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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장에서 | 그 나이를 처먹도록
캠핑장에서 | 그 나이를 처먹도록
  • 서승범 차장
  • 승인 2015.01.30 2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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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글

12월 말입니다. 마왕 신해철이 떠난 지 두 달이 되어갑니다. 노래를 불렀던 이를 추모하는 방법은 그의 노래를 듣는 거겠지요. 노래를 들으며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고 헤아리고 공감하는, 그래서 일상 속 삶의 방향과 노래가 가리키는 곳의 간극을 좁혀보려 노력하는 겁니다.

감수성 예민한 중고등학교 시절 ‘워크맨’을 갖지 못해 ‘빠’는 될 수 없었지만 신해철은 나의 고딩 시절을 관통했습니다. 무스로 머리를 넘긴 이승철의 노래는 수염이 나기 시작해 삐뚤어지고 싶은 고삐리의 마음을 잡기 역부족이었고, 거칠고 달관한 듯한 김현식의 노래는 동경할 수밖에 없지만 다가갈 수 없는 세계였으니까요. 그래서 신해철의 노래를 듣게 되었고 무릇 사내란 좋아하는 여자를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할 줄 알고 잃어버린 나를 만나기 위해 때로 모두가 잠든 새벽에 나에게 편지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진 찍는 김해진 기자는 신해철 키드입니다. 아침마다 그의 차를 함께 타고 출근하는데 신해철이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가 나온 다음날부터 아침 선곡이 달라졌습니다. 무한궤도와 넥스트, 모노크롬의 노래들이 발표된 순서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재생되는 가운데 한강을 건너고 자유로를 달리곤 했습니다. 출장길 역시 마찬가지였죠. 그가 선곡한 노래들은 익숙한 것도 흥얼거릴 정도인 것도 들어본 듯한 것도 낯선 것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귀에 익은 노래든 ‘그래, 이런 가수였지’라는 생각과 함께 흘러갔습니다.

그러다 나온 노래가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였어요. 거친 리듬에 직설적인 노랫말을 얹은 노래죠. 그의 선곡은 모노크롬 앨범이 아닌 크래쉬 5집에 있는 노래였습니다. 목이 터질 듯한 목소리로 안흥찬이 내게 물었습니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인생 전부를 걸어보고 싶은 그런,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위안으로 삼고 있습니다. 진짜를 찾으라고, 자신만의 길을 가라고 권하는 글도 사람도 사방에 차고 넘치는 까닭에 충고는 그저 그런 상투적인 멘토링으로 겉돌 뿐 귀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불쑥 들어온 노랫말. ‘그 나이를 처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원곡에는 ‘그 나이를 먹었도록 그걸 하나 몰라’지만 나는 크래쉬 버전이 더 마음에 듭니다. 스무 살 정도는 그냥 먹는 거지만 마흔 넘게 알아야 할 걸 모르면 좀 센 표현이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 질문은 내 속에서 이어졌습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뭘까? 생각해보니 나는 한 번도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헤아린 적이 없었습니다. 내 또래 남자들은 부모와 주변의 기대와 상관없이 스스로 원하는 게 뭔지 묻는 법을 배우지 못해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에 더 익숙한 편입니다. 내가 잡지사에 들어간 후 만난 전문의 과정의 친구가 나에게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이제 너도 취직해야지.”

나는 또래 중에서는 그나마 하고픈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한 축에 속합니다. 중요한 건 ‘하고픈 일’이 아니라 ‘원하는 것’, 그러니까 밥벌이와 상관없이 만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상관없이 내 자신을 위해 하고 싶은 것이 뭐냐는 거죠. 그것이 요리든 미용이든 출세든 성공이든 탐험이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유지하는 것이든.

내 방 벽에는 지도가 한 장 붙어 있습니다. 지도의 이름은 ‘생애를 건 여행 지도Trips of a Lifetime Route Map’입니다. 세계의 유명한 트레일 코스들이 그려진 그림 지도인데 그중 유독 마음이 끌리는 곳은 파타고니아입니다. 아웃도어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남미의 거대한 산군 파타고니아. 형편없는 체력의 몸이 부셔져라 걷고 걸어 세상의 끝과 같은 거기에 다다르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펑펑 울고 지쳐 쓰러져 잠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에서 깨면 새벽 미명에 붉게 물든 피츠로이든 토레스 델 파이네든 아니면 낯설기 짝이 없는 대자연이 날 보고 있겠지요. 그곳의 풍경들은 마치 ‘여기가 세상의 끝이다’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여행은 준비를 필요로 하지만 계획을 꼭 따르진 않는 법입니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오랜 여행은 치밀하고 꼼꼼한 준비가 필수지만 떠나고 돌아오는 일정은 계획 대신 순리를 따르기 마련이니까요. 떠나고 싶은 혹은 그곳에 다다르고 싶은 마음이 한 켜 한 켜 쌓여 역치의 수준에 이르는 순간 그냥 떠나는 것입니다. 꽃봉오리가 툭 터져 꽃을 피우듯 그렇게. 여행문학의 신기원이라는 <파타고니아 In Patagonia>를 쓴 브루스 채트윈 Bruce Chatwin 은 1974년 어느 날 다니던 직장에 ‘6개월 간 파타고니아로 떠남’이란 한 줄짜리 전보를 부치고 파타고니아로 홀연히 떠났습니다. 근사하지 않습니까?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시작은 별안간 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비틀어지고 어긋난 삶에서 벗어나고자 피시티 PCT, Pacific Crest Trail 4,285km를 걸은 셰를 스트레이드 Cheryl Strayed는 “이런 식으로,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진 모습으로 살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REI 의 진열대에 놓여 있던 여행안내서가 떠올랐다. 계산을 기다리며 줄을 서서 그 책을 집어 들었을 때는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것이 아닌 어떤 징조처럼 여겨졌다.”

지금도 몇 가지 징조들이 주변과 제 마음 속에서 느껴지긴 합니다. 잠깐잠깐 떠나는 토막 캠핑 혹은 토막 여행도 무척 좋지만, 그것들로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긴 여행이 제격입니다. 관광이나 여행이라기보다 생애를 건 긴 여행, 오디세이 같은 것 말입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습니다. 긴 시간 내 마음 속에 바람들을 조금씩 쌓고 어느 순간 방아쇠를 당기면 안 떠날 도리가 없습니다. 주면 사람들에겐 온통 깊은 미안함 뿐이겠지만 무병을 앓으면 신내림을 받아야 하듯 꽃망울이 터지면 떠날 수밖에요. 비록 맞닥뜨린 현실이 이런 것이라 해도 말이죠.

“어떤 시원하고 차가운 손이 부드럽게 나를 어루만지는 듯한 기분 좋은 흥분감 속에 잠에서 깼다. 그 손은 내 벌거벗은 다리와 팔, 그리고 얼굴과 머리를 어루어만졌다. 그리고 발과 목과 손도, 그리고 얼굴과 머리를 어루만졌다. 나는 그 시원한 손이 내 티셔츠 안으로 파고들어 가슴과 배를 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중략) 드디어 그 최후의 진실을 목격할 순간이 왔다. 저 하늘에 떠 있는 달보다도 더 분명한 현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나를 어루만지고 있는 그 작고 시원한 손은 결코 손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수백 마리의 작고 축축한 참개구리였다. 작고 미끈거리는 참개구리떼가 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나는 좀처럼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문득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앞으로 걸어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와일드 W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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