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구원
길의 구원
  • 서승범 차장 | 사진제공 이십세기폭스
  • 승인 2015.02.05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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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와일드(Wild)’

몇 년 전에 서점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 때문이었다. 헤진 빨간 끈이 풀어진 낡은 등산화 한 짝. 제목은 <와일드>. 한 여자가 4,000km가 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the Pacific Crest Trail을 홀로 걸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극복해냈다는 얘기다.

중간 몇 페이지를 읽어봤지만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는 마음 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지난해 이 책을 바탕으로 한 영화 얘기를 들었다. 지금은 책을 읽고 나서 영화를 볼 기대에 부풀어 있다. 책이 나올 즈음이면 이미 영화를 보고 피시티 걷겠다고 미국행 비행기 표를 알아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의 저자이자 4,285km를 걸은 셰릴 스트레이드Cheryl Strayed의 이야기다.

가난과 폭력으로 점철된 불행의 시절을 견디게 했던 건 엄마였다. 어두운 터널 지나 겨우 행복을 맛보려던 때 엄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랜 유년 동안 셰릴을 지배했던 불행이 다시 찾아왔다. 아니 차라리 불행에 길들여진 셰릴이 스스로 불행을 불러들였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지나가는 장면처럼 피시티를 알게 되고 ‘이런 덴 도대체 누가 가는 거야’는 ‘여기나 한 번 가볼까’를 거쳐 ‘걷고 나면 뭔가 삶이 달라질 거야’로 바뀐다. 말이 4,285km이지, 서울-부산을 5번 왕복 할 거리를 걸은 거다. ‘박 배낭’을 지고서. 그 길은, 거기서 만난 자연은, 그 길을 걷는 행위는 그에게 뭘 가르쳐줬을까?

배우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주인공은 리즈 위더스푼Reese Witherspoon이다. 전형적인 금발의 미녀 역할만, 때로는 백치미를 곁들인 아가씨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던 배우다. 이번 영화에서는 여정 내내 화장기 하나 없이 땟국물 질질 흐르는 민낯으로 셰릴 스트레이드를 연기한다.

그는 ‘몬스터’라는 별명을 얻은 30kg짜리 배낭을 메고 황량한 들판과 얼음장처럼 차가운 계곡, 바위산 등을 걷고 건너고 올랐다. 연기를 위한 눈물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힘들어 눈물을 흘릴 때 ‘셰릴은 이런 과정을 거쳤구나’ 생각하며 연기했다는 배우. 덕분에 예쁜 그의 외모를 감상할 기회는 별로 없겠지만 대신 우리는 아름다운 인간을 만날 수 있겠다.

리즈 위더스푼은 제작도 겸했다. 출연 섭외를 받고 연기를 한 게 아니라 책을 읽고 이걸 꼭 영화로 만들어야겠다 다짐해 저자와 협의하고 감독과 상의하고 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단 얘기다. 실제 주인공과 영화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를 나누는 건 이미 무의미하다.

셰릴 스트레이드는 며칠 전 자신의 페이스북(/CherylStrayed.Author)에 킹 목사의 말을 인용해두었다. “날 수 없다면 뛰어라, 뛸 수 없다면 걸어라, 걸을 수 없다면 기어라. 무엇을 하든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맞다. 길은 걷는 자의 몫이고 인생도 그렇다. 피시티를 걷기 전과 후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삶은 원래 그랬지만, 걷고 나서야 깨달았을 뿐이다. 책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아마도 길이 가르쳐주었으리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인생처럼 나의 삶도 신비로우면서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내 곁에 있는 바로 그것.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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