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가 허락한 인물…14좌 등반인물 집중탐구
히말라야가 허락한 인물…14좌 등반인물 집중탐구
  • 이지혜 기자
  • 승인 2015.08.1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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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석·엄홍길·한왕용·오은선·김재수·김창호 대장 등 한국 산악인 6인

지난 호에서는 히말라야 14좌의 이름과 유래에 대해 알아봤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14좌를 등정한 인물은 누가 있을까. 이번 호에서는 히말라야가 허락한 한국 산악인에 대해 집중 탐구해본다.

▲ 박영석 대장. 사진제공 박영석탐험문화재단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 박영석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가 허락한 첫 번째 한국인은 박영석 대장이다. 1963년 서울에서 출생한 박영석 대장은 1993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하며 촉망받는 산악인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2001년 한국인 최초이자 세계 8번째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했다. 그의 성공적인 등반 뒤엔 그를 지켜온 신념, ‘1%의 가능성’이 있다.

“1%의 가능성만 있다면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좌우명이었다. 2005년 인류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에 성공했을 때, 많은 이가 박영석 대장의 도전을 끝났다 생각했다. 실제로 수많은 기업과 대학에서 자문위원과 교수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영석 대장은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짐을 꾸렸다.

새로운 그의 도전은 14좌에 코리안 루트를 내는 것이었다. 한국 최초의 14좌 등정가인 만큼 후배들에게 길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이유였다. 자신이 먼저 시작해야 후배들이 따라올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히말라야로 갔다. 하지만 2011년 안타까운 실종소식이 날아들었다. 박영석 대장의 죽음은 아직까지 한국 산악계의 비극으로 꼽힌다.

“산악인은 산에 있어야 산악인이다. 나는 죽는 그 날까지 탐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던 박영석 대장. 1%의 가능성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현재까지도 후배 산악인들의 정신적 루트가 되고 있다.

▲ 엄홍길 대장. 사진제공 엄홍길휴먼재단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인, 엄홍길

엄홍길 대장은 히말라야 14좌뿐만 아니라 로체샤르와 얄룽캉, 로체와 캉첸중가 위성봉(衛星峰)까지 오른 세계 최초의 산악인이다. 196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1985년 히말라야와의 인연을 시작한다. 이후 엄홍길 대장의 도전은 22년 동안 무려 38번 계속된다.

2000년 여름 K2를 끝으로 14좌 완등의 대업을 달성하기까지 그는 수없이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혈육 같은 셰르파를 눈앞에서 잃고 설사면에서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같은 루트로 등반한 외국 대원들이 캠프의 식량과 장비를 가져갔는가 하면 눈사태로 후배 대원과 동행한 취재 기자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2007년 로체샤르를 마지막으로 16좌 완등에 성공한다. 이후 엄홍길 대장은 2005년 에베레스트에서 숨진 동료 산악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휴먼 원정대’를 꾸려 등정하기도 했다. 이후 2007년부터는 상명대 석좌교수로서 대학생들에게 도전정신과 꿈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엔 ‘엄홍길휴먼재단’을 발족해 그와 함께 등반하다 사고를 당한 셰르파와 후배 대원들의 유족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그는 대한산악연맹 대외협력위원장으로서 산악계를 위해 노력하고, 장애인재활병원을 짓는 ‘푸르메재단’의 홍보대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 한왕용 대장. 사진 아웃도어 편집부
히말라야의 휴머니스트, 한왕용
한왕용 대장은 2003년 여름 엄홍길과 박영석에 이어 한국 산악인 가운데 세 번째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자로 등극했다. 1966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난 그는 1985년 전주 우석대 산악부에 들어가며 산과의 인연을 시작한다. 이후 1995년 초오유와 시샤팡마 중앙봉을 시작으로 마칼루, 시샤팡마, 칸첸중가, 가셔브롬 2봉과 브로드피크 등을 거쳐 2003년 14개 거봉 등정에 성공했다.

한왕용 대장은 히말라야의 휴머니스트로 통한다. 1995년 에베레스트 등정 당시 박영석 대장의 간곡한 부탁으로 루트를 변경하고 부상당한 한국 대원을 데리고 8700m 고지에서 안전지대까지 이끌고 내려온 일은 지금까지도 산악계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1996년 여름 천산산맥 포베다에서도 위험한 상황에 빠진 타 원정대 대원을 살려내고, 1997년 가셔브룸 1봉에서는 정상 정복 후 하산 길에 크레바스에 빠진 동료 대원을 구출해 베이스캠프까지 데리고 내려오기도 했다.

그는 14좌를 등정하고 지금은 히말라야의 청소꾼으로 살고 있다. 후배들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지금도 누군가가 버렸을 지도 모를 쓰레기를 주우러 히말라야로 떠나고 있는 것. 14좌 완등자라는 설명보다는 산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한왕용 대장과 이보다 더 어울리는 것은 없을 것이다.

▲ 오은선 대장. 사진제공 블랙야크

한국이 낳은 최초 여성 완등가, 오은선

오은선 대장은 한국 최초로 14좌를 완등한 여성 산악인이다. 1966년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태어나 1993년 에베레스트 등반에 참여하며 히말라야의 매력에 빠진다. 1997년 가셔브룸 2봉으로 시작해 2010년 안나푸르나를 마지막으로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하지만 2009년 칸첸중가의 정상등정 여부가 논란으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대한산악연맹은 그가 칸첸중가 등정에 실패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이후 국외의 많은 전문가는 오은선 대장이 등정에 성공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1986년에 인류 최초로 무산소 14좌 완등을 마치며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산악인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대표적이다. 그는 또한, 오은선 대장과 직접 만나 인터뷰한 뒤 “내 관점에서는, 모든 게 들어맞는다. 당시 정확히 꼭대기에 서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눈보라가 있었다면 정확한 정상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몇 미터를 못 갔을 수도 있지만, 등정은 등정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오은선 대장은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 남성 산악인과 견주어도 어지간한 상황에서 눈 하나 까딱 않을 수 있는 배짱과 담력을 가졌다. 등반 중 동료 산악인의 시신을 맞닥뜨리고도 에베레스트 정상에 등정했다. 키 155cm, 체중 47kg의 여자가 해냈다는 것을 믿기 힘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은선 대장은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낳은 최고의 여성 산악인임이 분명하다.

▲ 김재수 대장. 사진제공 코오롱스포츠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산악인, 김재수

김재수 대장은 대표적인 ‘고소체질’ 산악인이다. 그는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하며 힘든 적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고소적응력이 뛰어난 산꾼이다. 고소체질은 고산족인 셰르파처럼 희박한 공기 속에서도 평지처럼 활동할 수 있는 체질이다.

틈틈이 산을 오르면서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사업체를 운영해야 했던 김재수 대장은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들어선 뒤 본격적으로 산을 향한 꿈을 꾸게 된다. 그러다 1990년 부산과 일본 산악인들이 합동으로 추진한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꾸려 떠나게 되는데 탁월한 체젤 덕분에 함께 등정한 대원들보다 무려 2시간이나 먼저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기도 했다.

1991년에는 대산련 시샤팡마 남벽 원정대에 참가해, 당시 한국 최고의 고산등반가로 꼽혔던 김창선 대장과 함께 남벽을 돌파했다. 이후 김재수 대장은 로부체 동벽, 칸텐그리, 초오유, 포베다 등의 등정 기록을 세운다. 또한, 그는 1996년 엄홍길 대장과 함께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과 최단시간 등하산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김재수 대장은 고(故) 고미영 대장과 함께 마나슬루, 마칼루, 칸첸중가, 다울라기리를 연이어 등정하며 14좌 완등을 향해 나아갔다. 고미영 대장이 추락사한 당시에 가장 좌절하고 슬퍼했던 사람 중 한 명도 김재수 대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미영 대장이 못 다 이룬 14좌 등정을 대신 이뤄냈다. 히말라야의 고산을 오를 때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는 그는 분명 범상치 않은 대한민국의 등반가다.

▲ 김창호 대장. 사진제공 김창호

등반가이자 히말라야의 탐험가, 김창호

김창호 대장은 현재까지 14좌를 완등한 마지막 한국인이다. 김창호 대장은 세계 최단기간, 국내 최초 무산소 14좌 완등을 이뤄낸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산악인, 등반가의 수식어보다 어쩌면 탐험가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릴지 모른다.

1969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김창호 대장은 서울 시립대 무역학과에 입학한 후 우연히 산악부에 입회하며 산에 대한 열정을 쌓아갔다. 1993년 그레이트 트랑고타워를 완등하며 히말라야의 참맛을 느낀 김창호 대장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무려 1700여 일 동안 히말라야를 탐사했다.

그는 빙하 끝 세상이 궁금했다. 술에 취해서도 파키스탄 지도를 베야만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히말라야에 대한 갈증은 그를 탐험가의 길로 인도했다. 9년간의 탐험 기간 동안 김창호 대장은 무릎까지 차오른 눈 덮인 고개를 넘기도 했고, 칠흑 같은 크레바스 속으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 장대를 들고 빙하를 건너기도 했다. 빙하에서 길을 잃기도, 빙하 위에 쳐놓은 아슬아슬한 텐트 안에서 홀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수많은 탐사와 도전 끝에 김창호 대장은 2005년 본격적인 14좌 완등에 도전한다. 2006년 파키스탄의 가셔브룸 1봉과 2봉을 시작으로 2013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하며 유색인종 최초로 14개봉 무산소 완등의 기록을 세웠다.

호기심으로 출발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던 김창호 대장. 14좌를 완등한 그는 아직도 세상 곳곳이 궁금하다 말한다. 탐험은 끝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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