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 찾아 튀어…소백산
눈꽃 찾아 튀어…소백산
  • 서승범 차장 | 사진 김해진 기자
  • 승인 2015.02.05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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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R OUTBOUND ①트레킹&캠핑

눈꽃이 화근이었다. 기습적인 폭설과 한파로 에스엔에스SNS에는 하얀 눈꽃과 상고대가 짙푸른 하늘과 어우러진 사진들이 천지였다. 사진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육안으로 보고 싶어 혼자 소백산으로 훌쩍 떠났다. 칼날 같은 상고대의 위엄에 칼바람에 베인 상처는 잊고 다시 떠났다. 내내 하늘과 기상청 눈치만 보다가 더 이상 미루지 못하고 떠난 소백산행. 포근한 날씨 탓에 녹아내린 눈꽃을 찾아 능선을 따라 기웃거렸지만 눈 시린 풍경은 없었다. 상고대가 사라진 풍경은 겨울 산줄기들의 장쾌한 파노라마가 대신했다.

▲ 비로봉을 향해 나아가는 길. 바람은 약하지만 차가웠고 풍경은 아름답기보다 장엄했다.

소백산은 명산이다. 꽃 피는 계절에는 온 능선이 연분홍으로 물들어 황홀경을 선사하고 이즈음에는 날을 벼린 바람이 칼처럼 꽂힌다. 첫 만남에서 칼바람과 마주한 이들은 다시 오기 싫어하기도 하지만 철쭉 산행으로 소백산을 만난 이는 칼바람마저 그리워하게 하는 게 소백산이다. 운이 좋았던지 첫 소백은 철쭉 끝물 무렵에 만났다. 지난달에 서대산에 올랐다가 고생깨나 했던 막내 기자는 이번 산행이 첫 소백산행이었다.

사실 애당초 목적지는 소백산이 아니었다. 겨울이니만큼 시린 겨울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서대산과 달리 평온한 설원을 보여주고 싶어 지금은 운영을 하지 않는 알프스리조트에서 설피산행이나 실컷 하려 했다. 눈이 없어 포기. 그 즈음에 지리산 바래봉 눈꽃 사진이 줄을 이었다. 일단 출발해서 달리다가 바래봉에서 열리는 눈꽃축제위원회에 전화를 걸었다. “여기 눈 없어요. 눈 오면 오세요.” 그때 칼바람 소백산을 떠올렸다.

▲ 새밭 야영장에서 머물 때는 겨울 소백산행에 대한 기대가 제법 컸다.

새밭야영장에서 시작한 새벽 산행

그래도 소백산인데… 생각했다. 불과 2~3주 전에 훌쩍 떠난 산행에서 소백산은 예의 그 칼바람과 함께 날 선 상고대를 보여주었다. 혹시나 싶어 버프를 내리고 숨을 들이키자 바람 속에 숨어있던 바늘들이 콧속에 촘촘히 박혔고, 비로봉 정상 표지판에는 그 바람이 얼려버린 상고대가 새하얗게 솟아있었다.

플라스틱 물통의 물까지 얼려버린, 그 얼음물조차 미지근하게 느껴질 정도의 추위를 피해 사람들은 정상석에서 기념사진만, 그것도 더도 말고 딱 1장만 찍고 하산길을 서둘렀다. 바람도 풍경도 대단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어의곡에 있는 새밭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잠이 들었다.

▲ 스토브에 불을 붙여 취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 겨울이라면 휘발유 버너를 써야 배고픈 사람 속 터지지 않는다.

추운 날씨에 침낭 속에 쏙 들어가 잠을 청하면서 든 생각. 날도 추운데 한뎃잠 잔다고 걱정하는 사람과 날이 덜 추워 제대로 된 훈련을 할 수 없다고 철수하는 이들. 무슨 소리냐. 오후에 도착해 텐트를 치는데 텅 빈 공군버스가 도착했다. 장교로 보이는 두 명이 내렸고 캠핑 장비들에 관심을 보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들은 비행기에서 탈출한 조종사들에게 생존훈련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소백산이 적설량이 많고 날씨도 ‘상당히’ 추워 훈련을 하기에 좋은데, 올해는 날씨가 따스해 훈련을 할 수 없어 철수한다고 했다. 날이 제대로 추워야 땅을 파는 훈련도, 견디는 훈련도, 이동하는 훈련도 제대로 할 수 있는데 그럴 수 없다는 뜻이다. 아, 비트도 아니고 텐트 안 침낭 속이라니 얼마나 아늑한가. 무림은 깊고 고수는 많다.

▲ 일출 보겠다고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능선에 올랐을 때 해가 뜬 뒤였다. 장엄한 일출은 없었다. 행일까 불행일까.

5시 무렵, 사진기자가 일어날 시간이라고 일행을 깨웠다. 가자, 일출 보러 가자. 하일천과 벌바위골을 따라 늦은맥이재로 오르기로 했다. 날이 추워 두툼하게 챙겨 입고 5분 정도를 걸어 몸을 예열시키면서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가장 두툼한 겉옷을 벗어 배낭에 넣고 아이젠을 차고 본격적인 산행을 준비했다. 출발.

아직 해가 뜨려면 멀어서 사방은 깜깜했지만 달빛은 제법 환했다. 이제 능선에 올라 시뻘건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평온한 능선을 따라 눈꽃과 상고대를 보면서 산행을 하다가 칼바람 한번 맞고 하산해 뜨끈한 국물에 든든히 밥을 먹고 텐트에서 낮잠 한 숨 자고 철수하면 출장이 마무리 된다. 이때만 해도 시나리오는 그랬다.

▲ 상월봉을 지나면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능선 산행이 시작된다.

상고대는 개뿔

벌바위골을 따라 늦은맥이재로 오르는 길은 완만했다. 봉우리로 오르는 코스보다 고개로 오르는 코스가 편안한 건 당연하지만 늦은맥이재는 소백산 능선 중 가장 낮은 지점이기도 하다. 해발 1,200m가 조금 넘는데 능선은 남으로 내려오면서 상월봉(1,356m)과 국망봉(1,421m)를 세운 후 비로봉(1,439m)에 이른다. 이후 제1연화봉과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 제2연화봉을 거쳐 죽령으로 떨어진다.

늦은맥이재에 오르기 전 해가 뜨기 전이지만 여명으로 주변은 환해졌는데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었다. 사진기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먼저 눈길을 헤치며 올랐고 나중에 본 사진 중에 일출 사진은 없었다. ‘그래, 원래 일출 보러 온 게 아니라 눈꽃과 상고대를 보고 싶었어.’

▲ 눈꽃보다 능선, 상고대보다 수묵화다.

소제목에서 눈치 챘겠지만 상고대도 없었다. 공군 조종사들이 도피 및 탈출 훈련을 접고 철수할 때 기대를 접었어야 했을까. 요 며칠 날씨가 따스했던 탓인지 능선엔 앙상한 겨울나무들만이 즐비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소리만 윙윙거렸다. 게다가 좁은 길을 에워싼 바싹 마른 뼈 같은 나뭇가지들은 수시로 옷가지에 걸리고 배낭을 잡고 버프를 벗겨냈다.

이 성가시기 짝이 없는 나뭇가지들이 봄 지나 여름에 가까워지면 연분홍 철쭉제를 벌이는 주인공들이다. 상월봉에서 비로봉 지나 연화봉까지가 철쭉 능선이다. 잠시 숨을 돌리려 쉬면서 수퍼마켓에서 산 빵과 보온병의 커피를 마시면서 그랬다. “야, 눈꽃은 못 봤으니 철쭉꽃이라도 보자. 5월에 다시 오자.” 기대하시라. 어쩌면 6월호 엠에스알의 ‘밖으로 튀어’ 꼭지는 데자부 산행이 될지도 모르겠다.

▲ 첫 소백산을 겨울산행으로 장식한 막내 기자는 바람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셀카를 찍어댔다.

▲ 비로봉 정상석. 비로봉에는 2개의 정상석이 있다. 경상북도 비로봉과 충청북도 비로봉. 우리는 충북에서 올라왔기에 경상북도 비로봉 쪽에 서봤다.
헛고생은 아니었다. 겨울산의 풍경이 꼭 눈꽃에서 정점을 찍는 건 아니니까. 우리가 본 건 장쾌한 능선이었다. 모든 나뭇가지에 설화가 만개했다면 저 산줄기들은 순백으로 뒤덮여 마냥 아름다웠을 것이다. 앙상한 나목들이 그대로 갈색의 살을 드러내 마루금을 장식하니 봉우리들은 곳곳에 우뚝하다.

겨울 소백으로 첫 소백산행을 경험한 막내 기자는 능선을 걷는 내내 그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장갑을 벗지 않아도 잠깐 쉬면 그새 손끝이 시려지는 바람에 굴하지 않고 수시로 겨울 산줄기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어 댄다. 지치지도 않고 말이다.

그 에너지를 부러워하다 문득 우리가 꽤 오랜 시간을 걸어왔다는 걸 알았다. 이른 새벽 출발 전에 뭔가를 먹지 않았다는 사실도. 때는 마침 아니 하필 점심시간. 비로봉 정상석 주변에는 산악회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바람도 잔잔하고 대피소도 좁으니까 여기서 점심 먹고 하산합니다.” 배낭을 뒤져봤다. 챙겨온 빵과 커피는 국망봉 지나 새참 삼아 먹었고 초콜릿 바와 사탕 몇 개, 귤 두어 개가 전부였다. 물은 충분히 있었다. 반 이상이 얼어버려 물통이 흔들릴 때마다 써그럭써그럭 소리가 나는 게 흠이긴 했지만.

▲ 다음엔 배낭 가볍게 꾸려 버스 타고 오고 싶어 찍어둔 새밭 버스 시간표. 아마도 철쭉이 한창일 때 즈음?
때로 그리운 소백의 칼바람
산 잡지에 들어가기 전, 내가 산행을 잘 할 수 있을까, 산을 일로 다녀도 좋아할 수 있을까 싶어 겨울에 혼자 산행을 떠난 적이 있다. 첫날 올랐던 치악산 비로봉. 제법 산행의 기억이 좋아 내친 김에 한 산 더 오르기로 했다. 지도를 보아하니 소백산이 멀지 않다.

원주에서 영주 가는 버스표를 끊으면서 “소백산 가는 버스 맞죠?” 물었더니 매표원이 친절하게 확인한다. “비로봉 있는 소백산 말씀하시는 거죠?” 난 그때 그걸 몰랐다. “아뇨, 비로봉은 치악산이고요, 저는 소백산요.” “그러니까 ‘소백산 비로봉’하는 그 소백산 아니에요?” 친절하게 한번 더 확인하려는 그를 향해 나는 소리쳤다.

“저 오늘 비로봉 다녀온 사람이에요. 그건 치악산이라고요. 저는 소백산 간다고요. 네!” 잠시 머뭇거리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는 차표를 건넸고 나는 무사히 도착해 소백산국립공원 안내도에서 ‘정상 비로봉’ 글자를 확인해야 했다. 진리의 빛을 세상에 퍼지게 하는 비로자나불의 기운이 깃든 비로봉은 더 있다. 금강산도 비로봉이요, 오대산 속리산도 비로봉이다.

어쨌거나 그땐 산이 제법 괜찮았던 모양이다. 연달아 2개의 비로봉을 연달아 맛보고 산 잡지에 들어가 처음 간 출장이 백두대간 미시령~진부령 구간이었다. 늦은 시각 미시령 휴게소에서 오르막을 치고 올라 텐트를 쳤는데 바람이 엄청났다. 아침에 보니 나무의 가지가 죄다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 눈은 제법 있지만 등산로는 잘 다져져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아이젠은 필수다.

나중에 황동규 시인의 시 중에 ‘미시령 큰바람’이라는 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미시령 큰바람과 소백산 칼바람. ‘풍경 전체가 바람 속에 / 바람이 되어 흔들리고 / 설악산이 흔들리고 / 나는 나를 놓칠까봐 / 나를 품에 안고 마냥 허덕였다’는 시인의 표현처럼 큰바람은 나를 들어 올려 흔드는 듯했다. 소백산 칼바람은 이름값이라도 하듯 온몸 구석구석을 쑤시고 지나갔다. 추운 겨울 날씨 탓이든 관계 속에 작아진 탓이든 잔뜩 웅크리고 있어 작아진 나를 발견할 때면 그 모질었던 바람이 문득문득 그립다.

소백산에 다녀온 후로 가끔 폭설 소식이 들려오곤 한다. 어김없이 눈꽃과 상고대 사진이 여기저기를 메운다. 그래도 그 겨울의 산 능선 풍경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거다. 다시 보자, 5월에.

▲ 잠깐 휴식. 능선 타고 넘는 바람이 차갑고 세 바위를 바람막이 삼아 잠시 숨을 돌린다.

▲ 겨울산행의 원칙. 덥기 전에 벗고 춥기 전에 입고 배고프기 전에 먹어라, 그리고 쥐가 나기 전에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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