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수업 | 환상의 빛
문학수업 | 환상의 빛
  • 선정 및 발췌 서승범 차장
  • 승인 2015.03.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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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내와 젖먹이를 버리고 멋대로 죽어버린 당신에게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말을 걸고는 합니다”

당신은 선로 한가운데를 전차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고 합니다. 느슨한 커브여서 사람의 모습이 조명등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거리였답니다. 경적 소리에도, 엄청난 브레이크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당신은 치이는 순간까지 똑바로 걷고 있었다고 합니다. 서 있던 승객 여섯 명 정도가 급정차로 튕겨나가 부상을 입었답니다.

자살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신문에도 조그맣게 그렇게 보도되었는데 저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자살할 만한 어떤 이유도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경찰 측에서도 여러모로 조사를 했습니다만 아무런 동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체에서는 약물도 알코올도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몸도 건강하고, 술도 마시지 않고, 도박도 하지 않고, 그 밖에 여자관계도 없고, 죽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빚도 없고, 그렇기는커녕 첫 아이가 태어난 지 세 달밖에 되지 않아 남자로서는 기운이 넘칠 시기였습니다. 경찰관도 머리를 갸웃거릴 정도로 죽을 만한 이유 같은 건 무엇 하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 ‘환상의 빛 幻の光’ 미야모토 테루 宮本輝 지음, 송태욱 옮김 (2014, 바다출판사)
바다에 면한 허술한 민가는 바람이나 파도의 물보라를 막기 위한, 이대로 만든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거기에 얼음처럼 굳어져 들러붙어 있던 눈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돌풍으로 후두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날아갔습니다.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의 물보라가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붕에 쌓인 눈이 날아올라, 마치 바로 지금 하늘에서 내리는 것처럼 산기슭을 향해 날아갑니다.

길에는 저와 그 남자밖에 없었습니다. 털장갑을 낀 손으로 머리에 감고 있던 머플러를 누르면서 저는 흠뻑 젖은 채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때 아주 시커멓던 하늘도 바다도 파도의 물보라도 파도가 넘실거리는 소리도 얼음 같은 눈 조각도 싸악 사라지고 저는 이슥한 밤에 흠뻑 젖은 선로 위의 당신과 둘이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다봐 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뭘 물어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피를 나눈 자의 애원하는 소리에도 절대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아아, 당신은 그냥 죽고 싶었을 뿐이었구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는 뒤를 쫓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순식간에 멀어져갔습니다. (‘환상의 빛’ 21~22쪽, 59~60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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