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여행자
걷는 여행자
  • 글 사진 최상식 기자
  • 승인 2015.04.2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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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씨의 캠핑 이야기

지금 나는 제주를 다시 걷고 있다. 사라봉을 시작으로 제주의 동쪽부터 서쪽까지 해안길을 따라서. 열흘은 족히 걸림직한 거리에 배낭의 짐을 가볍게 싼다고 했는데도 20키로는 우습게 넘긴 무거운 배낭이 어깨를 파고든다. 그동안 잠자고 있던 몸의 세포들을 하나하나 깨우며 나를 ‘걷는 여행자’로 바꿔가고 있다. 이미 예전에 걸었던 길이며 눈에 익숙했던 풍경들이지만 집을 나오면 모든 곳들이 여행지가 되는 게 제주의 매력이다.

좀 오랫동안 걷고 싶었다. 꽃피는 봄이 오면 늘 봄 풍경을 맞으러 차를 타고 다녔는데, 이번엔 좀 걷고 싶었고 길을 걸으며 단순해지고 싶었다. 오직 길 위를 걷는 내 두 다리와 눈앞에 펼치지는 제주의 풍경에만 집중하면서, 마음에 쌓인 먼지들을 털어내고 싶었다.

3월이 왔고, 꽃샘추위야 늘 있겠거니 했지만 이번 봄 날씨는 여느 봄보다 더 지독하다. 기온이야 영하로 떨어질 일이 없는 남도의 섬이지만 살을 에듯 온 몸을 파고드는 제주의 바람은 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진다. 봄인 듯 눈부시게 푸른 바다와 하늘 그리고 선선한 봄바람을 보여주었다가 하루만 지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서운 바람과 차가운 공기가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몸을 내 의지와 다르게 밀어내곤 하는 제주의 날씨.

이렇게 배낭을 메고 걷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같은 풍경도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저 해질녘에만 가곤했던 첫 출발지 사라봉에 갔을 때, 평일 낮인데도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주말마냥 많은 것에 놀랐다. ‘이 사람들은 다들 출근 안 하고 이 시간에 여기서 무얼 하는 거지’ 라는 생각에 옷차림이나 행동들을 유심히 보게 된다. 그 틈 사이로 걸어가는 여행자들이 눈에 들어왔고, 차를 타고 움직였으면 보지 못할 해안가 바위 틈새의 야생화들이 발아래에서 나를 보아달라며 활짝 피어 있었다. 월정리 모래사구엔 마치 사막에서나 보았을법한 바람이 실어 나른 흔적들이 물결처럼 남아있었다.

겨울에도 가끔 야영을 다녀서 ‘별로 춥지 않겠지,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가져온 얇은 사각매트와, 늦봄이나 초여름에나 쓸법한 침낭은 야영을 할 때 마다 아쉬움이 남았다. ‘내가 왜 그랬지? 두꺼운 걸 왜 차에다가 두고 왔을까’ 며칠 동안 밤새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바람소리와 추위에 억지로 일어나야만 했다.

아침부터 달과 별이 뜨는 밤이 올 때 까지, 아스팔트 위를 걸을 땐 밥 먹는 것도 귀찮았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서 어디에라도 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먹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그럴 때면 당장의 배고픔보다 잠이 먼저였다. 그 달콤한 유혹에 저항도 없이 굴복했던 밤들이 여러 날이었다.

해안을 따라 걷다보면 지인들이 하는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들을 지난다. 응원을 보내기도 하지만 제일 많이 듣는 말이 “힘들게 왜 걷냐?” 라는 얘기다. 딱히 구구절절 얘기할 필요가 없다. 기타를 치는 형에겐 “형이 기타를 치는 거랑 똑같다”고, 다른 걸 좋아하는 이들에겐 당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거나 빵을 굽는 것처럼 그냥 내가 좋아서 걷는 거라고. 딱히 뭔 이유가 필요하겠냐고 답할 수밖에.

오랫동안 걸어보면 발에 잡힌 물집의 고통도 있고 무거운 짐이 어깨를 짓누름에 아프기도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지나면 몸은 적응을 하며 밸런스를 찾아간다. 달리기 하는 사람들이 ‘러너스 하이’라는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오랫동안 걷다보면 몸이 먼저 리듬을 타고 걸어가는 시간들이 온다.

제주의 반을 돌아 해질 무렵 서귀포 항에 서니 범섬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마음의 무게도 가벼워지고 발걸음에도 힘이 났다. 항구에 있는 배들에 불이 켜졌고, 바람이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이 먹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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