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군의 위엄이 바람 되어 불다…평창 선자령 산행
동장군의 위엄이 바람 되어 불다…평창 선자령 산행
  • 이두용 차장 | 사진 이두용 앙계탁 기자
  • 승인 2015.01.2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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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with MAMMUT | ①Mountain Climbing

“PYEONGCHANG(평창)!”
2011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대한민국 ‘평창’이 울려 퍼졌다. 2018년 열릴 동계올림픽대회의 개최지로 평창이 선정된 것이다. 10년간 두 번의 실패를 경험한 평창은 순식간 축제의 장으로 변했다. 세계는 겨울 스포츠의 고장으로 일제히 평창을 주목했다. 이제 3년 앞으로 다가온 동계올림픽. 분주한 손길이 평창의 곳곳을 단장하고 있다. 명실상부 겨울 도시로 거듭나고 있는 평창. 눈이 소복이 쌓인 날, 평창으로 겨울여행을 떠났다.

우리 땅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을 따르다 보면 이국적인 풍광이 펼쳐진 아름다운 언덕을 만난다. 영화 속 거인이 가지고 놀면 좋을 큼지막한 바람개비가 능선마다 올라앉아 세차게 돌며 산꾼을 반기는 곳. 사시사철 바닷바람과 산바람이 만나는 평창의 명소, 바람의 언덕 선자령(1157m)을 찾았다.

잘 고른 날, 잘못 고른 날
1000m가 넘는 고개인데 야트막한 언덕이 두루뭉술하게 이어진 대관령(832m)은 북한의 개마고원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 고위평탄면으로 손꼽힌다.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서쪽으로는 잔잔한 능선이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급경사가 이어져 있다.

독특한 지형 때문에 겨울이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서리가 내리고 폭설도 잦다. 더욱이 백두대간에서 내리치는 산바람과 동해에서 치고 오르는 바닷바람의 만남의 장이기도 해 말 그대로 바람 잘 날 없는 곳이다. 강한 바람에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해 꽤 이국적인 초원지대가 펼쳐져있다.

▲ 선자령은 늦봄에서 초가을까지는 야생화를 볼 수 있고, 겨울에는 눈꽃을 만끽하며 걷을 수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다.

▲ 국사성황사에서 주 등산로인 포장도로까지는 약 200m면 닿는다.

사계절 나쁜 산이 있겠냐만 수년 전부터 선자령은 눈꽃산행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적설량도 많은데다 대관령에서 선자령 정상까지 야트막한 능선으로 이어져 있어 걷기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아 산꾼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겨울 명소가 됐다.

▲ 포장도로 위에 오르니 ‘휭~ 휭~’하고 바람소리는 요란하다. 하지만 아직 견딜 만 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듯 산행도 다르지 않았다. 설국의 황홀경을 기대하며 선자령 설산행을 계획했는데 12월에 들고도 한참, 선자령에 눈 소식이 없었다. 오히려 호남지방에 연일 폭설이 내렸다. 출발 며칠 전까지 발을 동동 구르며 애인 편지를 손꼽아 기다리는 군인처럼 눈이 오길 간절히 바랬다.

산행 2일 전, 드디어 평창에 눈이 내렸다. 대관령과 선자령에도 겨울왕국 다운 설경이 펼쳐졌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기대는 고스란히 설렘이 됐다. 그런데 이게 웬일. 산행 당일, 일찌감치 몸을 일으켜 산행을 준비하며 TV를 틀었는데 평창의 기온이 영하 17도까지 떨어졌단다. 강풍까지 이어진다고 바깥출입을 주의하라면서 지역방송의 기상캐스터가 미소 지으며 당부했다. 어째 달달하지만 악마의 미소처럼 씁쓸함이 남는다.

하늘은 쾌청했다. 분명 눈꽃 산행에는 더 없이 좋은 날인데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그저 산행에 무리만 없는 날이었으면’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선자령 들머리로 향하는 길, 바람이 세찼다. 설렘이 조금씩 걱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소매 틈으로 황소바람 들어온다
대관령 휴게소에 도착하니 주변이 썰렁하다. 아무리 평일이라고 하지만 드넓은 주차장에 차가 거의 없었다. 눈이 내린 다음날인데 눈꽃산행 명소에 이정도로 인적이 드문 건 기온 탓인 것 같다.

▲ 저 멀리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을 날 수 있다면 금방이라도 도착할 것 같다.

출발 전 코스를 바꿔야 할지 고민했다. 선자령은 보통 들머리인 대관령휴게소에서 출발해 국사성황당을 지나 동해전망대와 새봉을 거쳐 풍력발전단지까지 올라가 야트막한 초원지대를 걸어 정상까지 오른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내려와 하늘목장사거리를 지나 샘터와 풍해조림지를 거쳐 양떼목장 옆길을 통해 대관령휴게소로 원점회귀한다.

하지만 오늘은 기온이 워낙 낮은데다 바람까지 강해 능선에 내린 눈이 계곡으로 쓸려 내렸을 것 같았다. 움푹한 계곡에 쌓인 눈을 모르고 밟았다가 허리까지 푹 빠져서 고생했던 기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눈이 어느 정도 얼어 있어 몸으로 파고들지 않고 몸에 닿아도 바로 털어낼 수 있었다.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가 다시 그 길을 따라 내려오기로 결정했다. 강풍이 위협적이라고는 하지만 걷기에 불편할 정도의 눈이 산행에는 더 어려움을 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양떼목장으로 회귀할 게 아니기 때문에 차량으로 접근할 수 있는 최대 지점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 등산로를 따르다 첫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꺾어 조금 더 가니 국사성황사가 나타난다. 이곳은 대관령국사서낭을 모신 곳으로 국사성황당이라고도 부른다.

▲ 국사성황사에서 산길에 오르니 추위는 잠깐, 눈앞으로 설경이 반겼다. 한폭의 수묵담채화 속을 걷는 느낌이다.
“대관령휴게소에서 걸어오려면 한참인데 시간 벌었네요. 들어오면서는 안보이더니 안쪽으로는 눈도 많이 쌓여서 눈꽃 산행하기엔 좋겠어요” 국사성황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일행에게 산행의 기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칼바람이 맹수처럼 달려든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온다고 했던가, 꽁꽁 동여맨 소매와 목 사이로 벌써부터 한기가 파고들었다. “지금은 괜찮은데 오늘 많이 춥겠는데요?” 동행한 여기자가 목도리를 두르며 긴장한 듯 한마디 내뱉는다.

지체하면 체온이 떨어질 것 같아 배낭을 메고 바로 출발했다. 국사성황사에서는 산길을 따른다. 여기서 200m 정도만 올라가면 포장도로와 합류한다. 산길에 오르니 추위는 잠깐, 눈앞으로 설경이 반겼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내며 걷는 기분은 경험해 본 사람만 안다. ‘뽀득, 뽀드득’ 하얀 발도장을 찍으며 걷는 즐거움. 동심으로 돌아간 듯 미소가 절로 났다.

눈이 숨어 사는 숲으로 접어들다
아무리 눈이 내렸다지만 합류지점까지는 금방이다. ‘휭~ 휭~’하고 바람소리는 요란한데 산비탈이 바람을 막아주어 생각만큼 춥지 않았다. 포장도로에 오르니 눈이 내리고도 차가 여러 번 다녔는지 길게 타이어 자국이 이어져있었다. 바람이 쓸고 갔는지 눈도 많이 쌓여있지 않다.

▲ 마침 눈이 내린 뒤 하늘은 개어서 바람만 없으면 산행에 더 없이 좋을 것 같았다.

“길이 이정도만 되면 걷기에 좋겠는데요? 생각보다 힘들지 않겠어요.” 여기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넨다. KT통신중계소까지 이어진 길은 포장도로라는 점이 아쉬울 뿐 크게 나무랄 데가 없다. 여러 번 이곳에 왔지만 포장도로라서 그런지 계절에 상관없이 여기까지는 늘 평범했던 기억이다.

KT통신중계소를 지나 왼쪽으로 난 길을 따랐다. 여기서부터 산길로 접어든다. 본격적인 설산행이다. 야생화가 많기로 소문난 이곳은 늦봄에서 초가을까지 지천이 꽃밭이다. 겨울에도 새하얀 눈꽃이 피어나니 말 그대로 천상의 화원이란 말이 어울리는 곳이다.

▲ 바람이 눈을 모아놓은 곳을 지나면 어김없이 발이 푹푹 빠진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설경에 사방을 둘러보며 걸으니 얼마 되지 않아 동해전망대에 닿았다. 강릉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나무 데크로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시설이다. 날씨가 맑아 저 멀리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날아갈 수만 있다면 금방이라도 도착할 것 같다.

전망대를 지나면서 어려움이 시작됐다. ‘평창에 제법 내렸다는 눈이 모두 어디 갔을까’ 했는데 여기에 다 모여 숨어 있었다. 길에도 높고 낮음이 있을 텐데 쌓인 눈을 강한 바람이 평평하게 다져놓아 여기저기서 푹푹 빠진다. 무릎은 기본이고 잘못 디디면 허벅지까지 쑥 들어가기 일쑤. 걷는데 여간 불편하지 않다. 그래도 날씨가 워낙 추워서 눈이 어느 정도 얼어 있어 몸속으로 파고들지 않고 몸에 닿아도 바로 털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 함께 한 여기자는 선자령 찬바람에 호되게 당했다. 눈썹까지 얼어붙은 모습이 애처롭다.

“아이쿠, 아이쿠” 여기자의 탄성이 한 번씩 터지면 어김없이 기자의 다리 한쪽이 눈 속에 쑥 들어가 있었다. 부산 태생인 그녀에게 이런 경험은 한편으론 고생이지만 지나고 나면 한편으론 추억이 되리라.

사람 하나 쉽게 들었다 놓는 바람
눈길을 지나 능선에 올랐다. 이젠 조금 걷기에 수월해졌나 했더니 더 강한 놈이 일행을 막아선다. 바람이다. 바람은 차가웠다. 그리고 참말 강했다. 태풍의 강도를 설명할 때 ‘바람 3급’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초속 20m가 되면 끈을 꽉 조였던 등산모자가 벗겨지고 제대로 숨쉬기도 어렵다’ 딱 그랬다. 바람을 향해 얼굴을 돌리기도 어렵고 매무새를 정리한 옷과 모자가 순식간에 다시 흐트러지기 일쑤였다.

▲ 바람이 워낙 강해 누군가가 뒤에서 내 몸을 받치고 있는 듯 바람이 몸을 떠밀어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냥 이대로 걷다가는 바람에 휩쓸려 넘어지기 좋은 상태였다. 일행은 잠시 바람을 피해 능선 아래 한편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소매와 목덜미, 손과 얼굴 등이 바람에 노출되지 않도록 꼼꼼하게 신경 썼다. 의기양양했던 아까와는 달리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 정상까지 다시 눈길을 걸었다. 어찌나 깊은지 잘못 디디면 허벅지까지 빠지기 일쑤였다.
다시 능선에 오르니 바람이 잠시 잦아들어 있었다. 이때다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저 앞으로 대형 바람개비(풍력발전기)가 나타났다. 벌써 정상에라도 온 냥 설레기 시작했다. 뛰는 듯 걸어서 선자령 턱밑까지 다다랐다. 바람개비도 바로 코앞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그런데 언덕에 오르니 잦아들었던 바람이 다시 본색을 드러낸다.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어찌나 센지 등으로 바람을 맞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드러눕듯 몸을 아예 뒤로 젖혀도 쉬 넘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뒤에서 내 몸을 받치고 있는 듯 바람이 몸을 떠밀어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똑바로 걷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악! 살려줘요. 아이코, 무서워!” 여기자의 연이은 비명이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기자는 앞으로 가려고 하는데 바람에 밀려 몸은 자꾸만 낭떠러지 쪽으로 이동했다. 재빨리 뛰어가 배낭 어깨끈을 붙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바람이 제 몸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신기한지 여기자는 계속 웃는다. 천진난만해서 좋다. 바람이 너무 강한 날은 능선 위로 걷는 걸 피하는 게 좋겠다.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도 추위도 지나면 추억이 된다
바람이 옷의 작은 틈으로 들어왔는지 체온도 급하게 떨어졌다. 걸어 올라오면서 몸이 제법 따뜻해졌다고 느꼈는데 추워지는 건 순식간이다. 강풍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한 걸음 한 걸음 어찌나 집중하며 걸었던지 뼈마디가 경직된 느낌이다. 노출된 얼굴 부위는 날카로운 칼로 엷게 도려낸 듯 전체가 쓰라렸다. 손가락 발가락 끝도 차츰 감각이 무뎌지면서 아린다.

▲ 강한 바람이 정상에 내렸던 눈을 치우기라도 한 듯 눈이 하나도 쌓여있지 않았다.

그렇게 위험한 정도는 아니지만 빨리 내려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상까지 뛰다시피 올랐다. 강한 바람이 이곳에 내렸던 눈을 치우기라도 한 듯 정상에는 눈이 하나도 쌓여있지 않았다. 평평한 이곳에 눈이 없는 게 신기하다. 정상 표시석 주변은 고요했다. 분명 끊임없이 강풍이 불었고,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추웠지만 사진으로 찍어서 보면 바람이나 추위가 느껴질리 없는 날이었다. 그런 정상이었다.

“평소엔 사무실이 조금 더워서 공기가 답답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따뜻하고 좋은 곳이었네요.” 여기자의 한 마디에 모두가 웃었다. 정말 그랬다. 간사한 사람의 마음이라지만 소중한 것은 결여돼 있을 때 가장 크게 느끼는 것 같다. 눈꽃 산행에서 눈보다 바람을 더 많이 만났지만 감사를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늘 내 몸을 끌어안았던 바람과 마음까지 차갑게 했던 추위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된다. 잊고 살다가도 이따금 툭하고 머릿속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는 얘기 하겠지. ‘추웠지만 정말 좋았다고, 바람이 불었지만 견딜 만 했다고’

내려오는 길은 빨랐다. 올라오며 눈 위에 새겨놓은 발자국을 고스란히 밟으니 좋았고, 어느 곳을 지날 땐 어디서 바람이 불어올지 눈치를 챌 수 있어서 좋았다.

▲ 내려오는 길도 바람은 만만치 않았다. 얼굴과 손발을 칭칭 동여매고 분주히 발걸음을 옮겼다.

▲ 눈이 내리고 그 위에 바람이 지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선자령은 대관령하행휴게소에서 출발해 등산로를 따라 국사성황당을 지난다. 여기서 동해전망대와 새봉을 거쳐 풍력발전단지까지 올라가 야트막한 초원지대를 걸어 정상까지 오른다. 새봉을 지나면 멀리 언덕위로 새하얀 풍력발전기가 이국적인 풍광을 선물한다.

정상에서는 보통 반대편으로 하산한다. 하늘목장사거리를 지나 샘터와 풍해조림지를 거쳐 양떼목장 옆길을 통해 대관령휴게소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다. 총 12km로 약 4시간이 소요된다. 늦봄에서 초가을까지는 강원도에 자생하는 다양한 야생화를 볼 수 있고, 겨울에는 눈꽃을 만끽하며 걷을 수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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