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의 섬 크레타
황소의 섬 크레타
  • 글 임지용 | 사진 임지용 송세진 기자
  • 승인 2015.03.1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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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역사 문화 여행 | 문명의 시작

고대 문명은 농업혁명의 기반에서 일어났다. 농업혁명의 주역은 당연히 밀과 같은 벼와 식물이었으나 비로소 문명을 이루게 된 데에는 대형 포유류 ‘소’의 역할이 크다. 쟁기를 끄는 소의 힘은 곡물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 씨앗을 일일이 손으로 세어가며 심던 것에서 쟁기에 소의 힘을 더해 무작위로 뿌리는 대량생산 농경법이 탄생한 것이다. 생산량이 증대되고 인구가 늘어났으며 결국 그것이 문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 이다산 가는 길. 사방에 핀 올리브 나무들

그런 연유로 고대 문명에서 ‘소’는 농경-목축 혁명이 이룩한 대다수의 초기 문명의 상징이자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의 목적지 그리스 문명의 시작점인 크레타는 한마디로 ‘황소의 섬’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번 여행 중 그리스의 초기 문명의 시작점, 크레타 섬에서 그 증거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초기 문명을 찾아서
아테네에서의 첫날 키클라데스 박물관의 관람을 마친 우리는 렌터카를 반납하고 크레타 섬으로 가기 위해 피레우스 항구로 향했다. 피레우스로 향하는 버스는 비가 오는 날씨에 느릿느릿 기어갔고 결국 우리 뒤통수를 쳤다. 우린 배가 떠나기 10분 전이 되어서야 항구에 도착했다.

피레우스 항은 세계 1/4의 배가 있는 나라의 대표 항구답게 어마어마했다. ‘이 거대한 사이즈의 항구에서 우리 배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일행 다섯 명 모두가 비에 젖어 더욱 무거워진 배낭을 짊어진 채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도무지 헤라클리온으로 가는 배는 찾을 수가 없었다.

▲ 헤라클리온 전경

시간이 점점 조여 오는 그때 우연하게도 항구로 진입하던 택시가 눈에 띄었다. “기사님 지금 당장 크레타로 가는 배 앞으로 가 주세요! 돈은 두 배로 드릴게” 트렁크에 무거운 배낭과 짐들을 냅다 던져 넣고 택시 기사에게 모든 운명을 맡겼다. 그렇게 가까스로 우린 배에 올랐고 돈을 두 배로 받게 된 기사는 행복에 두 손을 맞잡아 올렸다.

피레우스에서 크레타까지의 거린 대략 100km, 시간은 9시간 걸린다. 21세기 고속 페리가 시속 50km로도 못 가는 것이다. 그만큼 바다는 저항력이 강하다. 그렇게 초기 크레타인들은 지중해라는 거대한 성벽을 지녔기 때문에 침략 없는 태평성대를 구가했으며 크노소스 궁에 성벽 따윈 필요치 않았다. 또한 크레타인에게 지중해는 길이었다. 그들은 지중해를 통해 초기 농경 문명국들과 교역을 했고 부를 획득해서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리스의 페리는 세계적인 해운국답게 상당히 거대하고 외관도 근사했다.

▲ 페리호에서의 식사

배에 오른 일행들 모두 하루 종일 굶은 탓에 일단 배의 식당칸에서 적당한 음식들을 골라 밥을 먹었다. 모양은 그럴싸했지만 맛은 형편없었다. 그리스 전체 여정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없던 음식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마음이 한결 놓이자 우리의 상황이 보였다. 우리가 예약한 가장 싼 티켓은 밤을 새우는 9시간의 운행 동안 마룻바닥이나 식당칸에 자리를 잡고 때우는 형식이었다.

우리 일행은 귀족 가문의 여성들이 두 명이나 있었고, 모두 땀과 비로 젖은 터라 피로에 절은 상태였다. 뜨거운 물에 몸을 지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돈을 좀 쓰더라도 침대칸으로 옮기는 게 좋을 거 같아 승무원들과 거래를 하고 침대칸에 자리를 잡았다. 작은 샤워칸에서 떨어지는 뜨거운 물방울들이 온몸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아~아~아나스타샤~’ 그렇게 크레타로 가는 배에서 에게 해의 첫 밤을 맞이했다.

▲ 크레타의 과일

다음날 새벽 갑판에 올랐다. 저 멀리 크레타의 빛이 보인다. 1979년 백열등의 발명으로 인류는 지구의 밤 세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지구의 두 세계가 이어졌다면, 에디슨의 백열구는 밤이라는 정복되지 않은 세계를 우리 수중에 놓이게끔 발명된 것이다. 우리가 1만3,000년 전의 초기 크레타인들이었다면 섬을 볼 수 없었을 테고, 저기에 저렇게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을 텐데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듯 이 어두운 새벽녘에 1km 밖의 크레타를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해가 조금씩 밝아오자 디키리Dikri 산이 보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제우스의 얼굴이라 생각했던 바로 그 산이 우리 앞에 있다. 항구에서 차를 빌려 헤라클리온 시내로 향했다. 일행은 헤라클리온 바닷가에 도착해 한낮의 지중해를 만끽했다. 이것이 그리스구나 하는 느낌을 넘치도록 담았다.

▲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은 크레타 섬을 찾는 여행자라면 꼭 들러야 할 곳이다. 쾌적한 설비와 깔끔한 유물 정리가 돋보이는 박물관이다. 언덕배기에 위치한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에 들어서자 우선 온통 고급 대리석재로 만들어진 건축물에 놀랐다. 화장실마저 전체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아름답고 비싼 백색의 암석이 석회암의 나라 그리스에선 흔하디흔한, 너무나 일상적인 표현인 것이다.

전시실에 들어선 우리는 초기 크레타에 사람이 정착한 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의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단연코 눈에 띄는 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황소의 상징들이었다. 책을 통해 열심히 익힌 덕에 유물들이 낯설지 않고 반가웠다. 가장 큰 수확은 크노소스궁에 새겨진 프레스코화들의 원본을 그대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다.

2500년 전 인류의 손으로 그려진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표현 양식들, 이집트의 영향이 분명 느껴지지만 그 다채로운 색감과 표현의 자유분방함에서 자신만의 것을 이룬 크레타 특유의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떻게 말하면 린타로의 만화 같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표현력이 대담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뒤, 우린 고대 성터인 크노소스로 향했다.

▲ 헤라클리온의 개구쟁이들

황소로 시작해 황소로 끝나다

미궁이라 불린 크노소스 궁이 세워질 당시 동아시아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크노소스는 대략 BC1900년에 건립되었다. 중국 대륙 상나라 건국의 300년 이전이며,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의 약 1900년 전인 셈이다. 오랜 화석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규모 있고 규격화된 궁이자 신전을 축조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 아티카 사람들은 3층이나 되는 이곳의 웅장함에 놀랐고, 처음 만나는 수백 개의 방에서 길을 잃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신화에 크노소스 신전은 미궁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소를 좋아하는 동물성애자인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파가 있었는데, 에우로파에게 반한 신 중의 신 제우스가 아름다운 흰 소로 변해 에우로파를 유혹한 뒤 성교를 나눈 후 에우로파를 크레타에 내려놓는다. 그렇게 에우로파를 시조로 하는 크레타인들은 황소의 자손이 되었다. 임신한 에우로파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BC1580년 크레타 미노스 문명의 전성기를 이끈 미노스 왕이다. 미노스 왕은 포세이돈에게 황소를 보내준다면 그 황소를 재물로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 크노소스 궁전 앞에서. 시간여행자 일행들.

▲ 크노소스 궁전

그러나 막상 황소를 받은 미노스는 황소의 훌륭함에 반해 욕심이 생겼고 결국 다른 황소를 재물로 바꿔치기한다. 이에 노한 포세이돈은 저주를 걸어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를 황소 성애자로 만든다. 파시파에는 황소에 대한 욕정에 사로잡혀 밤낮없이 애달파하다가 때마침 크레타에 와있던 발명왕 다이달로스에게 암소처럼 생긴 나무 모형을 만들라 지시한다. 파시파에는 그 모형에 들어가 거대 황소와 수간하고 결국 임신을 하게 된다.

그렇게 이종교배로 탄생한 괴물이 바로 소머리의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다.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로 하여금 미궁 크노소스를 만들게 하고 끔찍한 모습의 식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어 버린다. 그리고 그의 먹잇감을 확보하기 위해 아테네가 위치한 아티카에 9년마다 여성 7명, 소년 7명, 소녀 7명의 희생양이 될 인간 공물을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티카의 왕자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처단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고 결국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미노타우로스를 죽인다.

▲ 소를 상징하는 작품들

▲ 크노소스를 상징하는 그림도 전시되어 있다.

이 신화에서 우리는 미노스 왕국의 번영과 멸망, 그리스 반도의 부상 등의 은유를 찾아낼 수 있다. 해상왕국 크레타는 황소를 숭배한 농경민족이었으며 고대 그리스 세계를 지배한다. 그 황소가 괴물로 표현되어 결국 목이 잘린다는 이야기는 농경 기반의 크레타 왕국의 몰락을 상징한다. 크레타 문명은 BC1500년 경 산토리니 섬의 화산 폭발로 인해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미궁 속 시간여행자
우리가 향한 다음 목적지는 크레타 섬의 중심, 아기 제우스가 자식들을 삼키던 아버지 크로노스에게서 빠져나와 몸을 숨긴 산, 이다산이다. 가는 길, 우리 행렬의 양 옆은 고운 잿빛의 올리브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스의 석회암 토양은 워낙 척박해서 곡물 농사에 적당치 못하다. 그래서 천수 농업이 가능한 억센 올리브를 경작할 수밖에 없다. 올리브의 바랜듯한 잿빛 대지는 전형적인 그리스의 풍경이다.

▲ 이다산 입구의 석회암 덩이

그렇게 올리브 밭 사이를 한참 가다 드디어 산으로의 진입을 알리는 석회암 협곡이 눈에 들어왔다. 굉장한 크기로 우리를 압도하는 석회암 동산은 실로 동아시아에서는 쉽게 마주할 수 없는 낯선 풍경이다. 이 거대한 산덩이가 생명체의 사체가 축적되어 만들어졌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생명의 거대한 뼈 덩어리를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 뼈 덩어리 위에선 크레타의 염소 끄리끄리가 이끼처럼 돋아 있었다. 아기 제우스는 아말테이아란 이름을 가진 염소 끄리끄리의 젖을 먹으며 이다산의 동굴에서 살아남았다. 저 녀석들이야말로 아말테이아의 후손 중 하나일지 모른다.

이다산의 겨울 날씨는 변덕스러워 갑작스러운 소나기와 흐린 안개의 반복이었다. 꼬불꼬불 안개 길을 넘고 넘어 표식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표식에는 핀두스의 중심이 근처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사방은 온통 안개로 뒤덮여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셋은 차를 지키고 나와 다른 한 명이 산의 정상을 올라가 보기로 한다.

▲ 이다산 입구의 석회암 덩이 위의 끄리끄리 무리들

올라가는 도중 독특한 생김새의 고산식물들이 눈에 띈다. 고지에 올라 사방을 주시하는 그때 갑자기 안개가 걷히고 바로 옆에 있는 줄도 몰랐던 이다의 설산 정상이 보인다. 그리스 일정 중 최고의 순간은 그렇게 다가왔다. 온몸이 달달 떨리는 것도 잊고 그냥 그렇게 오랜 시간 밝아오는 이다산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시간여행자의 일정은 꽤 빡빡하다. 우리는 오늘 밤 다시 페리를 타고 그리스 본토로 돌아가야 한다. 한참 경치에 빠져 시간을 보내다 우리에게 시간이 별로 없음을 깨닫는다. 돌아가자! 차에 올라 그리스 제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하니야 항으로 설정한다. 엊그제 기사에 내비의 오류 덕분에 한참을 기찻길로 운전하다 차가 레일에 낀 위험천만한 운전자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리스 여행에서 배운 교훈 중 하나는 절대로 렌터카의 내비를 특히 그리스제 내비를 믿지 말라는 것이다.

▲ 이다산 가는 길, 시간여행자

바로 그때, 내비는 우리를 이다 산의 길이 끝나는 곳까지 안내했다. 그런데 여전히 비포장을 넘어선, 길이 없는 곳을 가리켰다. 인간의 감보다 기계를 신뢰하는 나로서는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차량의 밑바닥에선 온통 자갈에 긁혀대는 소음이 가득했고 소음이 날카로울수록 일행들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이런 젠장. 가도 가도 길은 안 나오고 얕은 여울과 돌무더기들만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우리 차는 경차였다. 결국 잠시 멈춰 서서 내비가 가리키는 방향을 자세히 살폈다. “이런 젠장! 왜 이런 데서 유턴을 하라고 해!” 하니야의 방향은 정반대였다. 내비는 유턴할 곳을 찾기 위해 이런 험난한 들판까지 우리를 이끌고 온 것이다.

해는 벌써 지기 시작했고 안개는 여전했으며 우리는 헛소동으로 한 시간 반이나 낭비했다. 게다가 아까부터 자동차 계기판에 알 수 없는 경고등이 켜져 있었다. 그래도 시간상으론 여유가 있었다. ‘거리는 200km 시간은 4시간. 여유 있게 시속 60km 정도로 간다 해도 시간은 넉넉하다.’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난관에 봉착할 확률이 높다. 우리가 그랬다.

▲ 이다산 풍경

안개가 자욱한 밤의 꼬불꼬불한 길에서는 도저히 속도를 낼 수가 없다. 크레타의 도로는 그냥 전체가 깜깜이라 보면 된다. 헤라클리온을 제외한 모든 도로 사정이 그렇다. 가로등은 물론, 흔한 반사판조차 없다. 그런 상황에 끄리끄리와 양떼들은 시도 때도 없이 출몰했지만 동물을 사랑하는 우리로썬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장대비까지 우둑우둑 차를 때리니 나는 안경을 꺼내 깊게 눌러쓰고 운전석 시트를 최대한 운전대 바로 앞 가슴까지 당겨 눈을 크게 치켜뜨고 낼 수 있는 최대 속도 40km로 질주했다. 이런 꼬부랑 골목길이 4시간 내내 이어질지 예상치도 못한 채.

20분을 남겨두고 하니야에 도착했다. 이제 어제와 같은 극적인 드라마가 쓰여질 차례다. 우리는 여태껏 그렇게 고비를 넘겨왔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리스의 내비를 믿지 마라! 내비가 우리를 인도한 곳은 자동차가 넘어갈 수 없는 거대한 성벽이 쳐진 좁은 나무다리 길. 우리는 50m 앞에서 떠나는 배의 소리만 들은 채 이를 악물어야 했다. 오늘 우리에게 드라마는 없었다.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로스처럼 우리는 크레타를 헤맬 뿐이었다. 

▲ 크레타 헤라클리온 항구, 저 멀리 보이는 제우스의 얼굴을 가진 산

▲ 백합왕자 앞에서의 글쓴이 임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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