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대청봉 오른 여자야
나 대청봉 오른 여자야
  • 이슬기 수습기자|사진 양계탁 기자
  • 승인 2015.09.1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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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with MAMMUT ③좌충우돌 설악산 1박 2일 종주 두 번째 이야기편

대피소의 별이 빛나는 밤에
산속 시계는 도심의 시계보다 일찍 간다. 인생에서 가장 재미난 일들은 밤 10시 이후에 일어난다고 믿으며 살아왔는데, 9시 소등이라니. 잠 올 턱이 없다. 애꿎은 전화기만 만지작거리다 밖으로 나왔다. 불 꺼진 데크에 올라서자 까만 하늘에 반작이는 별 조각이 지천이다. 쏟아져 내리는 별빛 사이를 더듬어 북두칠성을 찾아낸다. 양손을 모아 한껏 떠내 담아두고 싶은 밤하늘이다. 사람의 빛이 모두 사라진 설악의 밤은 낮보다 찬란하다. 역시, 삶의 백미는 밤이야.

눈 한번 깜빡였을 뿐인데
‘드르렁드르렁’
선배의 귀띔으로 귀마개 챙기길 잘했다. 산꾼들의 코 고는 소리가 어느새 대피소 안에 그득하다. 사실 평소 쉬이 잠들지 못하는 탓에 우려가 많았다. ‘씻지 못해 찝찝하겠지? 많이 시끄러울 거고, 추울지도 몰라. 벌레가 많으면 어쩐다. 푹 자는 건 글렀구나.’ 쓸데없는 기우였다. 침상에 몸을 눕힌 순간, 서울에서 잔뜩 싸들고 온 걱정들이 모두 녹아내린다. 지긋지긋한 불면증까지도. 금세 코골이들의 합창에 단원으로 동참했다.

슬기야 잘 잤어?
이렇게 꿀잠 잔 건 진짜 오래간만인 것 같아요. 눈 한번 감았다가 뜨니 아침이더라고요.
너 정말 잘 자더라. 근데 우리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데 왜 이렇게 뽀송뽀송하지!
냉장고 신선실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요. 싱싱한 이 공기 그대로 제 방에 가져다 놓고 싶어요.
폐 속에라도 가득 담아가자.

설악 VIP를 위한 환상의 스카이라운지
해발 1550m에서 맛보는 라면의 맛이란. 발아래 산허리춤에 걸린 구름 한 스푼에 면발 한 젓가락을 섞어 입에 넣는다. 반찬은 김치뿐이어도 임금님 수라상 부럽지 않다. 아름다운 공룡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뷰에 기막힌 흥취를 자랑하는, 이곳은 바로 땀 흘린 이에게만 허락되는 설악 VIP 전용 스카이라운지다.
프랑스 몽블랑 카페 테라스에서 마시는 커피가 이런 맛일까?
커피 못 마시지만, 지금 이 순간엔 한잔해야 할 것 같아요.

진통제는 진통제일 뿐이야
어디 보자. 소청 대피소에서 중청 대피소를 지나 대청봉까지 50분 거리야. 내려갈 때는 오색 코스로. 4시간 정도 걸린다는 데 꽤 어렵다고 적혀 있네. 오늘도 만만치 않겠다.
앗, 역시나 폭염특보 메시지가 와 있어요.
…….

전날부터 챙겨 먹은 소염진통제가 꽤나 신통방통하다. 어제 8시간 동안 등산을 강행한 탓에 무리가 있었을 법도 한데 온몸이 거짓말처럼 가뿐하다. 이대로라면 대청봉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산행을 다녀오면 늘 우리를 괴롭히는 종아리 당김도 없다. 기특한 것. 앞으로 출장 필수품으로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슬기야, 뭔가 잘못됐다.
그렇죠? 저도 한 발짝 오르는 순간 느꼈어요. 다리가 아직 풀려있어요! 으악!
어쩐지 너무 효과가 좋더라니. 진통제는 진통제일 뿐이었어. 아픈 느낌만 없지, 다리는 여전히 천근만근이네.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중청대피소에 도착했다. 고작 30분 등반했는데도 벌써 등허리에 땀이 흥건하다. 대청봉에 오르기 전 잠시 이곳에서 숨을 고르기로 했다.

앗, 여기 빨간 우체통이 있어요!
설악산 중청대피소를 발신지로 하는 우편엽서를 보낼 수 있대.
이런 건 또 놓칠 수 없죠! ‘늘 이슬기다운 이슬기가 되자. 파이팅!’
어디 보자. ‘이번 달 인사이트 인터뷰 섭외 꼼꼼히 하고… 꼭지 잘 마무리하자.’
이런 순간에도 기사 생각이라니. 역시 선배, 존경스러워요.

그 거짓말 감사합니다
뜨겁다. 오늘도 푹푹 찌는 날씨에서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송골송골 코끝에 맺힌 땀을 연신 훔쳐냈더니 그 부분만 자외선 차단제가 지워져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칠 대로 지쳐 대화도 웃음기도 사라진 지 오래. “안녕하세요!” 맞은편에서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살갑게 인사를 건넨다. “젊은 아가씨들이 고생이 많네. 다 왔어요.”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묻자 5분이면 된다는 반가운 대답이 들려온다. 그것이 소위 ‘산뻥’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주머니의 격려하는 마음이 등 뒤를 한껏 밀어주는 것 같아 발끝에 힘이 솟는다.

선배, 조금만 힘내세요. 5분 남았어요.
거짓말 마.

나 대청봉 오른 여자야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산 없다고 했던가. 어느덧 머리 위를 가리던 나뭇가지가 걷히고 너른 하늘이 드러난다. 드디어 왔다, 대청봉! 저질 체력의 대표주자인 우리가 말로만 듣던 설악산 대청봉 등정에 성공하다니. 감격스럽다. 못할 거라고, 도중에 포기하고 말 거라고 만류하던 얼굴들이 떠올라 더 짜릿하다. 이럴 땐 확실히 인증사진을 찍어 증거로 남겨둬야 한다. 위풍당당하게 자리한 정상석 앞에는 이미 길게 대기 줄이 늘어서 있다.

2015년 8월 7일 오전 11시 30분. 기억해 내가 대청봉에 오른 시간.
뭐니?
드라마 대사요. 정말 기분 최고예요! 우리가 해냈어요!
어쨌든 수고 많았어. 눈물이 나려 그런다.

하산길, 역시 끝까지 만만치 않다
대청봉에서 느끼던 짜릿함도 잠시. 정상에 올랐으니 이제 내려갈 일이 남았다. 예상 소요 시간 4시간. 부지런히 걸어야 내려가서 점심을 먹을 수 있다. 모든 의지의 원천은 역시 먹을 거다.

아, 돼지국밥 먹고 싶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돼지국밥이랑 순대국밥 차이가 뭐예요? 비슷한 것 같던데.
뭘 모르는구나. 들어가는 부속물도 다르고 맛도 완전히 달라. 언제 한번 경상도로 출장 가야겠다. 아쉬운 대로 오늘 점심은 순대국밥 결정이다!
빨리 내려가요.

오색 코스, ‘매우 어려움’
대청봉에서 설악 폭포를 지나 남설악탐방지원센터까지 내려오는 5km의 구간은 급경사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어 ‘매우 어려움(Expert)’ 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날 산행으로 이미 풀릴 대로 풀린 두 다리로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을 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리가 절로 후들후들하며 트위스트를 춰댔다.

선배, 괜찮으세요? 죽겠어요.
… 말 시키지 마.

등산 스틱을 마치 앞발처럼 지탱하며 무거운 다리를 한발 한발 옮겨갔다. 스틱이 없었다면 꼭 기어가는 모양새였을 거다. 오색코스로 이어지는 하산 길은 끝없는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내려가도 끝이 보이지는 않는 계단의 연속이다. 비슷한 길이 계속되기 때문에 더욱 지치는 느낌이다.

정면으로는 도저히 못 내려가겠다. 옆으로 걸어 내려가야지.
숲 속을 걸어요~ 산새들이 속삭이는 길~ 숲 속을 걸어요~ 꽃향기가 그윽한 길~
너 솔직히 말해봐. 하나도 안 힘들지? 어떻게 이 상황에 노래가 나올 수 있어!
노동요예요. 이렇게라도 해야 살겠어요.

짜릿한 설악폭포 한 모금
대청봉에서 하산을 시작한 지 꼭 2시간 반 만이었다. 지칠 대로 지쳐 발걸음을 떼는 것이 고행 수준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난 출장 산행을 앞두고 늘 고민거리들을 챙겨와. 고민을 하나하나 씹으면서 산을 걷다 보면 몸이 힘든 것도 잊어버리고 곧 도착해 있더라고.
앗 저도 고민 중이었는데. 오늘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세요?
얼마 전에 본 다큐멘터리를 떠올렸어. 네팔 셰르파 가족의 이야기였는데 작은 체구의 아빠가 100kg의 짐을 메고 슬리퍼만 신은 채 히말라야를 오르더라. 어린 아들은 학교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빠와 함께 산을 오르고 있었어. 또 엄마는 그곳에서도 무시 받는 ‘여자짐꾼’의 설움으로 울면서 산을 오르더라고. 우리가 등산화를 신고, 10kg 남짓한 배낭이 무겁다고 헉헉대는 지금이 어쩌면 그들에겐 호화로워 보일지도 모르겠단 생각 중이었어.
저는 주지훈과 하정우가 동시에 고백하면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벌떡 일어났다. 한달음에 내려간 곳에는 보석같이 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꺄, 완전 좋아요. 크게 소리 지를 뻔했어요.
냉큼 내려가자.

설악폭포까지 왔다면 오색 코스의 절반 정도 도달했다고 보면 된다. 마치 산 중턱에 고이 숨겨놓은 선물 같다. 아침부터 종일 발목을 옥죄던 등산화와 답답한 등산 양말을 벗어던지고 한없이 투명한 물 사이로 두 발을 밀어 넣었다. 행복하다.

끝 그리고 다시 시작
애초 9시 반 경 출발해 늦어도 2시까지는 도착하기로 했었다. 예상 소요 시간이 4시간이었으니 충분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오산이었다. 다리는 우리가 기대했던 만큼 버텨주지 못했고 속도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6시간이 지나서야 목적지인 남설악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다.

많진 않지만 몇 번의 산을 탔었다. 항상 하산이 끝나면 ‘이번 달 산행이 드디어 끝났구나’하는 생각과 홀가분함이 먼저였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분명 종주는 끝났는데… 끝인 것 같지 않았다. 어렵기로 유명한 설악산 코스를 완주해서일까. 다시 시작할 마음이 희미하게 들었다. 뭐든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 미소가 새어 나왔다. 아 물론, 그렇다고 당장 다음 달에 지리산 종주를 간다는 건 아니다.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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