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장에서 | 5월은 가족의 달 맞냐?
캠핑장에서 | 5월은 가족의 달 맞냐?
  • 서승범 차장
  • 승인 2015.05.29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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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글

해변에 아이스크림 장수가 있습니다. 이야기하기 쉽게 해변은 길이가 100m이고 아이스크림 장수는 2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두 아이스크림 장수는 해변의 어느 위치에 있는 게 가장 좋을까요? 물론 해변에는 사람들이 고르게 있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사람들이 다 너처럼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핀잔이 이곳저곳에서 들리지만 무시하겠습니다. 25m와 75m 지점에 있으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사먹는다고 할 때 가장 조금 움직이는 사람과 가장 많이 움직이는 사람의 차이가 제일 적습니다. 매 1m마다 사람이 있다면 가장 멀리 움직이는 사람이 25m를 걷겠지요. 0m 지점에만 2명이 모여 있다면 끝에 있는 사람은 100m를 걸어야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이유는 ‘가장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전체적으로 가장 효율적일까요?’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케이.

현실은 좀 다릅니다. 25m 지점에서 장수 A는 생각합니다. ‘어차피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나한테 사 먹을 수밖에 없고, 내가 저쪽으로 좀 옮기면 저쪽 손님을 좀 뺏을 수 있겠는데?’ A가 30m 지점으로 옮깁니다. 1~30m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어차피 고정 손님입니다. 51m 지점에 있는 손님은 75m 지점에 있는 장수 B 대신 30m 지점에 있는 A에게 갈 것입니다. 땡볕의 뜨거운 백사장에서 5m는 제법 먼 거리니까요. B도 바보는 아니죠. 아이스케키 통과 파라솔을 챙겨 슬금슬금 A쪽으로 이동합니다. 밥벌이는 소중하니까요.

결국 A와 B는 해변의 정중앙에서 만날 확률이 높습니다. 손님을 뺏기지 않으려면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인 거죠. 해변의 양 끝에 있는 사람들은 백사장만큼이나 달궈진 울화통을 참고 50m를 꾸역꾸역 걸어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야만 합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의 연쇄반응이 지극히 비합리적인 결과를 만드는 꼴입니다.

아닙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면 합리적인 결과를 낳았겠지요. 이건 문학이나 예술의 차원이 아니라 경제학과 사회학의 영역입니다. 정해진 이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어디서 잘못된 걸까요? 두 아이스크림 장수의 선택이 잘못입니다. 아니 그럼 저 놈이 내 손님 빼앗아 가는데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가만 있으라는 얘기냐.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선택이 합리적이었다는 표현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익을 따라 위치를 선택한 것입니다. 합리성의 기준에 이익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 뭐가 있을까요?

당연하게도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 이익과 손해라는 기준에 대해 가장 명쾌한 해설은 다산 선생께서 이미 수백 년 전에 내리셨습니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천하에는 두 개의 큰 기준이 있다고 했습니다. 시비是非와 이해利害. 이 두 기준의 조합에 따라 네 가지의 분류가 나오게 됩니다. 옳은 일을 하면서 이익을 취하는 것, 으뜸이죠.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다가 해를 입는 것. 인간적으로는 가장 존경심을 품게 되긴 합니다. 다음은 옳지 못한 일로 이익을 취하는 것과 바르지도 않고 이익도 못 보는 지경이 남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할까요? 옳은 일로 이익을 취하긴 어렵고 손해를 보면서까지 옳은 일을 하긴 싫으니 이익을 위해 바르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지요. 결국 정의도 지키지 못하고 이익을 거두지도 못합니다.

정확히 1년 전 울릉도로 배낭을 메고 캠핑을 떠났습니다. 허위허위 성인봉에 올라 노숙에 가까운 야영을 하고 내려와 몽돌이 예쁜 바닷가에서 캠핑을 하면서 쉬고 있는데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던 후배 기자가 소리쳤습니다. “편집장님, 배가 뒤집어졌다는데요?” “아, 다 구조되었다네요”까지 듣고 ‘그럼 그렇지’ 하며 다시 촬영을 했습니다. 다음날 돌아오기 위해 찾은 도동항에서 처음 뉴스를 접했습니다. 4시간 넘게 배를 타고 동해를 건너면서 실시간 속보를 봤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랬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그러고 있습니다. 1년이 지났지만 세월호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에 대해 말하고 적었습니다. 맥락을 살피는 것도, 아픔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도, 사실과 감정의 씨줄과 날줄을 엮는 솜씨도 저보다 뛰어난 이들의 글이 많으니 시간 내셔서 살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소설 쓰는 김훈과 박민규, 노래를 만들고 불렀으며 지금은 기획을 하는 김민기의 글과 말이 와 닿았습니다. 박민규의 글에서는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가 남았고 김훈의 글에서는 ‘그 바다는 국가가 없고 정부가 없고 인기척이 없는 무인지경이었다. 그 바다에서 하얀 손목들이 새순처럼 올라와 육지를 손짓하다가 손목들끼리 끌어안고 울었다’를 읽으며 울었습 니다. 김민기는 “사람들이 죽었거든. 죽음을 가지고 내가 함부로 묘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곡을 못 만든다 했습니다.

저는 공감하는 능력이 조금 모자란 편입니다. 그나마 두 꼬마를 키우고 있으니 이해와 공감의 폭이 조금은 넓어지고 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시간은 홑겹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사실 가족이든 친구든 오랜 시간을 두고 쌓아온 관계에 흐르는 시간은 모두 중첩입니다. 부모의 시간이 좀 더 절실하겠지요.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처럼 날뛰는 녀석들을 볼 때조차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의 묘한 떨림, 분만실의 정체 모를 비릿함, 핏덩이를 처음 안았을 때의 벅찬 긴장감, 처음 아이를 목욕시키면서 떨어뜨릴까봐 노심초사했던 순간들, 졸린 녀석 안고 어르고 달래도 찡얼대기만 할 때 치밀었던 미움과 짜증, 두 발로 서서 첫 발짝을 뗐을 때 느꼈던 환희, 장염에 걸려 주삿바늘 두세 개 꼽고 축 쳐졌을 때의 안쓰러움과 안타까움 등이 겹쳐서 보이고 느껴집니다.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웠던 낱 순간들이 숱하게 덮이고 쌓여 만든 어떤 무늬가 정이고 사랑일 것입니다. 그렇게 정성껏 쌓아올린 삶의 한 축이 한 순간 무너져 사라지면 남은 삶이라고 온전하겠습니까? 그냥 송두리째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무참하게 무너져 궤도에서 이탈해버린 삶을 되도록 원래의 궤도 가까이 되돌리는 게 남은 이들이 할 일이고 정치政治가 할 일입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합니다. 남은 자에게 주어진 몫을 해야 하니까요.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위로와 재발을 막기 위한 노력. 사실 같은 말입니다. 둘 다 핵심은 사고의 정확한 원인을 아는 것이니까요.

1주기를 맞습니다. 맹골수로에는 사람이 남아있고 유가족은 거리에, 광장에 있습니다. 1년 동안 이어진 주장과 외침과 호소, 피곤합니다. 먹고 사는 일 또한 막중합니다. 허나 이해를 따지기 위해 시비의 기준을 놓친 건 아닌지 궁금합니다. 결국 정의를 지키지도 못하고 해를 입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 되니까요. 거리에 목련이 묵직하게 피었다 봄비에 툭툭 떨어집니다. 꽃 진 자리에 잎이 돋을 겁니다. 꽃 같은 아이들이 진 곳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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