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과 마주하다
생존과 마주하다
  • 글 사진 윤승철 기자
  • 승인 2015.08.31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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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한번쯤은 무인도| 윤승철의 무인도 체류기 VOL.2

진짜 무인도에 도착했다. 몇날며칠 정보를 모으고, 출발 전부터 밤새도록 현지인과 연락하고 자문을 구했지만, 막상 와보니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다. 그래도 어쨌든 무인도에 왔다. 난리법석을 떨며 파도를 헤치고 도착했더니, 그제야 주위의 모든 것이 조용해 진 것을 눈치 챘다.

물을 구하라
역시 어렵다. 최대한 솔직하고 담백하게 설명하고 싶지만 어렵다. 물을 구하는 것은 말 그대로 죽을 만큼 힘들었다. 무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소설처럼 민물이 나오는 계곡이나 호수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게리 폴슨의 <손도끼>나 <로빈슨크루소>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간 섬은 현실이었다. 이곳이 왜 무인도라 불리는지 알 수 있는 곳이었다.

▲ 첫날 눈을 떠보니 거북이가 엉금엉금 걸어오고 있었다.
헝겊으로 덮인 막대로 새벽이슬을 휘둘러 짜서 물을 얻었다. 정수를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바닷물을 증류하고 수증기를 식혀 한 방울씩 먹는 것도 해봤다. 간신히 목만 축이는 정도로 하루가 지났다. 생각해보니 섬에 들어온 뒤로 먹은 것도, 한 것도 없었다. 충분하지 않은 물로 목만 축이기 위해 힘쓴 게 전부였다.

사람 심리가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이때다. 코코넛 나무엔 코코넛이 여럿 붙어 있었다. 당시엔 코코넛 속에 코코넛 물과 ‘부코’라 불리는 속살이 많은 시기였다. 나무에 코코넛이 달려 있다기보다는 나무가 생명 양식인 코코넛을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열매를 보고도 딸 수 없었다. 엿가락처럼 길쭉하게 하늘까지 늘어나 있는 코코넛 나무가 도무지 오를 수 없는 높이였기 때문이다. 나무를 오르기 위해서는 두 개의 손과 두 개의 발, 그리고 나무에 바싹 붙을 수 있는 몸뚱이가 필요하다. 하지만 내 상황은 두 발로 사다리를 오르기도 힘든 정도다.

그런데 간절한 마음 때문일까. 첫날은 코코넛 나무의 절반 정도 올랐다면 둘째 날은 3분의 2만큼, 셋째 날이 되니 그렇게 높던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이 코코넛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이마저도 생존하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물을 마시고, 음식을 하는 데에도 부족하거니와 우리같이 적응이 덜 된 외부인이 물 대신 코코넛 물만으로 살다간 배탈이 나기에 십상이었다. 3주간 무인도에 있으면서 4일째에 결국은 사람들이 사는 섬에서 물을 받아 왔다. 그래도 간절함이 코코넛을 구했다.

▲ 먹기 위해 게를 잡았다.

▲ 무인도라는 것이 점점 실감 났다.

▲ 거북이가 해변가에 알을 낳았다.

불을 다루다

불을 붙이는 과정 역시 만만치 않았다. 온몸의 육수를 다 빼가며 나무를 아무리 문지르고 비벼도 연기가 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생존 전문가들은 특별한 성분이 포함된 돌이나 자갈의 마찰만으로 불을 피우기도 하던데 일반인인 나는 알 리 만무했다. 빨리 문지르면 그나마 연기가 나는 나무를 구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 연기가 난듯해 재빨리 마른 부시킷으로 옮기면 꺼지길 6시간, 포기했다. 이걸 처음부터 지켜본 현지인 친구가 왜 그런 눈빛으로 날 봤는지 이해가 갔다. 진작 좀 말해주지. 결국, 현지인의 도움을 얻기로 했다.

▲ 불 피우는 건 예상하지 못한 난관을 줬다.

어떻게든 자연 상태에서 불을 피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였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져온 파이어 스타터를 꺼냈다. 불꽃이 튀었다. 직접 붙이지 못해 자존심이 상할 법했을 텐데 이땐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다. 불을 붙이잔 생각밖에 없었다. 불꽃을 불쏘시개에 옮겨 나무에 불을 붙이는 데까지는 성공. 하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한 순간이다. 불은 피우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아침을 먹기 위해 새벽같이 불을 피웠지만, 먹거리를 구하고 오면 항상 꺼져 있었다. 점심도,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 보이는 잔가지들로만 땔감을 구한 탓인 것 같았다. 주변의 큰 나무 기둥을 찾기 시작했다. 불에 타다 숯으로 바뀌기도 하고, 나무 자체가 오래 타며 불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팔라완의 바다는 그야말로 수족관이다.

▲ 하루 만에 더러워진 내 발.

앞서 말한 듯 큰 기둥의 나무는 단순히 땔감의 역할만 하지 않는다. 불씨 저장소의 기능도 한 것이다. 몸집이 큰 기둥들의 옆구리가 쥐가 갉아먹듯 조금씩 타들어 갔는데, 이 속에 작은 불씨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나무가 크다 보니 전체가 타지 않고 불과 가까웠던 한쪽만 타들어 갔고, 그렇게 자연스레 타들어 가면서 움푹 팬 곳에 불씨를 간직하게 된 것이다. 더 신기한 것은 나무 안 빈 공간에 불씨와 산소가 함께 있어 꽤 시간이 지나도 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듬직한 통나무를 엎은 뒤 모래로 덮어두면 불씨가 고스란히 몇 시간이고 살아남아 있었다.

▲ 내 집 마련의 꿈은 무인도에서도 쉽지 않았다.

물고기 손질

팔라완의 바다는 그야말로 수족관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해양보호구역이니 물 안이 훤히 내다보이는 것은 기본, 다양한 산호들이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였을까. 물고기 잡기에 서툰 첫 주였지만 심하게 굶주리진 않았다. 거북이가 알을 낳으러 올라왔고, 물이 빠지면 ‘랑아랑아’라 불리는 뿔소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늦은 밤이면 해변에 지천으로 게들이 기어 다니기도 했다. 인간의 기본 요소라는 의, 식, 주 중 가장 걱정했던 것이 먹을거리였다. 그런데 오히려 먹을 것이 많아 3주간 버틸 수 있었다.

배를 타고 나가 큰 물고기를 잡았다. 밤에 물속으로 들어가면 자는 물고기를 볼 수 있었다. 무인도에 들어가기 전 수산시장에서 봤던 물고기들이 살아서 바다에 있는 것이 신기했다. 뾰족한 작살은 찰나의 순간 그 물고기들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하던 동생에게 위풍당당 물고기를 들고 나가면 ‘이때보다 내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던 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여섯 시간 동안 불과의 싸움을 치뤘다.
▲ 내 나이 또래의 대한민국 남자 중 회 뜨는 기술을 보유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물고기를 잡는 것만큼 손질 하는 것도 중요하다. 처음 잡은 고기들은 회로 먹었다. 배가 고파 고기를 익히는데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사는 대학생 중에서 몇 명이나 살아있는 물고기로 회를 떠봤을까. 소중하게 잡은 물고기들은 머리와 꼬리를 자르고 뼈를 바르니 연한 살점 두어 점만 남았다. 이마저도 울퉁불퉁한 표면과 터진 내장에서 나오는 분비물, 비늘이 엉켜 몇 번이나 바닷물에 씻어내야 먹을 수 있었다.

물고기 세 마리를 한 번에 잃은 적도 있다. 회로는 부족해 탕으로 끓여 먹을 요량으로 나무를 다듬기 시작했다. 물이 끓을 때까지 계속 냄비를 들고 있을 수 없으니 머리를 썼다. 불을 피우고 불 양쪽에 Y자 형태로 다듬은 나무를 모래에 박았다. 받침대 역할을 할 나무였다. 그리고 Y자 나무에 걸칠 긴 나무를 준비했다. 긴 나무에 냄비 손잡이를 걸었다. 그 속엔 생선 3마리와 라면 스프로 간을 낸 국물이 들어 있었다. ‘받침대도 만들고, 이 정도면 나도 꽤 진화했는데?’ 라고 생각한 지 일분이 채 지났을까.

▲ 물고기를 잡는 것 보다 손질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위치 조절에 실패했다. 너무 낮게 고정하는 바람에 나무가 타버려 냄비는 불 속으로 엎어졌다. 라면 스프도, 물고기도 잃고 불마저 꺼졌다. 익는 동안 다른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실패가 한 번은 아니었다. 직화 구이도 실패했다. 나무를 뾰족하게 손질한 후 아가미로 넣어 꼬리를 관통시키고 불 옆 모래에 꽂아두면 적당한 불길과 연기에 잘 익을 줄 알았다. 냄비 사건을 이후로 신중하게 한쪽 면씩 적절히 익혀가며 돌려 굽는데 갑자기 ‘툭’하며 불로 떨어졌다. 고기가 익어 살이 물렁물렁해지면서 통째로 불구덩이에 들어간 것이다. 떨어지면서 쌓여있던 재들이 공중으로 일어났다 덮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 집 마련의 꿈
무인도는 항상 내 생각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내 집을 마련하는 것도 그랬다. 20살 때부터 서울살이를 시작한 내게는 집을 마련하는 것은 말 그대로 ‘꿈’이었다. ‘무인도에서만큼은 내가 먹고 자고, 생활할 집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뚝딱 집을 짓는 멋진 내 모습을 상상하며 정글도를 가지고 숲으로 들어갔다. 머리로는 어떻게 집을 지으면 좋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방향의 기둥을 먼저 고정해야 하지?’ , ‘2층으로 지으려면 어떻게 바닥을 띄워야 하지?’ , ‘방향은 어디로 하고, 지붕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여러 생각을 하며 나무를 베는데 두 시간쯤 지나서야 현실을 직시했다. 내 걱정은 아무 쓸모도 없었다.

▲ 불을 유지하는 과정이 붙이기보다 더 어렵다.

문제는 벤 나무를 해변까지 옮기는 일이었다. 두 시간 동안 벤 나무는 고작 십여 개. 곧은 나무를 찾고, 쓰러뜨린 후, 잔가지를 치고 내려놓는 것은 생각했던 것만큼 빨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생각했던 집을 짓는 데 필요한 나무는 최소 30개. 십여 개의 나무를 베는 데에만 2시간이 걸렸으니 최소 6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항상 나무만 벨 순 없는 일이다. 중간중간 사냥을 가고 불을 피우고, 생선을 요리해야 하는데, 나무를 베는 데에만 꼬박 하루 이상이 걸린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벤 나무를 해변까지 옮기는 일이었다. 숲이 해변 바로 뒤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10분 이상을 가야 하는데. 살아 있는 나무는 어찌나 무겁고 모기는 어찌나 많은지 시작부터가 막막했다.

‘최대한 자연에서 얻은 것들로 생존한다’는 것이 입도 전 스스로 세운 방침이었다. 갈 때까지는 가보고 그래도 안 되면 현지인의 도움을 받거나 가져간 도구를 이용하자는 나름의 수칙이었다. 나무줄기를 이용해 벤 나무들을 고정하려 했지만 그럴 만큼 튼튼한 줄기는 없었다. 결국 가지고 온 끈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3주를 머무르는데 섬에서 나가기 하루 전쯤에야 집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무인도 생활에 점점 익숙해져 간다.

집을 짓는데 꼬박 3일이 걸렸다. 나무를 해오는데 하루, 형태를 잡는데 하루 반, 코코넛 잎을 베고 지붕을 만들고 1층의 울퉁불퉁한 나무들 위에 까는데 또 반나절이 걸렸다. 땅을 깊게 파고 기둥을 박은 후, 모래로 덮었다. 그리고 물을 붓길 여러 번, 모래가 젖고 마르길 반복하면서 단단해졌다. 집의 형태를 잡고 지붕을 만드는 것은 나무를 해오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순탄한 과정이었다.

경험한다는 것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이가 불을 만지고 ‘불이란 뜨거운 것이고, 뜨거운 것이란 이런 거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인도에 가기 전에는 불을 피우는 것만 걱정했지 불씨를 살릴 생각은 못 했다. 또 고기를 잡을 생각만 했지 어떻게 먹을지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의 형태만 생각했지 무엇으로 나무와 나무를 고정하고, 어떻게 나무를 베고, 옮길지에 대한 생각은 한 적 없었다. 자연 상태의 인류로 돌아가게 해준 무인도는 나에게 다양하게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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