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래서 오지 말쟀잖아
내가 이래서 오지 말쟀잖아
  • 이지혜 기자|사진 양계탁 기자
  • 승인 2015.09.1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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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with MAMMUT ②좌충우돌 설악산 1박 2일 종주 첫 이야기편

아무 데서나 잘 순 없잖아, 멧돼지도 있다는데
사실 우리에겐 종주에서 가장 필요한, ‘숙소’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백담사에서 시작해 올랐을 경우 잘 수 있는 곳은 약 세 군데로 좁혀진다. 봉정암, 소청 대피소, 그리고 중청 대피소. 먼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이라는 봉정암에는 만 원 정도의 금액을 내면 조그마한 공간을 할당받을 수 있다. 대피소 잠자리의 치열한 경쟁 탓에 봉정암은 대피소 예약에 실패한 등산객이 하루 쉬었다 가는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세계시계 애플리케이션을 옆에 켜 두고 지문 닳도록 클릭한 결과, 무려 소청 대피소 숙박에 성공했다!

근데 설악산 가는 방법 아니?
근데 슬기야, 우리 설악산 뭐 타고 가니?
버스요! 제가 알아봤는데요, 고양시 버스터미널에서 백담사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요. 아침 7시 10분에 출발하면 10시쯤 도착해요. 백담사 터미널에 내려서 다시 버스로만 등산로 초입까지 갈 수 있어요. 10분 정도 걸린대요. 그곳이 진짜 ‘백담사’에요. 거기서부터 우리의 본격적인 종주가 시작된답니다.

터미널에서 등산로 초입까지 등산객들을 태워 나르는 버스는 사람이 차면 즉시 떠난다. 항상 붐비는 곳인 탓에 대기 시간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버스는 10분간 고불고불한 길을 아슬하게 달리는데 버스의 왼편에 앉아 간다면 계곡을 감상할 수 있으니 참고하자.

설악산도 식후경, 아침은 황태 마을 황태해장국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세 시간여를 달려 드디어 도착했다. 버스가 고즈넉한 마을 길에 들어섰다. 백담사 터미널이 위치한 백담 마을이다. 이곳은 ‘황태 마을’이라고 불릴 정도로 황태 음식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설렁설렁 걸으며 셔틀버스 타는 곳으로 향했다. 보이지도 않았지만, 대청봉이 있을법한 곳을 호기롭게 노려보았다.

내가 저길 올라가고 만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잖아요. 밥부터 먹어요, 선배. 황태해장국 어때요?

설악산, 별거 아니네?
몇 시간 째 이런 밋밋한 숲길만 걷는 거냐, 우리?
그러게요. 설악산 별거 아닌 거 아닐까요?
쉿, 말조심해. 갑자기 경사가 나타나면 네 탓이다.

그러고도 한동안 경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백담사에서 시작해 영시암을 지나 수렴동 대피소까지의 4.7km 구간은 경사 없는 숲길이 이어진다. 다시 말해 등산에 ‘ㄷ’자도 모르는 두 여자가 방심하기 딱 쉬운 구간이다. 넓게 펼쳐진 계곡을 오른편에 두고 걷다 보니 어느새 수렴동 대피소. 가벼운 점심을 하기로 했다.

전투식량을 여기서 처음 먹어보네요.
산에서 먹으면 뭐든 맛있다는데, 옆 테이블에서 먹고 있는 라면까지 맛있어 보인다.
선배 근데 버너 어떻게 켜는 줄 아세요?
네가 아는 거 아니었어?

스물아홉 그리고 서른하나
수렴동 대피소에서 봉정암까지는 2시간 40분이 걸린다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명심하라. 저질 체력과 객기 충만으로 똘똘 뭉친 초짜 등산객에게 안내판에 적힌 시간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조금씩 경사가 생기고 숨이 가팔라졌지만, 어차피 해 지기 전에만 도착하잔 생각으로 천천히 오르다 보니 자연스레 여자들의 수다가 시작됐다.

선배, 선배는 스물아홉 때 뭐 하셨어요?
서른이 되기 직전엔 겁나기도 했고, 주위에 “나 나이 먹는다”며 징징거리기도 했어. 나름대로 상경이라는 걸 하고 월세에, 적금에 치여 돈을 모으면서 살다가 스물아홉이 되던 해 1월에 문득 ‘대학을 졸업하고 나를 위해 한 번도 과감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엄마한테 “스물아홉엔 돈을 모으지 않겠다”며 한 번 질러봤어. 의외로 쉽게 알겠다고 하시더라. 결과적으로 스물아홉에 백 원도 모으지 않았어. 번 돈으로 시간 날 때마다 여행을 다녔어. 그렇게 1년을 보냈더니, 서른이 무섭지 않더라.
근데 서른이 넘어도 별것 없죠?
응. 어떻게 알았냐. 오히려 마음이 편해. 이렇게 말하면 자기위로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서른이 넘으면 멋있는 것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제 20대의 마지막인데, 처음에 겁이 나더니 이젠 겁나지 않아요. 기대도 되고요. 어릴 적엔 이 나이쯤 되면 결혼이나 직장, 하다못해 남자친구라도 안정적으로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서른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 생각했던 것 중 하나도 이룬 게 없는 걸요. 신기한 건 뭔지 아세요?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거예요. 오히려 기대돼요. 얼마나 멋진 기자가 되어 있을지, 얼마나 멋진 남자친구가 생길지 그런 기대 말이에요.

폭염주의보, 쉬었다 가도 괜찮아
사실 등산로 초입을 통과한 직후 휴대전화가 울리긴 했다. 강원도에 폭염주의보가 발령됐다고, 조심하라는 문자가 온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더워도 너무 덥다.

슬기야, 너무 덥지 않니? 저기 계곡에서 손수건 좀 적셔가자.
네, 선배. 오늘 정말 더워요.
아. 죽을 것 같다. 내가 이래서 오지 말 쟀잖아.
선배, 재밌을 거 같다고 선배가 가자고 하셨는데요.
…여기서부턴 진짜 기도라도 하고 가야겠다.
힘들 땐 쉬어가요, 선배. 아시겠지만 제가 조금 느린 편이에요. 남들은 이 나이쯤 되면, 뭐든 안정을 찾는다며 직장생활 열심히 하잖아요. 저는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를 관두고 늦게 기자를 시작했어요. 부모님이 걱정도 많이하셨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친한 친구인 엄마까지 걱정하는 마음에 이직을 반대하셨을 땐, 사실 너무 속상했어요. 그래도 오랫동안 꿈꿔온 이 일을 하고 있으니, 엄마도 서점이나 인터넷에서 제 글을 찾아보셨더라고요. 얼마 전에 엄마가 “열심히 하라”는 응원을 해주셨을 땐,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요. 그러니까 우리, 천천히 가요.

한 걸음 앞만 보고 가니 어느새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힘들 걸 알았고 예상만큼 힘들었다. 멀리 보면 볼수록 더위에 헉헉 지쳐갔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했다. 한 발짝 앞만 보자. 당장 앞에 걸어가야 할 곳만 보며 걷자. 조금씩 걸었더니 아까 보았던 곳에 도달했다. 또 저기까지 가야 한단다. 다시 한 발짝 앞만 보며 걸었다. 그랬더니 어느샌가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더위에 지쳐 헉헉대던 우리에게 보너스 같은 경치가 펼쳐졌다. 아래만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멀리만 보다 눈이 멀어버린 우리 앞에 아름다운 설악산이 산수화를 걸쳐놓았다. 가는 내내 폭포가 위로했고, 다람쥐가 동행했다. 사실 우리의 인생이 계속 그랬다.

사실 난 어릴 적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어. 나쁜 사람을 때려잡고 싶은데, 경찰은 무섭더라고.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를 매일 저녁 인터뷰 하는 기자 언니도 부러웠어. 그렇게 무작정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는데, 살다 보니 내 명함엔 기자라는 직함이 붙어있더라. 어디를 어떻게 거쳐 왔는지는 잘 모르겠어. 그곳에서 내가 잘했는지도 모르겠어. 그냥 닥치는 대로 열심히 살다 보니, 기자가 되어 있었어. 꼭 설악산처럼.
그리고 우린 봉정암에 도착했어요. 선배.
벌써?

항상 이루기 직전엔 포기하고 싶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으로 힘든 구간이래요. 여기 보세요.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잖아요. 보기만 해도 무서워요.
시작하기 전에 황도 캔이라도 따먹자.

봉정암에서 소청 대피소까지의 구간은, 그야말로 시꺼멓게 칠해져 있었다. 안내도에 그려진 산의 경사표시 난이도 중 가장 힘든 구간을 뜻한다. 얼마나 힘들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등산화 끈을 조여 매고 오르기 시작… 한 지 딱 5분 만에 숨을 헐떡댔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간다 하여 ‘깔딱 고개’라 이름 지었다는데, 누군지 몰라도 작명가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다. 준비해 간 죽염을 입에 털어 넣을 힘도 없어 주저앉았다.

목적지가 코앞인데 올라가질 못하네요. 꼭 취업준비 한다고 토익 공부 할 때 같아요. 한참 점수가 오르는 것 같을라치면, 어느 순간 멈추고 말아요. 목표 점수가 코앞인데, 그 점수가 죽었다 깨어나도 나오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그때 정말 포기하고 싶었어요. 근데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시험을 쳤는데, 생각보다 너무 점수가 잘 나왔어요. 지금이 꼭 토익을 포기하고 싶던 그때 같아요.
이 상황에 토익 생각을 하다니, 대단하다 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정말 가야 할 때가 왔다. 쌩뚱맞게도 어릴 적 안방에 있던 작은 향수가 생각났다. 달큼한 향을 엄마 몰래 맡으며, 어린 나는 마치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진짜 어른이 된 지금, 오도 가도 못하고 앞으로 나가야 할 순간이 이렇게 온다. 그때마다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르는 그 향수 냄새는 나를 현실로 데려와 준다. 걸어야 했다. 남은 해가 넘어가기 전에, 헤드 랜턴을 이곳에서 켤 수는 없었다.

눈에 다 담을 수 없던 설악산의 밤
배낭을 던지기가 무섭게 해가 넘어갔다. 5시간이 걸린다 하던 구간을 8시간으로 늘렸지만, 우리는 다행히 잘 왔다. 깔딱깔딱 넘어가는 숨을 고르고 하늘을 보니, 처음으로 오늘의 폭염주의보가 고마웠다. 구름 한 점 없던 덕분에 벌써 별빛이 출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 올라온 사람들은 이미 데크를 다 차지하고 저녁준비에 분주했다. 달콤한 카레 향부터 구수한 삼겹살 냄새까지, 메뉴도 다양하다.

슬기야, 우리도 먹자.
선배, 땀은 어떻게 씻죠?
씻기는 뭘 씻어, 물티슈로 대충 닦고 옷 갈아입어.

헤드랜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고기부터 구웠다. 국내외 여러 곳 여행을 다녀보며, 푸드내비게이션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뒀다 자부했던 우리는, 소청 대피소 바닥에 앉아 먹던 불고기 맛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산에서 먹는 음식이 가장 맛있다는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틀에 박힌 말. 진짜로 진짜다. 물론 애피타이저로 근육 이완제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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