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작별. 그리고 홀로서기
위기, 작별. 그리고 홀로서기
  • 글 사진 김경희 기자
  • 승인 2014.11.1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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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KING | 네팔2

트레킹을 달리기에 비유하자면, 첫날은 준비 운동을 마치고 시작점에 서서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단계다. 근육을 풀어준 뒤, 앞으로 이어질 레이스를 상상하며 긴장과 설렘이 가득 차는 그런 상태. 둘째 날, 이제 진짜 레이스가 시작된다. 초반부를 어떻게 달리느냐에 따라 레이스를 완주할 수도, 중간에 기권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긴 여정에서 승리하기 위해 나만의 페이스를 갖춘다. 이제 시작이다.

알 수 없는 네 맘 닮은 네팔의 하늘
아침 식사로 느끼한 오믈렛을 선택한 것은 실수였지만, 다행히 오늘 날씨는 맑다. 유머감각 풍부한 롯지 주인장의 배웅 덕에 기분도 좋아진다. 높은 고도에 위치한 마을에 해가 서서히 떠오르면서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조금씩 걷혔다. 롯지촌 주변으로 방목된 동물들, 고공의 흔들리는 구름다리. 이국적인 장면에 마음이 설레어 온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나타난 계단에서 속도가 점점 떨어진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긴 오르막을 오랜 시간 올랐다. 어디쯤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기나긴 계단. 숨이 차오른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일정한 간격과 반듯한 높이로 계단을 닦았을 네팔인의 수고가 느껴져 새삼 감탄이 흘러나온다.

보통 한 시간 반 정도를 걷고 15분 정도 휴식을 취한다고 하는데 지금의 페이스대로라면 절대 쉴 수가 없었다. 흠뻑 땀을 흘린 뒤 오래 쉬니 한기가 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몇 해 전, 일본 다테야마의 3000m 고산을 오를 때엔 느린 속도로 꾸준히 올랐다. 이번에도 거북이 전략을 사용하기로 했다.

허벅지가 터질 듯 고통스러운 순간. 흐르는 땀으로 자꾸 눈이 따갑다. 계속 땅만 응시하며 걷다 잠시 서서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사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빛의 줄기. 눈부신 광선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네팔의 하늘. 시간이 흐를수록 지면의 수분이 증발해 오후가 되니 구름이 가득 찬 하늘로 바뀐다. 구름은 바람을 따라 빠른 속도로 멀어져갔고, 시시각각 변하는 아름다운 섬광은 거대한 산을 배경으로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정오 쯤 되자, 구름이 비로 변해 지면에 쏟아졌다. 잠시 비를 피하고 점심식사도 할 겸 지나던 롯지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지친 속을 달래기 위해 따뜻한 레몬티를 주문했다. 그리고 달밧을 시켜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다. 매일같이 사무실에 앉아 일만 하던 몸이 갑작스럽게 트레킹에 올라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비상약도 챙겨먹고 기운이 날까 홍삼환도 먹어봤지만 몸 속 어디에 숨어 뭘 하고 있는지 힘이 나질 않는다. 함께하는 동료 민주까지 꽤나 지쳐서 우리 둘은 이곳에서 두 시간이나 쉬어버리고 말았다.

서둘러 다시 길을 나섰지만 흐려가는 날씨만큼이나 몸 상태도 악화되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앉았다 일어나는 것도 어지러울 지경에 이르렀다. 안색이 창백해 보였는지 민주가 배낭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처음부터 마냥 의지할 수가 없어 호의를 사양하고 조금 속도를 늦췄다. 그렇게 힘겹게 걸어 마침내 숙소에 도달했다. 고라파니 숙소. 방에 도착하자마자 번개를 동반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무거운 빗줄기가 끊임없이 창가를 때려왔다.

나는 괜찮아. 걷기위해 이곳에 온 거니까.
기력이 채 돌아오진 않았지만 푼힐 전망대에서 일출을 보기위해 새벽, 롯지를 나섰다. 어제부터 내린 비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몇 발자국 걸었는데 현기증이 난다. 어제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걸어야만 했다. 전망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날은 밝았고 민주는 벌써 인증샷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맑은 날 일출을 보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잔뜩 구름에 가려져 산과 하늘의 구분이 가지 않는 모습도 그것으로 멋있다.

트레킹 3일째. 오늘의 목적지는 따다파니까지다. 고라파니는 2900m 정도에 위치해있고 따다파니는 2700m로 높이에 큰 차이가 없다. 고도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는 여정이기 때문.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단순 소화불량이 아니라 고산 때문이라면, 잠시 고도를 낮췄다가 올라가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따다파니의 식당은 숙소 별채 이층에 있었다. 식당 내부에는 중앙 난로가 있어 그 주변으로 추위를 녹이기 위한 여행객들이 차 한 잔씩을 손에 쥐고 앉아 있었다. 마치 사랑방 같은 느낌. 옆에 앉은 스위스 청년 다니엘과 인사를 나눴다. 그의 제안으로 포터들, 여행객과 함께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하지만 공기가 너무 더워 갑작스레 멀미가 났다. 창가에 앉아 찬바람을 맞으니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일행은 다음 목적지인 ABC까지 가는 것이 힘들지 않겠냐고 포기를 권했지만 내일은 더 낮은 고도로 내려갈 테니 괜찮을 듯해 애써 웃어보였다. 하지만 나 역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길에서 만난 인연은 결국 헤어짐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고라파니 롯지에서 만나 따다파니까지 동행했던 연옥은 아침식사가 끝나면 바로 란두룩에서 하산하고, 첫 시작부터 같이해오던 민주는 촘롱까지만 동행한 후 지누난다로 가서 하산한다. 아쉬움에 느린 식사를 한 뒤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조심히 잘 다녀오라며 격려를 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민주는 포터에게 나를 잘 부탁한다며 따로 팁을 챙겨주었다. 갈림길에서 악수를 하고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민주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잠자코 지켜보았다. 나보다 어렸지만 의지할 수 있어서 고마웠던 동생 민주, 안녕.

‘이제 혼자.’ 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를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현실이 힘들지라도 스스로를 믿고 이겨내야만 한다. 무사히 다음 목적지 ABC까지 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는다. 어렵겠지만 나는 해낼 것이다. 나는 이곳에 쉬러온 것이 아니다. 나는 걷기위해 왔다. 내일은 레이스 반환점을 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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