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에 홀려 바가지 쓴 시가 한 보루”
“체 게바라에 홀려 바가지 쓴 시가 한 보루”
  • 정진하 기자
  • 승인 2014.11.28 16: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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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기자의 쿠바 비아헤 ②

 정해진 루트는 없었다. 그럴듯한 지도도 없었다. 아니 사실 지도는 있어도 못 본다. 고질적 길치인 나는 발 닿는 곳으로 흘러가고 마음 닿는 곳에 머무르곤 했다. 스마트폰 길찾기 앱에 전적으로 의지하던 서울의 삶은 이제 없었다. 여행지의 밤은 초행길처럼 낯설다. 처음 만난 쿠바의 밤도 누군가의 민낯같이 낯설지만 생생했다.

▲ 자동차 번호판 모양의 기념품들.

▲ 아바나 대학교에 다니는 수완 좋은 청년.
친구에게 전화를 건 카사 주인아저씨는 곧 데리러 올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카사 가족과 어색한 침묵, 몇 번의 힐끔거림의 시간이 흐르고 인상 좋은 첫, 카사 아저씨를 만났다. 물구덩이도 피하지 않고 시원하게 캐리어를 끄는 아저씨를 졸졸 따라 도착한 방에는 화장실과 큰 침대가 두 개나 있었다. 그래서 역시 가격 흥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방값에 5CUC를 더 지불하고 다음날 아침식사를 부탁했다. 말만 잘 하면 방값에 포함시켜 주기도 한다.

아침식사는 보통 몇 가지의 과일, 빵, 주스 혹은 커피 등이 제공된다. 하지만 커피맛은 집집마다 차이가 심하다. 설탕을 잔뜩 넣은 쿠바식 커피를 주기도 하고 혹은 흙 맛이 나는 커피를 내어 주기도 한다. 산뜻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굳이 이만큼의 공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바나를 조망할 수 있다는 숙소 정보를 알고 있어 미안한 마음을 무릅쓰고 카사를 나섰다.

‘인생은 어차피 풍문’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잠꼬대같은 거리에서 잠시 멍하게 서있었다. 정신이 없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 속으로 갑자기 내던져졌고 자전거 택시를 끄는 사람들은 문맥도, 두서도 없는 고백을 해왔다. “레이디, 뷰티풀! 알러뷰!” 이런 진정성 없는 고백일지라도 흐뭇한 마음에 돌아보면 그들은 여지없이 말했다. “택시?”

▲ 아바나 골목에 주차된 낡은 올드카.

▲ 라임향이 진한 모히또를 만들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믿고 싶게 만드는 탄탄한 근육질 아저씨에게 주소를 내밀었다. 아저씨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페달을 밟았다. 여기저기 파인 길,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마구 지나가는 차, 그리고 사람들. 무질서해 보이는 그들만의 질서로 그렇게 쿠바는 잘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도착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는 잠시 멈칫했다. 수리 중이었다. 자전거 택시 아저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거운 캐리어를 들쳐 메고 10층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나도 올랐다. 후회는 이미 늦었다. 다시 캐리어를 끌고 내려갈 자신이 없었음으로. 그렇게 며칠을 오르내렸다.

굳이 왜 나였을까.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어리숙한 나를 선택한 그 사람의 눈썰미는 칭찬해줄 만하다. 쿠바에 오기 전 몇 달간 어설프게 배운 영어가 화근이었다. 안녕도 아닌 “헬로”가 모국어처럼 반가웠다.

환전한 돈을 숙박비와 택시비로 다 써 물 하나 사먹을 돈이 없었다. “나는 이 주변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5시까지는 시간이 좀 있는데, 내가 뭘 좀 도와줄까?”라고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 말을 걸어왔다. 나는 환전소를 찾고 있다고, 어떻게 가는지 길만 좀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는 직접 데려다 주겠다며 재촉했다.  

▲ 센트로 아바나의 오래된 골목.

▲ 한 보루에 25개의 시가가 들어있다.

“쿠바는 의료와 교육이 모두 무료야. 그리고 야구가 유명해. 정말 좋은 나라 아니니?”라고 애국심을 잔뜩 드러내던 그는 환전을 마친 나에게 가이드비를 달라고 생떼를 쓰기 시작했다. 꽤 큰돈이었다. 이번에도 몇 달간 배운 어설픈 영어가 문제였다. 돈보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나는 내가 아는 최고로 교양 없고 상스러운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너무 실망했어”라고 말하며 얼마의 돈을 주고 말았다.  

그런 해프닝이 있은 후 핸드폰을 켜니 거짓말처럼 ‘너무 친절한 사람은 조심해’라는 엄마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쿠바노들의 호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지만 일단, 그들을 한 번쯤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소매치기가 극성이라는 유럽에서 가방 문을 열고 다니고도 무탈했기에 너무 자만했던 걸까. 말레콘 방파제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가장 상스러운 한국말을 중얼거리며. 이건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시가 25개를 품고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 체 게바라는 나의 우상이라고 말하던 아바나 대학교 학생은 시중보다 2배이상 비싼 가격으로 나에게 시가 한 보루를 팔았다. 그래도 그의 눈빛은 진지했고 나에겐 바다가 있어 다행이었다. 

▲ 말레콘에서 수영하는 소년들.

▲ 국영 환전소 카데카. 항상 긴 줄이 늘어서 있다.

▲ 카사 복도의 깨진 창문으로 본 쿠바.

▲ 주요 도시를 표시한 쿠바 지도.
아주 사소한 조언

일회용품이 풍족하지 않은 쿠바에서는 길거리 음료를 사먹을 때 유리잔에 담아준다.

다 마실 때까지 가게 앞에 서서 먹어야 하므로 가벼운 텀블러를 가져가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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