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장에서 | 인형을 사야겠어
캠핑장에서 | 인형을 사야겠어
  • 서승범 차장
  • 승인 2015.03.31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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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글

“잠깐만요”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커다란 손이 쑥 들어오더니 금속으로 된 육중한 문을 홍해처럼 갈랐습니다. ‘누가 타나 보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오후 4시 반의 나른한 표정으로 저 위만 바라봤습니다. 다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해 두 층 정도를 올라갔을 때 사람들의 눈길이 마지막에 탄 남자에게 쏠렸습니다. ‘뭐야’ 싶은 눈길도 있었고, 큭큭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는 표정도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뭐야’ 했다가 웃음을 참는 쪽이었습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숱 굵은 수염이 까칠해보이는 사내의 한 손에는 유치원 여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금발 인형이 들려 있었습니다. 웃었던 이유는 인형이 아니라 남자의 손이었죠. 물건이나 제품을 들듯 손이나 다리를 잡은 게 아니라 한 팔에 뉘여 안고 있었거든요. 다른 손으로는 금빛 머릿결을 가다듬어 귀 뒤로 쓸어 넘겼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저희 사무실과 같은 층에 어린이 장난감 유통회사가 있거든요. 분명 그의 손길은 샘플의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하기 위한 담당자의 노력이었겠지만, 맥락을 모르고 보는 이들에게는 조금 이상해 보이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어요. 딸이 없어 인형이나 머리핀 따위 살 일이 없었던 저는 순간 생각했습니다. “인형을 사야겠어.”

꼭두각시라고 있죠. 뭐 생김새도 예쁘지 않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 눕혀 놓으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널브러져 있는 인형이죠. 장식용으로 별 쓸모가 없는 이 인형이 사람의 손을 타기 시작하면 재미있어집니다. 머릴 까딱까딱 움직이고 손을 흔들고 발길질을 하기도 합니다. 입술을 딸싹거리며 말을 하기도 하지요. 서양에서는 이런 인형을 마리오네트Marionette라고 합니다. 혹은 이런 인형으로 꾸미는 인형극을 일컫기도 합니다. 시작은 르네상스 시기 이태리였습니다. 교회에서 어린이 교육을 위해 인형을 만들었던 거죠. 동서고금에 교육은 지루한 법, 마리오네트는 교회 밖으로 나와 생명을 얻었습니다.

세속의 내용을 다루고 여느 민중극이 그렇듯 성적인 코드도 흡수하면서 사람들을 웃기기도 울리기도 했습니다. 재미만한 동력이 또 있을까요? 마리오네트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고 합니다. 이태리 시칠리아에서는 19세기에 마리오네트를 이용한 오페라 공연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유네스코는 이 오페라 데이 푸피L’Opera dei Pupi를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시칠리아 팔레르모 인형극장에서 오페라 데이 푸피를 꼭 보고 싶습니다.

마리오네트 인형을 산다면 체코에서 사고 싶어요.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어 독일어 사용을 강요당하면서 체코어를 지키기 위해 마리오네트를 발전시켰죠. 결국 체코의 말과 글을 살려냈고 저항의 문화를 일구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나치에 점령당했을 때 상징과 풍자로 나치에 저항했고 때문에 많은 인형술사들이 게슈타포에 체포되었습니다. 퍼핏 애니메이션Puppet Animation으로 발전시킨 이지 트릉카Jiri Trnka는 ‘동유럽의 월트 디즈니’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구글에서 퍼핏 애니메이션과 이지 트릉카로 검색하면 몇 개의 영상을 볼 수 있는데 ‘손the Hand’는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되질 않을 정도로 상징과 은유가 뛰어납니다. 소름이 돋을 정도죠.

사람의 손놀림에 의해 생명을 얻는 마리오네트와 달리 스스로 인형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광대. 교육방송의 미니 다큐멘터리를 보니 광대를 뜻하는 영어 표현은 두 개네요. 클라운clown과 삐에로pierrot. 우리말로는 같은 광대지만 영어 단어의 뜻은 조금 다릅니다. 빨간 코의 광대 클라운이 밝고 쾌활하고 자유로운 광대라면 검은 눈물의 삐에로는 비극적인 캐릭터입니다. 동네에 닭튀김집이 문을 열었을 때 꼬맹이들에게 풍선으로 고양이나 칼을 만들어 나눠주는 건 클라운이죠. 삐에로는 주로 무대에 서지요. 우선 보면서 웃기에는 빨간 코의 광대가 편하겠지만 여운을 남기는 건 검은 눈물 삐에로입니다.

다큐멘터리는 마르셀 마르소Marcel Marceau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유대계 프랑스 사람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아버지와 함께 아우슈비츠에 끌려갔지요. 거기서 아버지를 잃고 어렵게 살아남은 그는 하얀 얼굴 빨간 입술 검은 눈물 뒤에 숨어 말이 담지 못하는 침묵의 세계를 몸짓과 표정으로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팬터마임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한 건 어린왕자였을까요 생텍쥐베리였을까요. 마르셀 마르소는 ‘가장 중요한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전합니다. 유투브 같은 동영상 사이트에서 마르셀 마르소를 검색하면 수많은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도 마르셀 마르소를 좋아했나 봅니다. 그의 문워크는 마르셀 마르소가 ‘바람을 향해 걷는다’에서 선보인 마임 동작을 응용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인형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거나 갖고 싶다고 열망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피규어도 따지고 보면 인형인데 지난호 배낭처럼 피규어를 간절히 원한 적은 없었어요. 마흔도 훌쩍 넘어 뒤늦게 인형에 마음을 빼앗길 줄이야. “인형을 사야겠어” 생각하고도 사실 스스로 그 생각에 조금 놀랐습니다. 어울리잖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에 들어와 지난해 가을에 보았던 한편의 마리오네트 동영상을 떠올렸습니다.

외국의 길거리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느끼한 포즈와 건방진 듯한 발놀림까지, 보면서 한참 웃었습니다. 어린이들은 인형의 움직임에, 엘비스를 아는 어른들은 인형의 공연에 환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물론 저도 완전히 무장해제 당해 동영상이 끝날 때까지 낄낄댔습니다. 잘 알지도 못했던 인형극에 매혹당해 자료를 더 찾다가 마리오네트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인연을 통해서 마르셀 마르소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작은 공연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열리는 캠핑 축제를 생각해봤습니다. 20명의 인형술사가 캠핑장 곳곳에서 다양한 마리오네트로 공연을 하며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그러다가 관객들을 이끌고 중앙 무대로 오죠. 마리오네트들은 중앙 무대에 모여 합창을 합니다. 혹은 전설적인 록 그룹들의 공연을 마리오네트로 재현해보는 건 어떨까요? 레드 제플린이나 퀸, 들국화 등 이제는 무대에서 경험할 수 없는 공연을 마리오네트로 해보는 거죠!

그렇게 왁자지껄한 한 판의 공연이 끝나고 나면 하얀 삐에로가 텅 빈 무대를 가로질러 나옵니다. 열광 뒤에 찾아온 침묵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무대 중앙에 선 삐에로는 팬터마임으로 캠퍼들을 웃기고 울립니다. ‘어떻게?’에서 막혔습니다. 상상력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깨닫고서야 현실로 돌아옵니다. 남은 시간과 써야 할 원고를 헤아려 시베리아 벌판 같은 모니터 화면을 검은 글씨로 채워갑니다.

팬터마임 내용요? 그건 극작가들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외길로 가야 하는 원고는 자주 멈추고 막혀 더디 나가지만 생각은 물과 같아서 막히면 뚫린 곳을 찾아 흐릅니다. 팬터마임 시나리오에서 막힌 생각은 ‘직접 배워볼까’로 ‘변질’되어 다시 흐르기 시작했고, 마리오네트 공연을 마치고 숨을 고르던 맥박은 캠핑장에서 나무로 마리오네트 인형이나 깎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다시 빨라집니다. 제페토 할아버지 같은 삶도 멋지잖아요.

아, 일단 마감부터 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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