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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겨울 문턱에서…‘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을 걷다
비 오는 겨울 문턱에서…‘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을 걷다
  • 이주희 기자
  • 승인 2015.11.20 14: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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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 산책…하늘내린터에서 보낸 캠핑의 추억

오래 전 우연히 은빛 자작나무 숲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하이얀 눈이 쌓인 겨울, 하늘로 곧게 뻗은 나무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숲. 그곳이 우리나라라는 걸 미리 알지 않았더라면 저기 지구 반대편 북유럽 어디쯤이겠거니 짐작했을 것이다. 그날 사진으로 본 풍경은 기억 한 구석에 또렷하게 남았고, 나는 가본 적도 없는 곳을 무턱대고 그리워했다. 긴 시간을 돌고 돌아 2015년 겨울 문턱에 이르러서야 나는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으로 향했다.

▲ 비가 내리는 11월의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 사진 김해진 기자

자작나무 숲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1990년대 초반에 조림되기 시작해 2012년부터 사람들의 발길을 허락했다. 138만㎡에 약 70만 그루의 자작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단일 군락지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숲의 이름은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 숲에 들면 바람에 나뭇잎들이 몸을 뒤채는 소리가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고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단다.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길은 원대리 산림감시초소에서 시작된다. 임도를 따라 3.5km 정도 올라가면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 나무 조각상이 서 있는 입구에 다다르게 된다. 우리는 일반적인 방법 대신에 하늘내린터와 연결된 비포장 산길을 선택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길을 얼마쯤 달렸을까. 멀미가 슬슬 날 무렵 자작나무 숲과 마주할 수 있었다.

▲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 입구에 자리한 나무 조각상. 사진 이주희 기자

눈앞에 펼쳐진 자작나무 숲은 한 마디로 기이했다. 하얗게 빛나는 표피에 쭉 뻗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퍽 강렬하고 낯설었다. 숲에 들어서자 공기마저 한결 알싸해졌다. 겨울을 재촉하듯 비가 내내 내렸다. 후두둑 떨어지는 비를 계속 맞고 있자니 오소소 한기가 끼쳤다. 비 때문에 땅이 진창으로 변했지만 비 때문에 숲은 그만의 운치를 더했다. 그곳에선 말이 필요치 않았다.

숲길을 사부작사부작 걷다 보면 동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어딘가 ‘빨강머리 앤’이 사는 초록지붕 집이 있고, 전설 속 유니콘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해도 그리 놀랍지 않을 것 같다. 이곳에서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 자작나무의 하얀 수피가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숲에는 세 개의 산책 코스가 있다. 자작나무 코스(0.9km), 치유 코스(1.5km), 탐험 코스(1.1km). 각각의 구간이 짧고 서로 연결되어 있어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할 것 없다. 마음이 끌리는 대로 걸으면 그뿐. 이 숲의 매력은 멀찍이서 그저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숲 속을 거닐며 속살을 만져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떼다 고개를 쳐들어 나무의 끝을 더듬어보고 또 걷다가 은빛 표피를 살며시 어루만져본다. 잎을 다 떨궈내고 뽀얀 살결을 드러낸 자작나무는 나무의 여왕답게 고고한 빛을 내뿜는다. 나무 수피를 벗기거나 낙서하는 건 금물. 표면이 훼손된 자작나무는 시간이 흘러도 하얀 수피가 생기지 않는다.

▲ 비 내리는 자작나무 숲은 그만의 운치가 있었다.

자작나무 숲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도시의 번잡함은 끼어들 틈도 없이 시계바늘은 느릿느릿 움직인다. 구름도 비도 바람도 소리도 천천히 오간다. 빨강머리 앤처럼 눈을 감고 가만가만 걸으며 숲의 향기를 깊이 들이마신다. 아늑한 듯 서늘하고 고요한 듯 소란스럽다. 상반된 이미지를 모두 품고 있는 숲은 누구라도 감상에 젖어들게 만든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사계절 다른 느낌으로 아름답지만 그중에서도 겨울이 백미로 꼽힌다. 흰 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겨울날 자작나무 숲을 걷는 상상에 빠져본다. 머릿속에 그리는 것만으로 눈앞이 아뜩해진다. 올겨울 눈 쌓인 이곳에 다시 오리라 맘먹는다. 한겨울 자작나무 숲은 조금 더 춥겠지만 한결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하겠지.

▲ 높다랗게 뻗은 자작나무, ‘나무의 여왕’이라 이를 만하다.

자작나무는?
자작나무는 기름이 많아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불에 잘 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작나무 수피는 종이처럼 쓰이기도 하고 껍질을 태운 숯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가죽을 염색하기도 했다.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도 해인사 팔만대장경도 이 나무의 수피가 재료로 사용되었다. 한방에서는 수피를 백화피(白樺皮)라고 부르는데 이뇨·진통·해열·해독 등의 효능이 있어 약재로 이용한다. 나무의 질이 우수하고 잘 썩지 않아서 가구를 만들거나 땔감으로 쓰기에도 좋다.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
위치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산75-22번지
문의 인제국유림관리소 산림경영팀 033-460-8036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자연 속에 들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지는, 그런 때가 왕왕 찾아온다. 인제 하늘내린터는 딱 그럴 때 찾아가면 모든 시름을 내려놓고 마냥 쉬다 올 수 있는 곳이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 가기 전 하늘내린터에서 밤을 보냈다. 서울에서 3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하늘내린터는 겹겹이 둘러싼 산속에 자리하고 있어 가는 동안 꽤 여러 번 귀가 먹먹해졌다. 이곳에 발을 들일 땐 스마트폰은 잠시 꺼두어도 좋겠다. 어차피 잘 터지지도 않는다. 온전한 ‘쉼’을 위해서는 어쩌면 잘된 일일지 모른다. 

▲ 인제 하늘내린터에서 맞은 밤.

하늘내린터는 해발 600m 지점,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약 3만평 규모의 농원 겸 야영장인 이곳은 주인장이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까다로운 가입 절차를 통과해야만 발을 들일 수 있다. 사이트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여느 야영장과 다르게 널찍널찍 떨어져 있어 호젓한 캠핑을 즐기기에 제격. 편의시설은 거의 없다. 전기는 쓸 수 없고 화장실은 재래식이며 설거지를 할 땐 친환경 세제만 사용해야 한다. 자연 그대로를 존중하고 다녀간 흔적을 남기지 않는 LNT(Leave No Trace)를 실천하는 것이 철칙. 이를 지키지 않으면 블로그에서 가차없이 ‘강퇴’다.

숲 해설을 들으며 농원을 한 바퀴 휘 둘러보고 나니 어스름이 내렸다.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사이트를 정하고 텐트를 쳤다. 하늘내린터의 밤은 도시의 밤보다 빨리 찾아온다. 해가 언제 저물었는지 모르게 밤은 느닷없이 왔다. 한밤중인가 싶었는데 시계를 보니 이제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도시는 네온사인으로 대낮처럼 환할 시간이지만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이곳에는 어둠이 일찍 내려앉는다. 랜턴 없이는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토록 까만 밤을 만난 게 얼마만이던가. 역시 캠핑에는 고기가 빠질 수 없지. 누릇하게 구워진 삼겹살 한 점에 마냥 행복해졌다. 고기 냄새를 맡고 어느새 고양이가 어슬렁 다가왔다. 화들짝 놀라 쫓아보는데 사람을 겁내지도 않는다.  

▲ 우리가 머문 텐트 사이트.

▲ 사이트 앞, 초록으로 빛나는 비밀의 샘.

모닥불 앞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들으며 따끈한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별들이 총총 박혀 있었다. 하염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촘촘히 박힌 별, 입 안을 감도는 은은한 커피향, 그리고 좋은 사람들. 모든 게 완벽했다. 순간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인제의 밤은 생각보다 따듯했다. 두툼한 동계용 침낭 덕인지 코끝만 조금 시렸을 뿐 온기를 품고 잠들었다. 집이었다면 아직 이불 속에 있을 시간, 새 지저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우리는 블로그에서 ‘강퇴’ 당하지 않기 위해 머문 곳을 말끔히 치워 나갔다. 비록 하룻밤이었지만 자연 속에 흠뻑 머문 시간은 지친 마음을 차근히 보듬어주기에 충분했다.

▲ 하늘내린터를 지키는 백구. 얘 말고도 9마리가 더 있다.

인제 하늘내린터
이용료 1동당 기본료 1만원, 성인 1인당 5천원
위치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449
문의 010-2182-1946 / blog.daum.net/skynae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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