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으로 튀어! 강원도 바우길
선자령으로 튀어! 강원도 바우길
  • 김재형 기자 | 사진 김해진 기자
  • 승인 2014.09.1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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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R OUTBOUND ①트레킹&캠핑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한풀 꺾인지라 이번 여정을 준비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던 건 사실이다. 가을의 정취를 찾아 떠난 곳은 강원도 바우길, 선자령 정상을 거쳐 보광리 마을까지 이르는 울트라 바우길 5코스다. 겨울 산행지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탁 트인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푸른 산들의 파노라마와 이국적인 풍광을 자아내는 초원 위의 풍력발전소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선자령은 백두대간의 주능선에 우뚝 솟아 있는 해발 1,157m 산이다. 산이되 ‘고개 령’을 붙인 흔치 않은 산이다.

바람을 맞이하러 가자

출발 당일의 날씨는 무척 좋았다. 조각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 위로 풍요로운 햇볕이 우리를 비추었고, 가을을 알리는 선선한 바람이 계속 불어왔다. 차로 네 시간을 달려 도착한 대관령 휴게소는 평일 한낮임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선자령을 오르려는 등산객들과 양떼 목장을 찾은 관광객들이 자그마한 휴게소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우리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각자의 배낭을 짊어졌다. 한 달여 만에 다시 떠나는 백패킹이지만 무게가 새삼 만만치 않게 느껴졌다.

▲ 선자령은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북서풍을 정면으로 맞기 때문에 바람이 무척 거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면에서 강릉시 성산면을 연결하는 대관령(大關嶺)은 해발 832m의 태백산맥을 대표하는 고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대관령은 예로부터 중앙과 지방, 영동과 영서를 구분하는 지리적 방어적 관문이자 상징적 공간이었다. 처음 부른 것은 16세기경인데, 대관(大關)이라는 이름에는 큰 고개라는 뜻과 험한 요새 관문이라는 뜻이 함께 담겨있다.

우리는 첫날 해발 1,157m의 선자령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고도차가 얼마 나지 않고 거리상으로도 대략 6km의 완만한 능선길이라 정오를 넘기고 출발했지만, 시간상의 부담은 없었다. 이번 백패킹에도 어김없이 지난달 계곡 트레킹의 동반자 본지 문길현 기자가 함께 했다. 그리고 새로운 멤버는 캐나다에서 온 박경진 씨. 시종일관 지치지 않는 입담의 소유자로 이번 여행 내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 임도를 따라 걷다보면 곧 나무 계단이 나온다.

▲ 선자령 능선에는 수십기의 풍력발전기가 설치돼 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이미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등산객들도 있었다. 우리는 선자령 안내판을 따라 등산길 초입에 들어섰다. 나무 계단을 따라 오르기 시작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선선한 바람은 온데간데없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등에 맨 배낭이 바윗덩어리처럼 느껴졌다. 크게 심호흡을 해보지만 그때뿐이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옮기는 것 자체가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이 비탈은 넘어 보려고 했지만, 곧 단념하고 멈춰 섰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막 사우나를 마치고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흠뻑 젖고, 핼쑥한 얼굴이 마치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이었다.

▲ 정상을 목전에 두고.
시작은 언제나 어려운 법

이때가 바로 백패킹을 시작했음을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주변의 경치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내가 지금 왜 이걸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만 가득하다. 다리는 후들후들 떨려오고 쿵쾅대는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다. 힘들다는 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수가 있는 건 아니다. 비틀거리면서도 나아가는 게 전부다.

묵묵히 전진하다 보면 곧이어 심장이 몸 속 구석구석으로 혈액을 공급하고, 근육은 최적화된 움직임을 찾아나가는 것을 느낀다. 이미 정상에 다 오른 마음과는 다르게 육체는 몸부림치다가 그제야 길을 떠날 채비를 갖춘다.

이윽고 통신중계소를 지나 새봉에 오르니 저 멀리 탁 트인 초원지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능선 일대를 수놓은 초록빛 잔디밭은 실로 우아한 풍경이었다.

새봉을 지나 다시 활엽수로 우거진 숲으로 들어섰다. 길 바깥으로는 원시림을 연상시키듯 이름 모를 풀들이 무릎 높이까지 우거져 있었다. 우리는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흠뻑 땀을 흘리고 마시는 이온음료의 한 방울, 한 방울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숲을 벗어나자 경사는 평지를 걷는 수준으로 완만해졌고, 선자령 일대에 설치된 풍력발전기는 점점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 초원위로 땅거미가 내려 앉았다.

▲ 여유로운 표정의 문길현 기자.

만만치 않은 선자령의 매서운 바람

선자령은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북서풍을 정면으로 맞기 때문에 바람이 무척 거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 때문에 선자령에는 지난 2004년부터 풍력발전기가 수십 기 이상 설치돼 있다. 최적의 지리 조건과 함께 대체 에너지 도입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지만, 설치 전에는 환경보호와 자연미를 훼손한다고 하여 환경단체와의 반발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아쉽지만 선자령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인지라, 풍력발전기가 설치되기 전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다만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초원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풍력발전기가 한층 더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하는 것 같이 보였다.

▲ 다시 떠날 채비를 하자.

▲ 문 기자 역시 선자령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가 저물 무렵 도착한 선자령 정상 일대의 초원 지대에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백패커들이 이미 사이트를 구축하고 텐트를 쳐놓고 있었다. 우리는 선자령의 바람을 정면으로 맞서며 초원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문 기자는 얼마 전 구입한 침낭 외피의 성능도 시험할 겸 홀로 비박을 할 생각으로 호기롭게 자리를 물색 중이었다. 그러나 선자령의 바람을 너무 가볍게 여긴 탓일까. 흐르던 땀은 어느새 순식간에 말라붙었다.
“이거 너무 추워서 안 되겠는데요.” 텐트를 다 치기도 전에 문 기자가 포기를 선언했다.

▲ 아침 역시 간단하게 해결.

▲ 비를 맞으며 잠시 쉬어간다.

▲ 텐트 정리도 확실하게.

각자 가져온 바람막이를 챙겨 입고 발열도시락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이번 백패킹의 뉴 페이스 박경진 씨는 캐나다 영주권자다.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가 영주권을 따고 아예 그곳에 생활터전을 잡았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가진 직업과는 별도로 그가 진짜 하고 있는 일은 만화를 만드는 일이다. 우스갯소리를 하다가도 만화와 관련된 얘기가 나오면 무척이나 진지해졌다. 출간 계획과 향후 포부에 관한 그의 얘기를 드는 것은 꽤나 흥미로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매서운 바람 앞에서 모두가 손을 들었다. 바람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고, 결국 각자의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플라이 위에는 벌써 이슬이 잔뜩 맺혀 있었다.

▲ 정상비석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기.
▲ 울트라 바우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녹음이 우거진 울창한 산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늦게 찾아온 가을 장마

다음날 아침, 눈을 뜨고 텐트 밖으로 나와 보니 짙은 안개가 정상 일대를 감싸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 차 있어서, 금세라도 비가 내리기 일보직전이었다. 오늘의 종착지는 보광리 마을. 대략 10킬로 남짓한 거리에다가 이제는 정상에서 내려가는 일만 남은지라 발걸음은 한결 가뿐했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 비쯤이야 가볍게 맞아주기로 하고, 울트라 바우길 5코스의 대공산성으로 향했다. 대여섯 개의 풍력발전기를 지나치니 초원위에 홀로 서있는 소나무가 보였다. 임도를 따라가지 않고 소나무를 끼고 돌면 울트라 바우길 표시와 함께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만한 숲길을 찾을 수 있다. 대공산성을 지나쳐 보광리 마을로 향하는 길이다.

▲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지만, 가볍게 맞아주기로 하고 길을 재촉했다.

걷는 내내 비는 온종일 그쳤다 내리기를 반복했고, 우리가 마침내 산에서 내려올 때쯤엔 온 몸은 물론 신발까지 흠뻑 젖은 상태였다. 따끈한 식사가 생각나고, 지붕 있는 곳에서의 잠자리가 그리워졌다. 그러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한편으론 일정상 더 많이 걷지 못하는 게 아쉽기까지 했다. 얼핏 보면 모순이지만 사실 누구나 다 느끼는 감정이다. 길 위에선 일상이 그립지만, 돌아오고 나면 길 위의 삶이 간절해진다. 우리는 이제 멈추고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더는 아쉽지 않다. 간절해지는 순간 다시 또 떠나면 되니까.

▲ 숲길로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수터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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