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장에서 | 배낭 구매 가이드
캠핑장에서 | 배낭 구매 가이드
  • 서승범 차장
  • 승인 2015.02.27 1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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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글

배낭이 필요했습니다. 중요한 건 배낭과 필요라는 말입니다. 배낭은 캠핑 장비 중에 가장 비싼 장비입니다. 아내에게 허락을 득하기 어렵다는 뜻이지요. 동시에 백패킹으로 캠핑을 하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장비입니다. 생김새가 마음에 들어서 혹은 브랜드가 마음에 들어서 사는 장비가 아니란 말입니다. 캠핑이 밥벌이인 까닭에 다양한 브랜드의 배낭을 써볼 기회가 생깁니다. 여기저기 떠돌면서 맛집을 순례해도 혀끝은 집밥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곁에 두고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배낭이 필요했습니다.

“아우, 어깨야.” 먼저 밑밥을 뿌립니다. 고기가 모여야 밑밥이지요. 밑밥의 조건은 맛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말로 된 밑밥은 상대방의 귓속에 쿡하고 박혀야 좋은 밑밥입니다. 우선 짧아야 합니다. 메시지가 간결해야 여운을 남길 수 있거든요. 단, “아우, 허리야”는 위험합니다. 대화의 주제가 건강으로 직행할 우려가 있거든요. 그걸 바라는 건 아니니까요. 바로 반응이 옵니다. “왜?”

“둔한 몸으로 산행 오래 하면 안 아픈 게 이상하지.” 찌가 움직였다고 바로 낚아채면 안 됩니다. 사람은 물고기가 아니니까요. 아내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조심스럽게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자책입니다. 아픈 건 내 탓입니다. 불혹은 넘긴 나이에 술의 유혹에 번번이 그리고 무참히 지는 저의 한심함을 탓해야죠. 두 번째 입질이 옵니다. “어떡하니, 힘들어서…”

말 끝에서 말줄임표가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논의를 진전시켜도 좋다는 신호입니다. 다만 성급하게 굴면 안 되죠. 아내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무심하게. “좋아지겠지.” 그 뒤로 약간의 정적이 흐를 겁니다. 이 호의적인 정적을 깨는 건 아내여야 합니다. “매번 이래야 돼?” “어떡하겠어” 한 번쯤 더 무심하게 가도 좋습니다. 분위기에 따라서 “글쎄…” 정도로 국면전환을 노려도 됩니다.

“이번 배낭은 어깨 패드가 좀 얇아서…” 뉘앙스가 중요합니다. 구매 유도를 위한 계산이 깔려 있다는 걸 아내가 눈치 채는 순간, “약 발라”, 회담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계산 대신 분석의 뉘앙스를 풍겨야 합니다. 이 고통의 원인은 무거운 배낭을 충분히 지탱하지 못하는 어깨 패드의 부실함 때문이다. 패킹이나 짐이 많아서가 아니라 배낭이라는 장비의 부실함 탓이다. 고로 뭐다? 좋은 배낭을 썼다면 이 정도로 고생하진 않는다. 이 세 문장이 저 말줄임표 점 3개에 축약된 메시지입니다.

좋은 배낭은 있다. 없어서 못 쓰는 게 아니라 비싸서 못 쓰는 거다. 이 정도는 저도 알고 아내도 압니다. 다만 얼마나 좋은지는 저만 알고 얼마나 비싼지는 아내만 모르죠. 좋은 장비의 효과는 표현에 따라 널뛰기를 시킬 수 있고 널을 어떻게 뛰느냐에 따라 가격에 대한 아내의 체감 충격은 달라집니다. 빨래를 개던 손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더니 짧은 한숨 끝에 그럽디다. “좋은 배낭 있나 알아봐 봐.”

얼마 되지 않는 이 대화가 오간 건 30초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치밀한 계산이란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제게 주어진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상대 눈빛의 미묘한 흔들림과 입가의 움직임, 둘 사이의 대기의 온도까지 감안해가며 적당한 표현과 발음, 톤, 뉘앙스, 호흡을 짧은 순간에 결정해야 합니다. 제 배낭의 운명이 거기에 달려 있으니까요.

“다 알아봤지.” 이 따위 멘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멘트입니다. 아직은 개그 콘셉트로 갈 때가 아닙니다. 소비자가격과 실 구매 가격, 해외직구 가격, 주요 옵션과 성능의 차이까지 당장이라도 프리젠테이션을 할 수 있지만 아직은 묵언수행의 단계입니다. 그냥, “그래” 정도로 마무리. 이제 배낭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면 차 포 떼고 두는 장기와 같습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아내가 잊은 것 같습니다. 그땐 배낭이라는 주제가 아니라 어깨라는 실마리를 활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아내가 어깨와 배낭을 알고리즘을 떠올리는 날 결론이 납니다.

“아 맞다, 배낭은 좀 알아봤어?” 공이 넘어옵니다.
“알아야 봤지. 한두 푼이 아니더라고.” 서브 리시브는 부드럽게.
“그렇게 비싸? 얼만데?” 예상했던 세트 플레이.
“팔구십.” 드라이하게 팩트만.
“히” 숨을 거칠게 들이쉴 때 나는 이 기이한 소리는 충격의 강도를 가늠케 합니다.

그래서 난 이미 포기했다. 포기하고 싶어 포기한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굳이 그대가 가격을 물어보니 답한 것뿐이다. 이런 메시지가 침묵을 통해 아내에게 전달됩니다. 아내의 뇌파가 활성화되는 것도 느껴집니다. 빤한 월급과 은행 잔고라는 상수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출장, 집안의 대소사, 갚아야 할 대출금 등등의 여러 변수를 감안해 수퍼컴퓨터처럼 연산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참, 지난번 출장비 신청한 건 어떻게 됐어?” 시간차 공격입니다. 시나리오에 없던.
“어떻게 되긴, 출장빈데 곧 나오겠지.” 바빠서 청구도 못 했죠. 하지만 침착하게.
“친구 무개 빌려준 건?” 백어택. 역시 예상치 못했습니다. 무개는 제 친구 아무개를 가리킵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 갖고 또 왜?” 배낭 구매를 위한 추경예산 편성이 가능하려나 봅니다. 하지만 모르는 척.

“그 돈 받고 출장비 나오면 사.” 비아이엔지오! 물론 승자는 아내입니다. 알면서도 져주셨으니. 세상에서 아내가 모르는 건 지 속으로 나은 새끼들 마음뿐이죠. 남편의 속마음 정도는 이미 오래 전에 털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 나름대로 제 할 일을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굳히기. 굳히기의 핵심은 반복과 개그입니다. 진지하게 되풀이하면 되겠습니까.

“여보, 설거지 좀 해주면 안 될까?” “당연히 되지. 배낭도 사주는데!”
“데이타 남았으면 1기가만 보내주라.” “그럼, 배낭도 사주는데!”
“손목이 왜 시큰시큰하지, 손목 좀 주물러주라” “암만, 배낭도 사주는데!”

자주 통하는 건 아닙니다. 저 정도의 가격이라면 연간 프로젝트로 진행해야 먹힙니다. 작년엔 텐트를 샀지요. 15년 정도 된 낡은 텐트를 은퇴시키고 사계절 바깥잠을 책임질 녀석을 들이면서도 공을 꽤 들였습니다. 올해는 배낭 프로젝트로 만족합니다. 저의 오래된 장비들은 탈을 잘 내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욕심을 부릴 일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아내는 이 사실까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백패킹 5개년 계획을 세웠다는 건 모를 겁니다. 들키지 않기 위하여 계획을 세운 저도 부러 깜빡깜빡 잊곤 하거든요. ‘인셉션’을 능가하는 능력과 알면서도 당해주는 덕을 겸비한 아내와 협상 테이블에 앉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덧. 가장 중요한 얘기를 빠뜨렸습니다. 성공률. 저는 100%입니다. 작전을 펼칠 때마다 성공하는 비결은 작전의 치밀함이나 로버트 드 니로도 울고 갈 메소드 연기가 아닙니다. 아내가 사줄 수밖에 없는 아이템으로 승부를 걸죠. 아이템 선정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선정의 기준은 간단합니다. 필요하냐. 단순히 갖고 싶은 건 돈이 썩어나도 안 되지만, 필요한 건 새끼들 굶기지 않는 한 됩니다. 진짜 필요한지 안 필요한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아는 법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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