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아웃도어, 50년의 역사
대한민국 아웃도어, 50년의 역사
  • 이지혜 기자 | 사진 아웃도어편집부, 국립공원관리공
  • 승인 2015.08.24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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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변화 분석

월간 <아웃도어>가 창간 10주년을 맞았다. 이에 월간 <아웃도어>는 국내 아웃도어 문화를 주도하고 트렌드를 이끄는 매거진으로서 ‘다시 보는 아웃도어’를 마련했다. 이번 호는 그 두 번째로 국내 아웃도어의 50년 역사를 재조명한다.

전쟁의 아픔을 안은 50년대
50년 전, 6.25전쟁의 포화가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대한민국에 아웃도어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사실은 그렇다. 동란에 국토재건조차 시작되지 않았을 무렵, 우리 국민은 반강제적인 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집이 없어 전쟁이 훑고 간 길거리에서 잠을 청하고, 산에 들어가 나무를 캐며 생존을 유지했다.

피엘라벤, 마무트, 하그로프스, 밀레 등 세계적인 아웃도어 브랜드가 꽃을 피울 당시, 우리는 아웃도어가 무언지도 모른 채 지붕 없는 곳에서 잠을 청해야만 했다. 슬픈 현실의 한편에는 더 아픈 사실이 존재했다. 분단의 아픔이 가시기 전 옆 나라 일본이 1950년 안나푸르나와 1953년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1956년 마나슬루까지 정복했다는 소식은 탐험을 꿈꾸는 한국 시조 산악인들에게 부러움과 함께 도전의식을 고취시켰다.

▲ 88년 소백산 굴취 쓰레기 운반작업 당시.

미군이 남기고 간 흔적

60년대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씨앗을 품고 있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미군의 주둔이 시작되며 조금씩 도시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한 것. 국가 안보가 구축되며 국민은 집을 짓고, 경제 활동을 시작했다. 아웃도어의 발전은 역시나 미미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미군에 의해 버려진 군화를 고쳐 신으며 등산화를 만들어 신고 버려진 군복을 주워 아웃도어 활동복으로 만들어 입는 이들이 있었다. 또 미군이 쓰다 버린 칼을 이용해 산과 들에서 식량을 구했다. 이처럼 60년대까지의 국내 등산 장비 시장은 미군이 야전에서 사용했던 군수품을 개조해 만든 텐트, 침낭, 배낭, 운동화가 전부였다. 수입 등산 장비는 사치품으로 분류돼 높은 관세를 물리던 시절이어서 등산객들은 군용 반합으로 취사를 하고 군복을 입고 산악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자연휴식년제 이전의 북한산 계곡.

한편, 50년대 일본의 히말라야 역사가 시작됐지만 한국은 그보다 조금 늦은 60년대에 히말라야 등반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었다. 박철암 선생의 경희대 산악반 다울라기리2봉 정찰대가 그 주인공이다. 박철암 선생을 필두로 한 경희대 산악반은 당시 히말라야에 가기 위해 정부 허가를 받았다.

수많은 연석회의와 탁상공론 끝에 1962년 드디어 문교부로부터 허가가 내려왔지만, 등반대가 아닌 ‘정찰대’라는 조건이 달려있었다. 경제 상황이 상황인 만큼 사람들에게 터무니없는 일로 낙인찍혔던 탓에 원정대를 후원하겠다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도도 없어 일본에서 얻은 손으로 그린 약도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정찰대는 결국 무명봉 등반 중 길을 가로막은 빙벽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지만, 한국 아웃도어 역사에 길이 남는 업적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 80년대 속리산 화양계곡의 여름철 단속모습.

아웃도어 산업의 여명기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며 아웃도어 산업은 드디어 여명기를 맞는다. 아웃도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시절. 도로 확장과 산업화로 인한 소득의 증가는 국민의 레저 욕구를 높였고 비로소 국산 등산 장비 시장이 생겼다.

현재까지 알려진 국내 최초의 등산용품점은 1970년 종로에 문을 연 ‘설우상사’다. 창립주인 김세경 회장은 1972년 국내 최초로 등산용 팬츠를 제작했고 1975년 등산복 개념을 도입한 의류전문브랜드인 ‘스노우프랜드’를 시장에 선보였다. 스노우프랜드는 당시 한국에서 유통되던 모든 등산복의 기본 패턴을 직접 개발하고 제작하며 국내 최초로 맞춤형 등산복을 도입했다.

▲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은 한국 등산장비점의 살아 있는 증인이다.

▲ 전쟁 이후 시장에는 미군이 사용하던 군수물품의 거래가 많았다.

‘설우상사’와 쌍벽을 이룬 아웃도어 브랜드는 1973년 종로에 문을 연 ‘동진산악’이다. 현재 블랙야크의 시초인 동진산악은 10평의 공장과 3평의 매장으로 시작했다. 자체 공장에서는 ‘자이언트’라는 브랜드로 배낭을 만들어 산악회에 판매했다. 이어 ‘프로 자이언트’라는 이름으로 확장해 텐트와 침낭, 신발 등 각종 등산 장비를 제작했다. 또한 1973년 7월 코오롱이 ‘코오롱스포츠’라는 브랜드로 국내 첫 선을 보이며 시장에 뛰어들었고 이후 등산용품 업체들이 잇따라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많은 기업이 조직과 자금력을 앞세워 아웃도어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대중적이지 못했던 문화의 영향으로 대부분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다품종 소량 생산이라는 특수성과 어음, 외상 거래가 많았던 탓도 있었다.

▲ 남대문 시장의 역사는 17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 각종 미군 군용 원조물자를 거래하며 시장이 활성화됐다.

▲ 상인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아웃도어 산업의 발전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며 ‘둘만 낳아 잘기르자’의 슬로건이 대유행하던 80년대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여가 활동에 활발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특히 고(故) 고상돈 대원이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1977년 이후 국내에는 본격적인 등산 붐이 일었다. 대학 산악동아리와 일반인 산악회가 생겨나면서 전문산악인들은 동대문시장 장비점으로 몰려들었다.

곳곳에서 산악회와 야유회 문화가 부흥했고, 이에 맞춰 아웃도어의 활성화가 시작됐다. 프로스펙스, 에코로바, K2, 블랙야크, 레드페이스 등 유명 국산 브랜드의 시발점인 시기이기도 하다. 레드페이스는 1966년 국내 최초로 암벽 등산화를 개발하기도 했다. 등산 외에도 캠핑과 낚시로 대표되는 여가 생활까지 발전하며 다양한 제품군이 등장한다.

▲ 국내 첫 아웃도어 브랜드인 스노우프랜드 매장.
▲ 한국 등산문화의 역사와 함께 하는 곳.

이처럼 사회가 안정화되기 시작하던 80년대부터 삶의 여유와 여가에 대한 개념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경치 좋은 국내의 계곡이나 강가, 바닷가 등에서 텐트를 친 뒤 놀고 자는 것이 ‘멋진 휴가’로 인식되었었다. 이 시절 캠핑의 열풍 덕분에 캠핑 관련 용품으로 코오롱 스포츠는 급격히 성장했고 더불어 그 밖의 많은 중소기업이 캠핑 관련 용품 산업에 발을 얹었다. 하지만 급속히 유행한 아웃도어 활동 탓에 수많은 산과 강, 계곡에 쓰레기가 버려지는 등 국민성의 한계를 냉정하게 직면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자정작용과 기능성, 그리고 양면성
90년대의 아웃도어 시장은 80년대의 급격한 성장세에 자정작용과 기능성이 추가되었다. 환경오염이 심해지며 대대적인 이슈가 되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아웃도어 활동과 ‘자연보호’에 관심을 두게 됐다. 제품은 용도에 따라 기능성이 강조됐다. 국내 최초로 고어텍스 소재가 등장했고 디자인적 요소도 가미됐다. 신발과 의류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코펠과 버너, 이동 가능 주방과 텐트 등의 캠핑용품을 제안하는 시장이 늘어났다.

▲ 동대문에 위치한 설악스포츠.

특히 등산이 중장년층 스포츠로서 중소기업, 가두매장, 할인점 등을 중심으로 활발히 유지됐다. 지금의 아웃도어 시장의 모태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한 시기다. 동시에 이는 현재까지도 강하게 ‘아웃도어=등산’이라는 공식이 생기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결국, 90년대는 ‘아웃도어=등산’ 공식이 퍼지며 시장을 확장할 수 있게 만든 요인이자 동시에 시장 확장에 제어 요인이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이 구축된 시기다.

한편으로는 국민 의식의 향상으로 여행 숙박 문화가 발전하며 아웃도어 산업이 동시에 정체기를 맞기도 했다. 아웃도어 붐 업(Boom up)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던 2002년 초까지 캠핑용품 시장과 등산복 및 등산용품 시장은 위기를 겪었던 것. 몇몇 유통업체는 아웃도어 부분을 축소하거나 없앤다는 이야기까지 나돌기도 했다.

▲ 동대문의 동방레져 상점의 내부.

절정 맞은 아웃도어 부흥기

2000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아웃도어 산업이 부흥기를 맞는다. 정부의 주5일 근무제 시행, 국민소득의 증대, 2002년 월드컵 개최 등으로 한국형 아웃도어 문화가 형성되며 대대적으로 시장이 성장하게 된다.

2000년대는 최초로 등산 인구 1천만 명 시대가 온 시기다. 점차 여가 생활을 즐기는 인구의 증가로 주말 레저, 여행족의 확산에서 파생된 신규 브랜드의 국내 전개와 빠른 성장을 맞았다. 또한, 아웃도어 문화가 국내에 정착되며 과거 등산에만 국한되었던 아웃도어 업체들의 수익성 증가와 아웃도어 시장의 저변 확대를 위해 트렌드에 발맞췄다. 여성 아웃도어를 중심으로 패션화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다.

기업은 일반 캐주얼 및 스포츠와 차별화되는 마케팅을 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몽블랑 등 전 세계의 고산을 먼저 등반하고자 하는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며 자사 브랜드의 기능적 우수함을 매체에 내세워 제품의 우수성을 나타내고자 했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일본, 프랑스, 미국 등 세계적인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를 수입 유통하려는 국내 업체도 급격히 늘어났다. 2003년 이후 연평균 25%씩 늘어나는 고성장 시대가 지난해까지 계속되기도 했다.

▲ 오래된 아디다스 광고.

아웃도어의 경계선을 지우다

지난 2014년 아웃도어 시장은 7조3000억 원이라는 규모에 이르렀다. 현재 이 시장의 80% 이상을 10여 곳의 대형 브랜드가 차지하고 있다.

‘아웃도어=등산복’이라는 고정관념도 조금씩 깨져가고 있다. 아웃도어(outdoor)가 아닌 ‘아웃도어+메트로(metro)’의 약자인 ‘아우트로(outro)’ 시대가 열렸다. 이처럼 이제 아웃도어 시장은 아웃도어만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트렌드로 인식되었다. 골프웨어, 스포츠웨어, 남성 캐주얼웨어 등 다른 복종에서까지도 ‘아웃도어 라인’ , ‘아웃도어 감성’이 넘쳐 난다.

▲ 초창기 나이키 브랜드 광고.

한편, 기술 발전과 더불어 캠핑 열풍으로 인해 업계는 고성장을 이어갔지만,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2010년 이후 성장세는 둔화하는 양상이다. 이에 따라 업계는 아웃도어와 패션 브랜드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라이프스타일을 강조한 제품들을 내놓으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고 있다.

각 브랜드는 기능성 제품 위주에서 캐주얼 라인으로 주력군을 변경하고 캠핑, 골프, 키즈 부문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국내 아웃도어 시장을 포화상태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레저 활동과 인간이 추구하는 건강과 쉼이 계속되는 한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며 발전을 거듭할 것이라고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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