 해안의 아름다운 낙조와 빼어난 자연 풍광, 단군이 제사를 올린 마니산부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인돌 유적, 그리고 호국 정신이 깃든 문화재까지. 역사와 낭만이 응축된 이 매력적인 고장은 서울에서 3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부담 없이 찾기에 더할 나위 없다.

▲ 재밌는 안내판을 발견했다. 강화도는 싱싱한 제철 해산물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밴댕이는 이 고장의 명물이다.

도심의 도로를 비집고 한 시간쯤 달리자 강화도와 김포시를 연결하는 관문인 초지대교가 나온다. 차창에 비치는 하늘이 어느새 회색빛으로 흐리게 번졌지만 양옆으로 출렁이는 바다만큼은 푸르게 빛나 걱정을 덜어준다. “와아! 저기 보세요, 철새예요!” “오, 저 정도면 오늘 철새 구경 실컷 할 수 있겠다.” 뒤따라 펼쳐진 너른 펄 위로 철새들이 무리 지어 날갯짓한다. 철새들이 하늘에 수놓는 그림이 악보가 됐다가 웃는 얼굴로 변했다. 오늘 하루 여정이 수월할 거라는 좋은 징조임이 틀림없다. 비웃음은 아니겠지.

▲ 말뚝 표지판과 리본 이정표가 곳곳에 자리해 길을 따라가기 수월하다.

‘강화도로 오시겨’
강화에서 나고 자란 선비 화남 고재형 선생은 1906년, 섬 전체를 돌아보며 이곳의 유구한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노래한 <심도기행>을 내놓았다. 강화나들길은 화남 선생이 지났던 강화의 길을 구석구석 연결한 310.5km의 걷기 길로 모두 19코스 20개 구간으로 돼 있다. 강화나들길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나들이 가듯 걷는 길’이라는 뜻을 지녔다. 우리 일행은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7코스 ‘갯벌 보러 가는 길’을 찾았다.
순박한 시골 마을을 돌아 등산로와 갯벌로 이어지는 나들길 7코스는 화도면 동막리 화도공영주차장을 기점으로 한다. 바로 앞에 자리한 24시 편의점에서 강화나들길 지도와 도보여권을 얻을 수 있다. 전 코스를 완주해 기념도장을 모으면 도보여행 완주 인증서와 기념품도 준단다. 7코스를 찾는 이들은 대개 내리성당에서 일만보길 입구를 지나 장화리 일몰 조망지로 곧장 향한다. 일행은 일몰 시각을 맞추기 위해 하늘재를 넘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일몰 조망지까지 가기로 했다.

▲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소박한 내리교회.

▲ 겨울이 내려앉은 강화도의 숲길.
100년 전에 세워졌다는 내리성당을 지나자 굽이굽이 길 위로 우리네 시골의 소박한 삶이 고개를 내민다. 반반하게 닦인 마루를 지나 장독대 너머로 풍겨오는 시골집 향기. 둑길 한쪽으로 깡깡 언 밭에 배추 밑동만 덩그러니 남았다. 뒤이어 완만한 산길이 줄곧 이어진다. 마니산 서편 줄기로 흥왕리 대흥에서 내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가 높고 험해 매나 날아서 넘을 수 있다고 매너미고개라 했다면, 그 왼쪽으로 난 나직한 고개가 기자가 넘은 작은 매너미고개다. 언덕 끝에는 참성단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서 있어 마니산 산행로로도 연결된다.
단조로운 포장도로가 한동안 이어졌다. 어느덧 일행 모두 지쳐 말이 없어진 지 오래. 이럴 땐 차라리 험한 바위길이 덜 따분하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바다는 저 멀리 보일락 말락 수준급 밀당 중이다. 동면에 들어가 잔뜩 웅크린 숲이 바스락바스락 마른 낙엽 소리를 낸다. 언덕을 돌아내려 오니 드디어 여차리다.
“여기서 숨 좀 돌리고 가자.” 여차1리 마을회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배가 집에서 쪄온 고구마를 꺼냈다. “선배 최고예요!” 먹음직스러운 노란 속살의 호박고구마가 혀끝에서 녹는다. 입 안 가득 달착지근한 고구마를 넣고 오물거리니 갑자기 세상이 아름답다. 먹을 게 들어가니 역시 힘이 나 신발 끈을 고쳐 매는데 저쪽 점포에 쓰인 ‘강화도로 오시겨’라는 글자가 정겹다.

▲ 여차1리 마을회관 앞에 잠시 머물러 쉬어간다.

낙조 보러 가는 길
여차리에서 갯벌센터로 넘어가는 언덕 위, 남은 코스를 확인하려 강화나들길 애플리케이션을 작동시켰다. “앗, 우리가 산꼭대기에 있다는데?” “으잉?” 기기마다 성능에 차이가 있겠지만, 기자의 구형 스마트폰은 GPS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앱 서비스를 충분히 활용하기 어려웠다. 해당 애플리케이션은 먹거리, 숙박, 화장실, 교통정보 등 나들길 코스 주변의 편의 시설을 확인할 수 있어 궁합 맞는 스마트폰이라면 유용한 길잡이가 돼 줄 거다.

▲ 강화도의 상징인 천연기념물 저어새.
 
▲ 갯벌센터 탐조대에서는 여러 철새를 관찰할 수 있다.

숲길 탐방로와 바다 사이에 자리한 갯벌센터에는 저어새, 흑두루미, 도요새 등 철새를 관찰할 수 있는 탐조대가 갖춰져 있다.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망원경을 열심히 들여다봤지만, 운이 나빴는지 한 마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까 가뭇가뭇 하늘을 가리던 새들은 다 어디로 날아 가버린 건지. 갯벌센터 앞에 드넓게 깔린 강화남단갯벌은 천연기념물 제419호로 지정될 만큼 청정하다. 원한다면 입장료를 내고 갯벌센터 내 전시실에서 강화갯벌 생태계에 대해 더 알아볼 수도 있다.

▲ 갯벌센터를 지나자 광활한 갯벌이 눈 앞에 펼쳐진다.

▲ 기대했던 것만큼 멋진 낙조가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바닷바람이 매섭네. 춥다, 그치?” 제방길을 따라 걷던 선배가 옷깃을 단단히 여민다. 해 질 무렵이 되자 싸늘한 칼바람에 양 볼이 언다. 어느새 해가 발갛게 달아올라 잰걸음이 바빠졌다. 대망의 최종 목적지인 일몰조망지가 저만치 보인다. 조망지에 다다르자 멀리 하늘과 맞닿은 바다가 황금빛으로 반짝이다가 금세 붉게 타오른다. 그 앞에 오도카니 서 한참 동안 지는 해를 바라본다. 멀리 외딴 섬과 바다 풍경이 녹아드는 낙조의 황홀함이라니. 세상을 온통 찬연하게 채색하는 대자연의 솜씨에 마음까지 물든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나에게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 그 끝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진짜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싼 껍데기를 먼저 깨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새해엔 꼭 헬스장도 끊고 미뤄둔 영어 공부도 좀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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