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래의 시간
돌고래의 시간
  • 글 사진 최상식 기자
  • 승인 2015.05.2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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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씨의 캠핑 이야기

봄바람이라기엔 좀 차갑고 겨울이라기엔 따스한 공기가 스며드는 3월 초의 어느 날, 캠핑을 가고 싶어 즉흥적으로 짐을 가볍게 꾸렸다. 바람이 강하게 불지 않아 텐트를 치기에 적당했다. 차에서 내려 바닷가를 바라보니 넘실거리는 파도 넘어 아스라이 가파도와 마라도가 눈에 들어왔다. 텐트와 침낭, 매트리스 정도만 챙겨 해변으로 내려가 모래 위를 걸었다. 누구의 시선에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공간에 와 있다는 생각에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오롯이 담는 캠핑을 할 수 있었다.

이곳은 길에서 가깝지만 찾으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타닥타닥 불타는 나무들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뜨거운 코코아 한 잔 마시기 좋은 곳이다. 보름달이 바다를 비추는 날이면 더욱 좋다. 나는 이곳에서 운 좋게 만난 돌고래들을 떠올렸다.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무리를 지어 수 킬로미터를 계속 오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느낌은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제주에서 차를 가지고 일 년에 3, 4만km를 몰고 다니면서도 돌고래를 만나는 행운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무리를 지어 바다를 유영하는 남방 큰 돌고래 떼를 한 번씩 만나면 아쿠아리움 같은 곳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야생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 겨울 들판 위의 노루 떼와 바다 위로 떠오르며 유영하는 돌고래의 모습을 보며 날것의 자연을 만난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기계에 둘러싸여 우리가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마음의 감각들이 자연 속의 야생을 마주한다. 평소와는 다른 마음의 결들을 두드려주는 느낌을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었다.

돌고래뿐만 아니라 야생의 풍경을 만났을 때 마음에 전해지는 강렬함이 특히나 오래 기억에 남는데, 대설주의보가 내리던 지난겨울에 본 노루 떼도 그렇다. 설경을 담으러 중산간의 초원지대를 누비고 다니다가 본 수 십 마리의 노루 떼가 내 작은 발자국 소리에 놀라 초원을 벗어나 숲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한라산을 오르면서도 많이 보았고 산간의 숲길을 걷거나 오름에 가서도 노루를 심심치 않게 만났지만, 그 겨울 들판 위에서 만난 수 십 마리의 노루가 뛰어다니는 그 야생은 지금껏 내가 보아온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내 마음 어느 한 곳을 건드려주며 나를 매혹시켰다.

캠핑을 하러 깊은 오지로 들어가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귀를 깨우고, 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뭇잎들의 풍경에 지친 눈을 정화시키고, 낮게 피어난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빠진다. 숲에 번져오는 햇살은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길을 걸으며 밟아보는 흙길의 편안함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톡톡 건드릴 때 ‘이게 오롯한 자연의 힘이구나’ 생각한다.

이제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봄이 느껴진다. 애월의 장전리 벚꽃들은 바람에 흩날리며 낭만을 선물하며 떨어졌고, 우도의 돌담 사이엔 유채가 가득 피어 있을 것이다. 녹산로를 달리다보면 수 킬로미터 이어진 유채꽃들이 바람에 넘실거릴 것이고, 가파도의 청보리들이 ‘봄 제주’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할 것이다. 따뜻한 제주의 봄은 현재진행형이다.

사월이면 고사리장마라고 비가 자주 내리는데, 이맘때쯤 오름에서 야영하다 보면 중산간의 외딴 곳에도 이른 새벽부터 동네 주민들이 몰려와 고사리를 따러 다닌다. 새벽녘 웬 차가 이런 중산간도로에 이래 많나 싶을 정도다. 사월의 제주에서나 볼 수 있는 이 풍경은 바닷가 아닌 중산간에서만 볼 수 있다. 이제 한가로이 텐트 안에서 양쪽 지퍼를 열어두고 재킷 하나만 입어도 별로 춥지 않은, 오름 위에서 석양과 에메랄드빛 바다를 눈앞에 두고 볼 수 있는 그런 따뜻한 계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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